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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PC 웨비나, 김형익 목사 ② 청교도의 설교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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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2ㆍ2020-11-14 0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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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한인예수교장로회(KAPC, 총회장 조문휘 목사) 총회 교육부는 청교도 이민 400주년을 기념하며 “미국 청교도 개혁 신앙의 이민 목회 사역 적용”이라는 주제로 11월 9일(월)과 10일(화) 온라인으로 웨비나를 개최했다. 특히 웨비나를 시작한 9일은 400년 전에 청교도들이 미국에 도착한 날로 그 의미를 더 했다.    

 

첫날 조영천 목사(아틀란타새교회)는 “뉴잉글랜드 청교도가 꿈꾸던 교회”라는 제목의  강의를 했으며, 둘째 날은 김형익 목사(광주 벧살롬교회)가 “청교도의 유산과 21세기의 목회적 적용: 설교를 중심으로”라는 제목의 강의를 했다.

 

다음은 김형익 목사의 2번째 강의 내용이다. 김 목사는 총신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인도네시아 선교사로 섬겼고(1991-1995), GP선교회의 한국대표로 사역했다(1996-2003). 이민목회의 경험으로 미국 메릴랜드 주의 워싱턴 휄로쉽교회에서 수석 부목사로 섬긴 후(2003~2006), 2006년부터 죠이선교교회를 개척하여 2015년까지 섬겼다.

 

[이전 강의] KAPC 청교도 400주년 웨비나 ① 청교도의 설교를 중심으로

http://usaamen.net/bbs/board.php?bo_table=data&wr_id=1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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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교도 설교의 체험적 요소는 청교도 설교의 삼요소와는 구분되는 별도의 특징으로 다룰 필요가 있습니다.

 

B. 체험적 설교

 

조엘 비키는 『설교에 관하여』(복있는 사람, 2020)에서 개혁파(청교도)들의 설교의 특징이 체험적 설교, 또는 실험적 설교였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실험적(experimentum, experimental)이라는 말은 경험적(experientia, experiential)이라는 말과 같은 어원에서 나왔을 뿐 아니라, 여기서 동일한 의미로 사용됩니다. ‘시험하다, 증명하다’라는 것은 성경의 시금석에 따라 경험된 지식을 검사하거나 시험할 필요성을 가리키는데, 성경의 모든 말씀과 교리는 모두 시험해본 지식이고 경험적으로 입증된 진리라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청교도의 설교는 그리스도인이 일상의 삶 속에서 성경적 진리를 어떻게 경험하는지를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설교와 그리스도인의 삶이 유리될 수 있는 가능성을 허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머릿속의 진리 또는 이론적 지식에 머물 수 없다는 청교도들의 확신을 반영합니다.

 

어떻게 그들의 설교가 체험적일 수 있었고, 또 어떻게 우리의 설교가 체험적 설교가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중요합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조엘 비키는 “체험적인 설교는 설교자 자신의 죄와 슬픔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은 경험을 통해 생겨날 때가 많다.”고 말합니다.(『설교에 관하여』p.57). 체험적인 설교는 결국 설교와 설교자를 분리시킬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청교도들은 이 사실을 너무나 깊이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리처드 백스터의 말입니다. “설교의 의도는 영적인 교제와 더불어 설교자인 우리의 영혼에서 하나님의 백성인 그들의 영혼으로 무언가를 전달하는 데 있다.” 이 말은 설교자가 영혼에서 영혼으로 설교하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조엘 비키의 『설교에 관하여』에는 이런 흥미로운 부제가 있습니다. “설교자의 마음에서 회중의 마음으로 이어지는 개혁주의 설교(Proclaim God’s Word from the Heart of the Preacher to the Heart of His People).” 

 

설교는 설교자의 가슴에서 청중의 가슴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청교도들이 이해했던 설교의 체험적인 특징이었습니다.

 

C. 청교도 설교의 그외 특징들

 

이제 청교도 설교의 기타 특징들을 간단하게만 언급하겠습니다. 청교도들은 청중에게 설교하는 것만큼이나 자기 영혼을 향하여 설교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존 플라벨(John Flavel, 1628-1691)이 동료 목사들에게 한 말입니다. “형제들이여, 믿으십시오. 한 웅변가처럼 다른 사람들의 천 가지 죄를 공박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답게 우리 속에 있는 한 가지 죄를 죽이는 것보다 쉽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설교한다는 것이 내 자신의 심령에 한편의 설교를 하는 것보다 더 쉬운 것입니다.” (The Works of John Flavel, 6vols., Banner of Truth reprint, 1968, vol.6, p.568.)

