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MC 최초 구소련 선교사 조영철 목사, 은퇴 예배 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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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3ㆍ2025-06-08 20:20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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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요약] 조영철 구소련 선교사 목사의 은퇴 찬하 예배가 6월 8일 후러싱제일교회에서 열렸다. 그는 UMC 뉴욕연회 한인교회가 파송한 최초의 구소련 선교사로, 유라시아 선교의 초석을 놓았다. 동역자들은 그의 헌신과 영향력을 기리며 감사를 전했다. 조 목사는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사역을 마무리했다.
UMC 뉴욕연회 한인교회가 파송한 최초의 구소련(러시아, 키르기스스탄) 선교사 조영철 목사의 은퇴 찬하 예배가 6월 8일 주일 오후 5시, 후러싱제일교회에서 뉴욕연회 한인코커스의 주관으로 진행됐다.
김진우 목사(한인코커스 회장)의 사회로 진행된 예배에서 김정호 목사(유라시아 선교협의회 회장)가 환영사를 했다.
유라시아선교회장 김정호 목사는 약 30년 전, 뉴욕연회 한인교회가 구소련에 파송한 최초의 선교사가 조영철 목사라는 역사적 사실을 강조했다. 김 목사는 이 중요한 사실을 교단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총회에 공식 제안하고 개인적으로도 총무에게 여러 차례 요청했으나, 아무런 반응이나 변화를 얻지 못했다고 아쉬워했다.
김정호 목사는 조영철 선교사의 사역은 단순한 파송을 넘어 유라시아 선교의 초석을 놓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밝혔다. 현재 유라시아 연회를 이끄는 에드워드 해가이 감독을 포함한 대다수 지도자들이 당시 모스크바에서 조 목사에게 직접 훈련받고 세례를 받은 영적 자녀들이라는 것. 김 목사는 이처럼 지대한 공헌을 한 선구자를 정작 파송했던 뉴욕의 한인교회와 지도자들이 잊고 지내는 현실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현했다.
김남석 목사(뉴드림교회)는 기도를 통해 사무엘처럼 헌신하여 구소련 땅에 복음을 심고 유라시아 연회를 일군 조영철 선교사의 사역에 감사를 올렸다. 김 목사는 “선교사님을 통해 뿌려진 생명의 씨앗이 큰 나무가 되어 다음 세대를 위한 선교의 토대가 되게 해달라”고 간구했다. 또한 “후회와 아쉬움이 아닌 감사로 사역을 마무리하고, 주님 안에서 쉼을 얻으며 더 귀하게 쓰임 받도록 축복해달라”고 기도했다.
김윤태 목사(미드허드슨교회)의 성경봉독 후에 김종일 목사(뉴욕성서교회)가 마태복음 28:18~20 말씀을 본문으로 ‘함께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했다.
김종일 목사는 ‘함께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통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약속의 깊은 의미를 조명했다. 김 목사는 이 말씀이 단순한 미래의 동행 약속이 아니라, 과거의 실패로 두려워하는 제자들을 향한 현재적 위로, 즉 “내가 지금 너희와 함께 있다(I am with you)”는 선언이었음을 강조했다.
김 목사는 이 진리의 살아있는 증거가 바로 조영철 선교사의 삶이라고 말했다. 불가능해 보였던 러시아에서의 사역을 통해 조 선교사의 삶은 그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명백히 보여주는 통로가 되었다고 전했다.
더 나아가 야곱의 예를 들며, 우리의 감정이나 믿음의 크기와 상관없이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분임을 강조했다. 인간의 마음은 흔들리고 약속에 대한 감격이 희미해질 수 있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는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역의 길에서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함께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권면했다. 그는 조영철 선교사처럼 여기 모인 모든 사역자들의 삶 또한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드러내는 통로가 되기를 축복하며 말씀을 맺었다.
