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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PC 청교도 400주년 웨비나 ① 청교도의 설교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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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2ㆍ2020-11-12 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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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한인예수교장로회(KAPC, 총회장 조문휘 목사) 총회 교육부는 청교도 이민 400주년을 기념하며 “미국 청교도 개혁 신앙의 이민 목회 사역 적용”이라는 주제로 11월 9일(월)과 10일(화) 온라인으로 웨비나를 개최했다. 특히 웨비나를 시작한 9일은 400년 전에 청교도들이 미국에 도착한 날로 그 의미를 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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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교도 미국도착 400주년 기념우표
 

첫날 조영천 목사(아틀란타새교회)는 “뉴잉글랜드 청교도가 꿈꾸던 교회”라는 제목의  강의를 했으며, 둘째 날은 김형익 목사(광주 벧살롬교회)가 “청교도의 유산과 21세기의 목회적 적용: 설교를 중심으로”라는 제목의 강의를 했다.

 

조영천 목사는 미국에 처음 도착한 청교도들뿐만 아니라 2차로 도착한 청교도들, 그리고 청교도 운동에 대해서도 소개하며 청교도에 대한 시각을 넓게 만들었으며, 청교도들이 뉴잉글랜드에 세운 교회의 멤버십 강화와 회원가입에 대해 소개하며 큰 도전을 주었다.

 

조영천 목사의 강의가 성도들이 들어도 도움이 되는 내용이었다면, 둘째 날 진행된 김형익 목사의 강의는 청교도들의 설교를 통해 오늘날의 강단에도 도전을 주는 목회자들을 위한 강의였다.   

 

웨비나를 통해 총회장 조문휘 목사는 “팬데믹 시대에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 속에 영육을 지켜주시고, 거침돌이 디딤돌이 되어 전화위복과 심기일전되는 기회로 삼으시고, 청교도 미국도착 400주년의 뜻 깊은 올해에 더욱 일취월장하는 목회가 되기를 기도하며 기대한다”고 참가자들을 격려했다.

 

조영천 목사의 강의는 이후 소개하며, 먼저 김형익 목사의 강의를 소개한다. 김 목사는 총신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인도네시아 선교사로 섬겼고(1991-1995), GP선교회의 한국대표로 사역했다(1996-2003). 이민목회의 경험으로 미국 메릴랜드 주의 워싱턴 휄로쉽교회에서 수석 부목사로 섬긴 후(2003~2006), 2006년부터 죠이선교교회를 개척하여 2015년까지 섬겼다.

 

김형익 목사는 대학에 입학하여 마틴 로이드존스의 <산상설교>을 읽고 받은 충격을 나누었다. 전에는 들어보지 못한 새로운 종류의 설교는 이후 소위 청교도적 설교의 현대적 표본이라는 것을 알았고 “왜 우리는 이런 설교를 들을 수 없는가?”라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김형익 목사는 “청교도를 말하면서 설교를 언급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청교도로 불리는 그 시대의 목사들이 모두 뛰어난 설교자들이었다”라며 영국에서 16세기 중반에서 17세기 후반에 이르는 청교도들의 시대를 소위 “설교의 황금시대”라고 불렀다고 소개했다. 

 

김형익 목사는 “오늘날 우리의 시대는 슬프게도 설교의 쇠퇴기를 지나고 있으며 우리의 시대에 회심이 많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설교의 사역과 무관하다고 볼 수만은 없다. 우리 시대에 설교의 기준이 너무 낮은 것을 저는 크게 우려한다. 우리의 시대는 가볍고 천박하며 성경 주해도 없고, 신학도 교리도 없으며, 복음적 적용도 전무한 설교가 넘쳐나지만, 조금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시대”라며 청교도의 설교를 중심으로 강의를 나누어 나갔다. 2회에 걸쳐 김형익 목사의 강의 내용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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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교도의 유산과 21세기의 목회적 적용: 설교를 중심으로

김형익 (광주 벧샬롬교회)

 

1. 들어가는 말

 

