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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숙 목사 인터뷰] 마삼락 선교사님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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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ㆍ 2008-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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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사무엘 휴 머펫(마 삼락) 박사 부부의 댁을 방문한 아침은 봄꽃 향기가 싱그러운 오월 초의 아름다운 아침이었다. 머펫 박사는 프린스톤 신학원에서 미션과 에큐메닉스의 헨리루스교수로 은퇴한 분으로 한국 초기 개신교 선교사였던 사무엘 오스틴 머펫(마포삼열)의 아들로서 한국에선 익히 잘 알려진 분이다.

마펫박사는 자신보다는 부친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였다. 부친인 머펫 선교사는 118년전, 1월 15일, 자신의 생일날 인천 제물포에 도착하여 그후 46년이라는 긴 생애를 한국 최초의 장기 개신교 선교사로 평양에서 보내었다. 그는 복잡한 서울을 떠나 그에 앞서 25년 전 한국에 첫 기독교 선교의 문을 열고자 왔던 장로교 선교사인 토마스 선교사가 순교했던 평양으로 들어갔다. 그는 1901년에 평양에 장로교 신학교를 설립하여서 한국 최초로 서양 학문을 가르치는 대학의 학장으로 봉사하였으며 1907년에 독립된 최초의 장로교단의 의장으로 봉사하였다. 또 평양 숭실대의 학장을 지냈으며(1918-1928) 1934년 70세의 나이에 정년퇴직 했다. 1936년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일제의 탄압에 불복, 폐교령을 내리고 암살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 임시 미국으로 왔으나 다시 한국으로 가지 못하고 3년 후 캘리포니아의 몬로비아에서 소천하였다. 67년이 지난 후 그의 유해는 장신대의 105주년 기념행사를 맞이하여 캠퍼스 묘지에 비로소 안장되었다.

머펫 박사는 부친의 신앙관에 대해 회고하기를 그는 철저히 예수와 십자가만 바라보는 복음 중심적이고 진지하고 정직하고 열정있는 분이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성경귀절의 하나는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머펫 박사의 다이닝룸에는 아주 한국적이고 운치있는 병풍이 걸려 있었는데 호리한 키의 마펫 박사는 약간 휘청거리는 듯한 걸음걸이로 필자를 안내하며 병풍속의 그림을 하나하나 설명해 주었다. “여기가 모란봉입니다. 여기가 대동강이고요, 여기가 보통문, 여기가 평양의 보통강 이지요. 이 거리가 바로 제 부친이 돌을 맞으셨던 곳입니다.” 그는 1년 동안 여섯 차례나 돌을 맞고 평양 밖으로 끌려나갔다. 120여년 전, 선교라는 청운의 뜻을 품고 극동의 미개하고 위험한 오지의 나라에 와서 주님과 영혼에 대한 뜨거운 가슴 하나로 조선 땅을 걸어 다녔던 한 백안의 청년이 바로 평양시 이 거리에서 돌을 맞고 피를 흘렸다는 선명한 지적에 필자의 가슴이 울렁거렸다.

머펫 박사는 거실의 의자에 앉아서 조용히 눈을 감으며 나직히 말하였다. “제 부친이 한국에 왔을 때 그는 돌을 맞았습니다......그러나 제가 한국에 왔을 때 저는 꽃다발과 대 환영을 받았습니다.” 그의 말과 말 사이에는 물리적인 시간을 넘어서는 참된 가치의 무게가주는 경건함이 진실되게 실려있었다. “저의 부친은 결코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오직 주님께만 영광을 드리고 싶어 하셨습니다.”

마포삼열 선교사는 거리의 사도였다. 그는 토마스 선교사가 순교했던 평양에 와서 평범한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협곡도 마다 않고 늘 걷고 걸었다. 그는 환난과 고통에도 굴하지 않았던 사랑의 사도였다. 그에게 돌을 던지며 괴롭혔던 깡패 ‘이 기풍’은 후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주님의 음성을 듣고 회심하여 한국 최초 7인 목사중 한 사람으로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마포 삼열 선교사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로 평양을 떠날 때 평양은 천 여개의 교회가 있고 800여명의 신헉생을 배출한 새 예루살렘으로 변화되었으니 그 놀라운 복음의 결실은 죽어가는 영혼에 대한 헌신적이고도 뜨거운 사랑으로 맺힌 전도의 열매였다.