 

청교도 설교자들은 설교와 설교자의 관계가 얼마나 깊이 연결되어 있는지를 실증적으로 보여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인간의 부패와 기만성을 가볍게 여기지 않았고 그것을 자신의 회중들에게 적용하기 전에 먼저 자신들에게 적용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리처드 십스의 말입니다. “회심한 후에도 우리는 우리 본성 속에 자리잡고 있는 교만의 잔재 때문에 그리고 우리가 자비로 말미암아 사는 존재라는 것을 보도록 박살이 나게 되어 있다.” 이 말을 인용하면서 이언 머레이는 로이드존스의 전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고 박살이 난 후에 오는 위로도 자신에 대한 새로운 신뢰를 갖도록 끌어올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만든다. 로이드존스는 계속해서 하나님에 대한 참된 경험의 특징은 ‘경외감과 여기에 무가치성이 동반되는 것’이라고 설교했다.”(이언 머레이, 『마틴로이드존스 (중기 1939-1959)』, 청교도신앙사). 이런 점이 아마 로이드존스를 현대의 청교도로 불리게 하는 이유일 것입니다.

 

청교도 설교자들이 자신의 영혼을 살피는 일을 얼마나 철저하게 했는지를 보여주는 말이 있습니다. 토머스 굿윈(Thomas Goodwin, 1600-1680)이 아들에게 쓴 편지의 한 대목입니다. “내가 나의 사역에 있어 냉담해지려 할 때, 안식일 아침이 와도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을 느끼지 못할 때, 또는 내가 성찬식을 행할 준비를 할 때, 나는 흔히 무엇을 하였는지 아느냐? 나는 지난 나의 생애의 죄를 이리 저리 들추었단다. 그러면 나는 언제나 다시 상하고 다시 통회하는 심령이 되고 내가 처음에 전하였던 것 같이 죄의 용서를 전할 준비가 되었지. 나는 언제나 강대상 계단 밑에서 잠시 멈추어 나의 지난 죄들을 이리 저리 들추지 않고서는 계단을 오른 적이 없었다. 나는 책상 옆을 서성이며 나의 젊은 시절의 죄와 지금까지의 나의 모든 죄를 되돌아보지 않고서는 설교를 작성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많은 안식일 아침에 그 주간 동안 기도가 부족하여 나의 영혼이 차고 메말랐을 때 강대상 위에 서기 전에 나의 과거의 삶을 뒤집어 보는 것은 언제나 나의 굳은 단단한 마음을 깨고 설교하기 전에 내 영혼을 복음과 더욱 가깝게 하였다.”

 

또 존 오웬은 이렇게 말합니다. “교인들을 위해 골방에 들어가는 것보다 교인들을 위해 강단에 올라가는 것이 더 많은 목사는 불쌍한 파수꾼이다.” 이런 말들 하나 하나는 청교도 설교자들이 얼마나 자신들의 영혼을 자신들이 전하는 설교로부터 제외시키지 않았고, 제일 먼저 그 설교의 청중이 되고자 했는가를 보여줄 뿐 아니라, 그 설교자들을 모든 부패와 타락으로부터 지켜준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청교도들의 설교의 또 하나의 특징은 그들의 설교는 고난을 통과한, 혹은 고난을 통과하고 있는 설교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설교의 탁월함은 마르틴 루터가 말한 신학자의 3가지 조건을 만족시킨데서 나왔습니다. 루터는 신학자는 성경(말씀 묵상)과 기도 그리고 고난을 통해서 만들어진다고 말했습니다. 청교도들이 살았던 삶의 자리가 이 세 가지 요소, 특별히 고난이라는 요소를 환경적으로 허락하였다는 점에서 그들이 땀 흘렸던 성경 본문과의 씨름, 그리고 그들의 골방에서의 기도와 함께 탁월한 설교를 만들어냈고 그들의 시대를 설교의 황금시대로 만들어낸 것입니다. 많은 청교도 설교자들이 설교를 위해 죽었고 감금되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설교를 준비하고 전했습니다.