대학에 입학하던 해 3월, 교회 선배들과 함께 읽기 시작한 책이 마틴 로이드존스의 『산상설교』였습니다. 그때의 충격을 잊을 수 없습니다. 저의 반응은 한 마디로, “이게 정녕 설교란 말인가?”였습니다. 거기에는 정밀한 성경 주해와 교리적 논증, 그리고 폐부를 찌르고 잠자는 영혼을 깨우기에 충분한 적용이 있었습니다. 특히 적용 부분에서 “당신이 그리스도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는 시금석이 여기 있습니다.” 라는 식의 도전은 두렵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설교는 전에는 들어보지 못한

새로운 류의 설교였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알게 된 것은, 이것이 소위 청교도적 설교의 현대적 표본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대학시절 내내 로이드존스의 설교를 애독했고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청교도들의 설교도 읽는 은혜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가진 질문은 이것이었습니다. “왜 우리는 이런 설교를 들을 수 없는가?”

 

오늘 저의 강의는 이 질문에서 출발한다고 보셔도 됩니다. 청교도가 미대륙에 상륙한지 400년을 기념하는 이번 웨비나에서 제가 다루려는 주제는 “청교도의 유산과 21세기의 목회적 적용”입니다. 하지만 특별히 부제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이 주제를 설교에 한정하여 다루려고 합니다. 제가 이 주제를 다루는 이유를 조금 더 설명하겠습니다.

 

청교도를 말하면서 설교를 언급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청교도로 불리는 그 시대의 목사들이 모두 뛰어난 설교자들이었고, 오늘날까지 사랑받는 그들의 저작들이 대부분 그들이 강단에서 전한 설교들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영국에서 16세기 중반에서 17세기 후반에 이르는 청교도들의 시대를 소위 설교의 황금시대라고 부르는 이유도 우리는 무시할 수 없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함께 한 우리 대부분이 설교자라는 점에서, 그리고 오늘날 우리의 시대는 슬프게도 설교의 쇠퇴기를 지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오늘 우리가 이 주제를 다루는 것은 더더욱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또 하나, 우리의 시대에 회심이 많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저는 이 주제가 긴박하고 적실한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인 말씀을 설교하는 것은 복음 사역에 속한 가장 위대하고 가장 탁월한 일 가운데 하나”라는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의 언명처럼, 오늘날 회심이 적게 일어나는 현상은 설교의 사역과 무관하다고 볼 수만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시대에 설교의 기준이 너무 낮은 것을 저는 크게 우려합니다. 우리의 시대는 가볍고 천박하며 성경 주해도 없고, 신학도 교리도 없으며, 복음적 적용도 전무한 설교가 넘쳐나지만, 조금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시대입니다. 청교도들의 시대에 영국 국교회 설교자들의 모습에도 미치지 못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 동시대의 유명한 설교자들이 우리 설교의 기준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서도 안 됩니다. 우리가 지금으로부터 4세기 이상을 거슬러 올라가는 수고를 감당하기만 한다면, 말씀의 황금 시대, 말씀의 부흥의 시대에 청교도들이 전했던 설교에서 우리는 거대한 보고(寶庫)를 만나게 될 것이고 거기서 우리가 배울 것은 넘쳐납니다. 18세기의 조지 휫필드나 19세기의 찰스 스펄전 그리고 20세기의 마틴 로이드존스의 설교는 어디서 온 것입니까? 그들의 기준은 언제나 그 이전 시대, 하나님의 사람들의 설교였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로이드존스가 주일 밤마다 휫필드의 전기와 설교를 즐겨 읽었다는 이언 머레이(Iain Murray)의 증언은 로이드존스의 설교의 기준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가치 있는 증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이런 배경에서, 청교도의 설교를 중심으로 그들에게 설교가 무엇이었는지, 그들의 설교의 특징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들이 우리에게 주는 유산이 무엇인지를 여러 동료 목회자들과 나누려고 합니다.

 

2. 청교도와 설교

 

먼저 청교도들에게 설교는 무엇이었는가 하는 주제를 생각할 텐데, 먼저는 설교의 중요성과 수위성에 대해서, 그리고 청교도들이 가졌던 설교의 정의와 목적, 의도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A. 설교의 중요성과 수위성

 

청교도들은 무엇보다 목사는 설교자라고 이해했습니다. 토머스 홀(Thomas Hall, 1610-1665)의 말이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그는 디모데후서 주석에서 “목사는 설교자여야 한다. 목사는 설교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설교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반드시 화가 있다(고전 9:16). 그러므로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만을 설교하든지 아니면 멸망하든지 해야 한다. 설교는 반드시 행해져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설교자들은 망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또 윌리엄 브래드쇼(William Bradshaw, 1571-1618)의 말입니다. “목회자의 최상 최고의 직무와 권위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그 말씀을 권면과 책망으로써 회중에게 적용함으로써 복음을 엄숙하게 그리고 공적으로 설교하는 것이다.”(MLJ, The Puritans, Banner of Truth, 1977, p.377).