마펫 박사는 5형제중 3째 아들로 1916년에 평양에서 태어나 그가 항상 사랑하는 한국에서 18세까지 살았다. 1934년 미국으로 와서 휘튼과 프린스턴에서 수학하고 예일에서 Ph.D.를 받았다. 그와 그의 첫 부인 엘리자베스는 중국 선교사로 파송되어 1년간 중국어를 배우고 시민 전쟁이 다가올 때 옌칭대학과 낸킹 신학원에서 4년간 가르치다 종국에 추방당했다(1947-51). 그의 첫 부인은 미국으로 귀환후 얼마안되어 사망했다. 1955년 드디어 마펫박사는 “나의 고향 한국”으로 기쁘게 돌아왔다. 그러나 한국은 반쪽이 되었고 그가 태어났던 북녘은 공산당에게 잃어버렸다. 그러나 그는 말하기를 “나에게는 한국의 어느 쪽도 기꺼운 고향입니다.

다음 해인 1956년 그는 1년 전 프린스톤에서 만났고 프린스톤 신학원을 졸업한 아이린 플라워양과 서울 동대문의 연동교회에서 결혼하였다. 아이린 여사의 한국 이름은 ‘애린’인데 그녀는 내게 자랑스럽게 자신의 이름이 지닌 뜻을 일러주었다(사랑과 온정). 아이린 여사는 동료 선교사인 킨슬러 박사가 오래전 평양에서 시작했던 바이블 크럽 운동을 매우 적극적으로 해나갔다. 이것은 가난해서 정규 학교에 입학할수 없는 아이들을 위해서 대규모로 네트 ㅇㅝㅋ이 형성된 미인가 기독교 학교운동이었다. 안동에서 가난한 중.고등학생들을 위해 성경 구락부 운동을 시작해서 1981년 머펫 박사부부가 한국을 떠날때는 전역에 소 그룹들의 모임이 총 50,000 여명의 규모로 성장하였다고 한다. 제자 훈련을 통해 많은 주의 종들이 양육되었다.

머펫 박사는 한국의 고향으로 돌아온 26년간 부친이 1901년 설립한 신학원의 교수로 봉사했다. 공산당의 침입으로 남한으로 내려온 신학원은 서울에서 장로 대학과 신학원으로 재 조직되었다. 마펫 박사는 기독교사를 강의하다가 아시아 기독교사로 전문화 시켰으며 세계 선교 학원중 초대 신학원 총재가 되었다. 그는 또한 독립된 초교파적인 아시아 신학 연구쎈터 의 협동 창립자가 되었다(ACTS, 1974-81). 그는 이 외에도 뉴욕 한국 장로 선교회 대표, 왕립 아시아 협회 한국 지사장, 대한 미국 교육 위원회 회원등 여러 많은 임직을 맡았다

필자는 윈드로우에 있는 그들의 매우 특별한 아파트를 방문하고 깊은 인상을 받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사는 집 내부가 아릅다운 한국의 장기, 그림들과 사진들, 근사한 비단장식과 한국의 마지막 왕비인 민비의 대례복의 재단등으로 온통 채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 기독교사의 권위자인 마펫 박사는 이미 1962년 “한국의 기독 교인”(1962)이라는 책을 발간 했는데 그 책 안에는 순수한 한국인들의 전통적인 문화의 체취가 흠씬 풍겨나는 사진들이 정겹게 삽입되어 있다. 다른 저서로는 올비스 출판사의 “아시아의 기독교 역사 I권: 초기 - 1500 (1992), 2권: 1500 - 1900, (2005)가 있다.