에드워드 해가이 감독(유라시아 연회)은 영상으로 축사를 전했다. 감독은 영상 축사에서 조영철 목사의 은퇴를 축하하며, 그의 오랜 사역에 깊은 감사를 전했다. 해가이 감독은 “목사님 부부가 모스크바와 키르기스스탄에서 사역하며 교회 건물 매입을 돕고, 전 세계 교회들과의 파트너십을 구축해 주셨다”고 회고했다. 이어 “유라시아의 성도들은 목사님을 매우 사랑하며 모든 사역에 감사드린다”라며, 가족과 함께 편안한 은퇴 생활을 즐기고 기회가 되면 꼭 다시 방문해달라고 전했다.
뉴욕에 온 김안드레이 목사(유라시아 감리사)는 조영철 목사가 1990년 개척한 모스크바의 한글학교를 통해 처음 신앙을 접한 자신의 간증으로 축사를 시작했다. 그는 당시 고려인 사회의 출신 지역에 따른 파벌을 싫어했으나, 교회 안에서는 모두가 하나 되는 것을 경험하며 신앙을 키웠다고 회고했다.
조 목사가 1995년 미국으로 돌아간 후, 남겨진 교회는 자립해야 하는 도전을 맞았지만 이는 오히려 축복이 되었다. 그 교회에서 에드워드 해가이 감독과 신학교 총장을 포함한 12명의 목회자가 배출되었고, 그들이 다시 수많은 영적 지도자들을 키워내는 놀라운 부흥의 기초가 되었다고 증언했다.
김 목사는 조 목사가 이후에도 미국에서 유라시아 선교를 계속 지원했으며, 2013년에는 다시 선교사로 돌아와 코로나 팬데믹 이전까지 사역했다고 전했다. 그는 “오늘 은퇴하시지만, 다시 러시아로 오셔도 전혀 놀라지 않을 것”이라며 조 목사의 식지 않는 열정에 경의를 표했다.
마지막으로 조 목사 부부에게 깊은 감사를 전하며, 그의 사역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킨”(디모데후서 4:7) 삶이었다고 말하며 축사를 맺었다.
신승룡 장로(뉴드림교회)는 자신을 “조영철 목사님의 모스크바 사역을 처음부터 곁에서 지켜본 산증인”이라고 소개하며 축사를 시작했다. 신 장로는 공산주의가 붕괴된 직후, 어린 세 아들을 데리고 러시아 최초의 선교사로 부임한 조 목사가 불가능에 가까웠던 상황 속에서 교회를 1천여 명 규모로 부흥시킨 과정을 증언했다.
또한 모스크바 동서남북에 지교회를 개척하고 초교파 신학교를 설립하여 에드워드 해가이 감독과 안드레이 김 감리사 등 수많은 지도자를 배출하며 러시아 전역에 187개 교회 개척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회고했다. 신 장로는 조 목사가 뉴욕에서 안정된 목회를 하던 중에도 “러시아에 당신이 필요하다”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모든 것을 내려놓고 2차 선교사로 떠났다고 밝혔다.
이후 러시아와 키르기스스탄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 현지 지도자 교육과 교회 건축에 헌신한 그의 삶은 ‘러시아 선교의 아펜젤러’로 기억될 것이라고 말했다. 신 장로는 “눈물로 뿌린 믿음의 씨앗들이 풍성한 열매를 맺을 것”이라며, 3대에 걸친 목회자 가문을 축복하는 등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삶에 가득하기를 기원하며 축사를 마쳤다.
뉴욕그레잇넷교회 양민석 목사는 러시아산 목재로 지어진 가평의 한 교회에서 영상 축사를 보내왔다. 양 목사는 “선교사님의 사역 현장이었던 모스크바, 키르기스스탄, 우크라이나 등지에서 강의하며 목사님의 제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제자들이 보여준 스승과 선교에 대한 뜨거운 애착을 보면서, 조 목사가 비록 은퇴하지만 그의 사역의 열매와 영향력은 제자들을 통해 더욱 크게 퍼져나갈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아름다운 발자취를 남기고 은퇴하는 조영철 목사에게 진심 어린 축하를 전하며, 하나님의 역사가 은퇴 후에도 제자들을 통해 계속될 것을 축복했다.