 

청교도 설교의 또 하나의 특징은, 그들의 설교는 구분하는(discriminating) 설교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설교를 통하여 참 신자와 거짓 신자를 구별하는 것을 하나의 목표로 삼았습니다. 설교를 통해서 스스로 자기의 영혼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점검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제가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로이드존스가 종종 적용의 부분에서 ‘시금석(test)’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그 특징을 잘 보여주는 예입니다. 조엘 비키와 마크 존스는 『청교도 신학의 모든 것』(부흥과개혁사, 2015)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청교도는 인간 마음의 기만성을 잘 알고 있었다. 청교도 설교자들은 교회를 세상으로부터, 참 신자를 명목상의 신자들로부터, 구원얻는 믿음을 잠시 잠깐의 믿음으로부터 구별해주는 은혜의 표지들을 입증하는데 많은 수고를 기울였다. 토머스 셰퍼드의 『열 처녀』에서, 매튜 미드의 『유사 그리스도인』에서,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앙감정론』에서와 같이 청교도들은 다수의 작품들 속에서 가짜 신자와 참 신자를 구별하는 법에 대해 썼다… 이런 종류의 구별하는 설교가 오늘날에는 거의 없다…실험적 설교는 머리의 지식과 가슴의 경험을 함께 요청한다. 존 머리에 따르면 실험적 설교의 목표는 지성적 경건이다.” (p.798).

 

마지막으로 하나 더 말하고 싶은 청교도 설교의 특징이 있습니다. 조엘 비키가 분석한 것인데, 그들의 설교는 이상적이며 현실적이고 낙관적이었다는 것입니다.(『설교에 관하여』pp.35-37). 즉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이상을 설교했고(로마서 8장), 실제로는 힘겨운 분투 가운데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설교했습니다(로마서 7장의 현실). 그러나 그들의 설교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고 그 삶의 최종 목표가 영광의 나라에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이 소망으로 청중을 위로하고 격려할 수 있었습니다(요한계시록 21-22장의 낙관주의). 이런 설교는 치열한 전쟁의 한 가운데서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싸움의 전략과 승리의 희망을 제시해주는 설교입니다. 이것은 4~5세기 전 영국과 신대륙에서만이 아니라, 오늘날 미주 이민교회나 한국교회에 모두 유효한 설교의 원리가 될 것입니다.

 

왜 청교도 설교의 특징이 이것들뿐이겠습니까? 우리는 청교도의 설교들을 읽으면서 더 많은 특징들을 발견할 뿐 아니라 많은 유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들이 설교와 관련하여 남긴 유산은 넘치고도 넘칩니다. 이제 우리는 이 많은 유산을 어떻게 우리들의 시대에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문제를 고민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던져진 몫입니다.

 

4. 청교도 설교의 유산과 우리 시대 설교자들의 과제

 

우리는 무엇을 얻고 무엇을 버릴 것입니까? 우리가 청교도들의 설교 순서나 양식, 형식을 그대로 따를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다른 모든 것은 차치하더라도, 그들이 설교의 요소로서 중요하게 생각했던 강해적 요소, 교리적 요소, 적용적 요소는 오늘날에도 성경적으로 탁월한 설교라면 반드시 있어야 하는 요소들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이 세 가지 요소가 적절하게 섞여질 때, 그런 방식으로 본문의 그리스도와 그 영광을 드러낼 때, 찰스 스펄전이 말한 것처럼, 우리의 설교는 “교리적인 동시에 경험적이며 실천적인 성격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아무리 간단하게 말할지라도, 우리가 설교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수고의 땀을 흘려야 하는지를 말해주기에 충분합니다.

 

조엘 비키는 현대의 설교자들에게 이렇게 도전합니다. “과연 여러분의 설교에는 뜨거운 신학이 담겨있는가? 여러분의 신앙과 삶에서는 성경의 진리가 머리를 거쳐 마음으로 내려가는가, 아니면 그저 머릿속에만 갇혀있는가?”(『설교에 관하여』p.84). 

 