머펫 박사부부는 최근에 프린스톤 커뮤니티 쎈터(KCCP)의 건립 기금으로 정성어린 기부를 하였다. 이에 관해 필자가 질문을 하자 그는 설명하기를 “이곳의 한인들은 다른 인종의 이민자들처럼 고도로 다양한 문화권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인들이 훌륭한 미국인이 되기위해 노력하는 가운데 감당하는 스트레스를 완화하고 또 한인들로서의 정체성을 보존 하기위한 장소가 필요한 것입니다. KCCP는 1세와 2세대의 한인 가족들에게 이민 문화권 안에서 가치있는 모국의 문화를 제공하는 역할을 담당할수 있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한국이라는 단일 문화권에서 한국인 아닌 한국인, 외국인 아닌 외국인으로 오랜 세월 살아온 분으로서의 체험적인 고견이리라. 슬하에 자녀들 없이 주의 자녀들만을 당신들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평생 믿음의 자녀들 양육을 위해 노고를 아끼지 아니하신 분들의 순수한 정열이 이 분들의 맑은 눈빛만큼이나 고왔다.

필자가 그에게 우리가 어떻게 진정한 영성을 가질수 있는가를 질문하자 그는 간단하고 명료하게 답해 주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웃을 사랑하라.”입니다. 다음에 그에게 개신교계 안의 비평적인 신학적인 논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묻자 그는 매우 시사적인 의미있는 답변을 해 주었다. “누구든지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한 자이다”라는 마가 복음 9장 40절의 말씀을 인용하며 계속해서 성경을 읽음으로써 신학적인 사고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인도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세번째로 미국 교회와 한국 교회간의 어떤 차이가 있느냐는 물음에 그는 웃으면서 말하길 “지금 날 분규에 끌어넣는 군요. 양쪽의 교회가 장점과 단점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어느 교회가 옳고 어느 교회가 그르다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한국 교회의 장점으로는 집중적인 성경 공부와 개인 기도생활, 십일조, 세계 선교에의 열심, 사역자뿐만이 아닌 남녀 평신도들의 복음전파의 열정등을 꼽을수 있읍니다. 인구 비례로 볼 때, 세계에서 한국 교회가 가장 빠른 교회 성장을 이루게 된 것은 이런 장점을 통해 이루어 졌다고 봅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가장 현저한 약점은 교계의 분립입니다. 한국 교회의 분파속도는 거의 성장 속도와 맞먹습니다. 예를 들면 한국 최대 교단인 장로교단 안에는 90여개의 분파가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의 분립은 미국의 경우와 차이가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분열후 양쪽이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분열후 양쪽이 몰락하는 것 같습니다.”

단정하고 아름다운 만큼이나 쎈스가 있는 아이린 여사는 명랑히 미소 지으며 머펫 박사의 붉은 넥타이를 가리켰다. “저 이는 늘 그 넥타이를 매고 있답니다. 이 넥타이는 장신대의 넥타인데 그는 항상 이 넥타이를 자랑스러워 하지요“ 머펫 박사는 회상에 잠긴 듯 말하였다. ”저의 부친이 태어나셨을 때는 링컨 대통령이 16대 미국 대통령이었던 시절이었습니다. 1901년 이래 장신대는 늘 제 부친의 고향이었습니다.“ 그는 이어서, ”제 부친은 선교사의 어려움을 알고 계셨기에 그러셨는지 당신의 자녀들에게 선교사가 되야 된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 다섯 형제중 네명이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아무도 모릅니다.“

필자가 머펫 박사 내외와 작별인사를 나누고 나왔을 때엔 하늘은 더욱 청명한 빛으로 훈풍속에 화사한데 외국 오지의 길 위에 선 한 홍안의 청년이 떨어뜨리는 선혈의 씨앗하나가 계속해서 필자의 마음 밭에 떨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필자는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닌 이 거친 세상의 미래를 위해서 사랑과 소망의 영으로 가슴이 훈훈해옴을 느낄 수 있었다.

박현숙 목사 hyunparkinchrist@yahoo.com
기독언론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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