전 카자흐스탄 선교사였던 푸르메 목사와 김유민 목사는 조영철 선교사 부부의 헌신을 기리며 축사를 전했다. 푸르메 목사는 초기 미국 남감리회의 선교 역사를 언급하며, 조 목사 부부의 순종이 유라시아 땅에 감리교가 재탄생하는 뿌리가 되었다고 말했다.
이어 김유민 목사는 사역의 관점을 전환하는 깊은 통찰을 제시했다. 그는 교회 개척이나 지도자 양성과 같은 눈에 보이는 성과도 중요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희생을 더 귀하게 보신다고 강조했다. 특히 선교지에서 자녀들이 겪는 어려움, 언어와 문화의 장벽에서 오는 좌절감, 수많은 눈물과 핍박 등 가족 전체가 감내해야 했던 고통을 하나님은 모두 기억하신다고 말했다.
김 목사는 “하나님의 축복은 희생의 깊이에 비례한다”며, 조 목사 사역의 풍성한 열매는 바로 그 엄청난 희생의 증거이며, 오늘 이 자리는 그 희생에 대한 하나님의 감사와 위로가 넘치는 시간이라고 축사를 맺었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33년간 사역해 온 류창현 선교사는 조영철 목사와의 50년 가까운 우정을 회고하며 축사를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선교사가 된 것이 전적으로 조 목사의 도전 때문이었다고 밝혔다.
1991년, 한국에서 안정적으로 목회하던 그에게 조 목사는 “편안하게만 있어도 되겠느냐”며 모스크바 선교 현장으로 그를 불렀다. 류 목사는 그곳에서 어린 아들 셋과 함께 생필품도 부족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1천여 명이 모이는 교회를 이끌며 영적 전쟁의 최전선에 선 장군처럼 분투하는 친구의 모습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류 목사는 조 목사의 그 도전이 자신을 33년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머물게 한 원동력이었다고 고백했다. 그는 감리교인 조 목사의 영향으로 장로교인 자신이 러시아에서 사역을 시작해 장로교 노회를 세울 수 있었다며, “내 사역의 모든 공로는 결국 조영철 목사의 공로”라고 말했다.
또한 조 목사가 연로하신 부모님께 효도하기 위해 은퇴를 결심했다는 사실을 전하며, 이는 사명의 길뿐 아니라 인생의 바른 길이 무엇인지 아는 모습이라고 말했다. 그는 친구의 새로운 시작을 응원하며 축하의 말을 맺었다.
뉴욕연회 한인코커스 목사들의 축가 후, 조영철 목사의 은퇴 답사가 이어졌다.
조영철 목사는 “절대 울지 않으리라 다짐했지만, 앞선 목사님들의 진심 어린 축사에 눈물이 터져 참을 수 없었다”며 감격과 감사의 마음으로 말문을 열었다. 그는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자신은 단지 하나님의 계획에 순종했을 뿐이라고 겸손하게 고백했다. 이어 자신이 러시아 선교사로 가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고 강조하며, 그 여정의 시작부터 함께하신 하나님의 세밀한 손길을 간증했다.
조 목사는 뉴욕연회 한인코커스가 모스크바에 개척된 교회에 파송할 선교사를 찾지 못해 어려움을 겪던 상황을 돌아보았다. 여러 목사들이 사모의 반대로 고사하던 중, “아무도 가지 않으면 가장 젊은 조 목사가 가야 하지 않느냐”는 말이 그의 마음에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박혔다고 말했다.
혼자 결정한 뒤 아내에게 알렸을 때, 아내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하나님이 가라 하시면 가야죠”라고 답했다. 조 목사는 아내의 그 믿음의 한마디가 평생의 사역을 가능하게 한 가장 큰 힘이었다고 말했다.