설교는 위험한 일입니다. 우리는 설교가 위험한 일이라는 것을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이 인식했던 것처럼, 또는 청교도 설교자 자신들이 알았던 것 만큼, 인식하고 있는지 물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외부로부터의 박해 때문만은 아닙니다. 설교가 위험하다는 것은, 설교는 영혼을 살리기도 하지만, 어떤 영혼은 죽일 수도 있으며(고후 2:15-16) 종종 어떤 청중으로 하여금 설교자 자신을 죽일 것처럼 미워하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설교가 그랬고, 사도들의 설교, 심지어 구약시대 선지자들의 설교도 예외 없이 다 그러했습니다. 청교도 설교자들 또한 그것을 그들의 시대에 온전하게 경험했습니다. 복음의 설교는 통합시키는 것이 아니라 가르는 성격을 가집니다. 메시지를 미워하는 사람들은 메신저를 죽이려 들 것입니다. 특별히 청교도들이 했던 바, 구분하는 설교를 전하는 것은 더욱 위험합니다. 하지만 구분하는 것은 설교의 본질이기에 피할 수 없습니다.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복음은 복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설교는 위험한 일인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도 이것을 분명하게 인식했기에, “설교하는 일은 어려운 과업이다. 내가 가끔 말했지만 만일 선한 양심을 가지고 있다면 한편의 설교를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고문을 당하고 돌을 나르는 편이 나을 것이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설교는 이렇게 “영원과 순간, 초월과 내재, 하늘과 지상 사이의 교차로”에 서는 위험한 일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영광도 있습니다. 청교도들은 이것을 알았기에 그 모든 ‘설교자들이 감당해야 하는 고난’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물론 이 영광을 알아야 합니다. 본회퍼의 말대로, “복음이 선포될 때 그리스도는 그의 백성 가운데로 걸어오십니다.” 청교도들은 이 복음이 선포될 때, 청중이 그 말씀을 들음으로써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본다는 것을 확신했습니다(고후 4:6). 그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지를 알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 전능하신 삼위 하나님의 대변자와 대사가 될 수 있다는 것에 두려운 마음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청교도의 유산으로 여기서 다루려고 앞에서 다루지 않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1563년부터 엘리자베스 1세가 금지를 시켰던 1576년까지 청교도들이 행했던 설교 학교(school of prophesying)의 전통입니다. 젊은 청교도 설교자들은 거기서 설교를 배우고 설교의 칼날을 연마할 수 있었습니다. 한 날 일단의 설교자들이 모여서 동일한 성경 본문을 가지고 4-5명의 설교자가 계속해서 설교를 하는 모임이었습니다. 순서는 젊은 설교자들로부터 시작해서 나이든 설교자들로 이어졌습니다. 종종 설교자인 목사들 외에도 설교를 듣는 회중이 함께 모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청교도 설교자들은 성경 본문에 대한 정확한 주해를 배울 수 있었을 뿐 아니라, 교리의 도출과 논증, 그리고 적용에 이르기까지 설교를 통하여 설교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저는 오늘날 21세기의 이민 교회나 한국교회 안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한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노회나 시찰회 혹은 더 작은 모임에서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청교도 설교의 유산을 소개했습니다. 그리고 그 적용의 문제는 비단 설교자인 우리만의 몫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청중의 몫도 있습니다. 그래서 설교자들만큼이나, 청중 또한 훈련될 필요가 있습니다. 설교를 잘 듣는 청중이 필요합니다. 저는 그 하나의 실제적인 방법을 청교도 시대의 전통에서 배울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것은 교리문답의 회복입니다. 교리문답을 통해서 우리가 무엇을 믿는지를 아는 성도들은 청교도들이 전했던 것과 같은 ‘이런’ 설교를 들을 준비가 된 청중이 될 것입니다. 물론 이런 청중을 준비시키는 것 또한 설교자의 직무라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이제 청교도 전통에서 배운 그 부요한 설교의 유산을 어떻게 오늘 우리의 것이 되게 하고 우리가 섬기는 모든 성도들의 유익이 되게 할 것인가는 여러분 각자의 과제로 남겨두려고 합니다.

 

5. 나가는 말

 

강의를 마치기 전에, 동료 목회자들과 나누고 싶은 한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의 잘못된 설교는 설교자 앞에 있는 회중에게만 나쁜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자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들 다음 세대의 설교자들과 그들의 회중에게도 심각한 해악을 미치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 자신이 우리 다음 세대의 설교자들에게 하나의 기준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과 같이 강단이 우스갯소리와 경박한 말들, 인간의 탐욕을 부추기는 거짓 복음으로 더럽혀져 있는 시대에, 우리는 더 좁고 더 외로운 길을 걸을 필요가 있습니다. 아니 그 길을 걸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안녕과 평화를 보장하지 않을지라도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 믿음의 선배들인 청교도들로부터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교훈입니다.

 

리처드 백스터가 말한 대로, 우리는 매주일 “다시는 설교를 할 수 없을 것처럼, 죽어가는 사람으로서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설교를 해야 합니다. 이런 일은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로이드존스의 말입니다.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죽어가는 사람으로서 설교하는 것은 강단에서 이루어지는 헌신이 아니다. 그것은 설교자 자신이 먼저 영원에 가까이 다가가 있다는 의식을 갖고 살아야 하고 이런 삶은 값비싼 포기를 전제로 하지만 참된 설교의 본질적 요소다.” (이언 머레이, 『로이드존스 평전2』부흥과개혁사, p.122)

 

삼위 하나님께서 미주 이민교회의 강단으로 부름 받은 동료 설교자인 여러분의 삶과 설교를 축복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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