그의 파송은 교단의 공식적인 계획에도 없던 일이었다. 당시 연합감리교회(UMC) 세계선교부(GBGM)는 소련 선교 계획이 전무했다. 그러나 총무였던 랜돌프 뉴전트 박사가 그의 간증을 듣고는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인 것 같다”며 모든 계획을 취소하고, 1991년 1월 21일 직접 그와 함께 모스크바로 향했다. 교단이 아닌, 한 사람의 순종과 또 다른 한 사람의 영적 분별력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모스크바에 도착한 직후부터 시련은 시작됐다. 당시 러시아 지역을 관할하던 독일인 감독은 러시아 정교회와의 선교 협정을 이유로 들며 교회를 세우는 것을 강하게 반대하고, 조 목사에게 돌아갈 것을 종용했다. 하지만 조 목사는 “나는 감리교 목사이기에 감리교회를 세워야 한다”고 맞섰고, 결국 모스크바에 감리교회를 개척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얼마 후 독일 통일로 인해 그 감독의 직위가 사라졌고, 조 목사가 개척한 교회에서 그의 새로운 감독 취임식이 열리게 되었다. 조 목사는 이를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을 위해 급하게 움직이신 증거”라고 해석했다.
사역의 열매가 커지자 예상치 못한 질투와 견제도 뒤따랐다. 1993년 한 선교대회에서 조 목사의 사역이 큰 주목을 받자, UMC와 한국 기독교대한감리회(KMC) 지도부 사이에 미묘한 경쟁심이 생겨났고, 그 후로 공식적인 기록에서 조 목사의 이름이 의도적으로 누락되는 일이 벌어졌다.
또한 당시 감독은 사역의 중심지였던 모스크바가 아닌 다른 도시에 신학교를 세우려 했고, 이 과정에서도 여러 갈등과 어려움이 있었다. 조 목사는 이 모든 인간적인 방해에도 불구하고 사역이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고백했다.
그는 목회자로서의 정체성을 갖게 된 개인적인 아픔도 나누었다. 목사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는 말을 오히려 싫어했던 그는, 군 복무 시절 겪은 한 사건을 통해 ‘목사 아들’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하나님 앞에 진지하게 서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심지어 러시아로 떠나려 할 때, 그의 아버지는 “네가 내 교회를 이어야 한다”며 가장 강력하게 반대했지만, 그는 내적·외적 갈등을 넘어서는 그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연단이었음을 고백했다.
조 목사는 기도의 동역자들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았다. 특히 류창현 목사와의 오랜 우정, 이승우 목사의 애정 어린 질책, 그리고 자신의 사역이 잊히지 않도록 역사적 기록의 중요성을 계속해서 외쳐준 김정호 목사에게 깊은 감사를 전했다. 또한 자신의 사역 기간 동안 유일한 공식 후원 그룹이었던 뉴욕의 한인코커스 목회자들에게도 “코커스 목사님들이 아니었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며 거듭 감사를 전했다.
조 목사는 자신과 류창현 목사의 공통점으로 “사역을 하고도 알리지 못하는 고지식함”을 꼽았다. 보고서를 쓰거나 자신을 홍보하는 데 익숙지 않아 많은 기록이 남지 않았지만, 말없이 사역을 기록해준 언론이 있어 감사하다고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다시 한번 아내에게 가장 큰 감사를 돌렸다. “아내가 용기를 주었기에 사역의 길을 걸을 수 있었고,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자랐기에 세 아들 모두 목회의 길을 걷게 된 것 같다”고 고백했다.
그는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그 시절 하나님께서 급하게 쓰시기 위해 모든 열정을 부어주신 것 같다. 이제는 그 순수했던 열정이 남아 있지는 않다”며 모든 것이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어졌음을 고백했다.
답사를 마치며 그는 자신을 위해 귀한 자리를 마련해준 모든 이들에게 감사를 전했다. 조 목사는 퇴임 후 연로하신 부모님께 효도하며 살아가고 싶다는 소박한 꿈을 나누며, 지난 45년간의 목회 여정을 인도하시고 수많은 증인들을 세워주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렸다.
예배는 김영식 목사의 축도와 류경묵 목사(브루클린 교회)의 식사기도로 모든 순서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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