 

그러나 청교도들이 이해하는 설교의 중요성 혹은 수위성은 단지 목사에 대한 이해에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로이드존스는 1977년 Puritan and Westminster Conference에서 행한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설교라는 주제는 예배나 기독교회의 행위에 대한 청교도의 모든 견해를 고려할 때 그 절정에 해당합니다…다른 종교와 달리 기독교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종교는 사람이 하나님을 찾는 것이지만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찾으시고 친히 자신을 사람에게 나타내시고 사람에게 나아 오시는 것입니다. 나는 이것이 설교를 통해서 말씀을 강해하는 것을 그 중심 위치에 둔 청교도 사상의 배경이라고 믿습니다.”(p.373). 

 

피터 루이스도 『청교도 목회와 설교』(청교도신앙사, 1991)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청교도들은 설교를 공예배의 절정이며, 성령의 권능에 의해 수반되는 말씀 선포와 그 말씀으로부터 오는 교훈을 구원과 성화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권능의 중요한 중재 수단이라고 보았다.”(p.101).

 

청교도들이 박해가 주어졌을 때 감옥에 갈지 언정 설교를 멈출 수 없었다는 사실은 그들이 설교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존 번연(John Bunyan, 1628-1688)이 설교 때문에 12년의 세월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이것은 그들 자신이 설교와 그 능력을 믿었다는 것 외에 달리는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설교는 그들이 가진 유일한 무기였습니다. 실제로 그 무기는 대적들을 두려워 떨게 할만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여러분은 스코틀랜드의 매리 여왕이 잉글랜드가 그녀를 사로잡기 위해 보낸 군대 보다 존 낙스의 설교를 더 무서워 했다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그들이 설교를 바르고 정확하고 능력 있게 전하는 일에 수고의 땀을 아끼지 않았던 것은 이런 설교의 능력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그들의 설교는 더할 나위 없이 진지했습니다. 그들이 설교를 할 때, 익살스러운 말, 재미있는 이야기, 웃기는 말, 지적인 말들은 피하였고 대신에 시급성, 긴박성, 직선적으로 설교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 앞에 있는 청중들은 삶과 죽음, 천국과 지옥 사이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가장 큰 소망은 죄인들을 그리스도께로 회심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청교도들의 설교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이 회심하였고 그 말씀으로 양육을 받았습니다. 청교도들은 단지 설교의 중요성, 수위성을 이론적으로만 말한 것이 아니라, 설교와 그 능력을 정말로 믿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존 번연이 그의 『천로역정』에서 설교자의 존재를 보여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크리스천이 해석자의 집에 도착했을 때 해석자는 크리스천에게 방마다 안내를 하면서 무언가를 보여주는데 그 첫 번째 방에서 보여준 그림이 바로 설교자-목회자의 초상화였습니다. 인용합니다.

 

“그가 어떤 비밀스러운 방에 이르러 하인에게 문을 열라고 말하자 문이 열린 순간 크리스천은 아주 점잖게 보이는 초상화가 벽 위에 걸려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사람의 두 눈은 하늘을 향해 올려다보고 있었고 아주 훌륭한 책을 손에 쥐고 있었으며 입술 위에는 진리의 법칙들이 쓰여져 있고 그의 등 뒤에는 온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그의 머리 위에는 황금 면류관이 씌워져 있었고 그는 마치 세상 사람들에게 무언가 간절히 탄원하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크리스천이 초상화의 의미를 묻자, 해석자가 설명합니다. “초상화의 주인공은 천에 하나 있을까 말까 한 귀한 분의 초상화인데 이분은 자녀를 낳을 수 있고(고전 4:15), 해산의 고통을 알고 있으며(갈4:19), 낳은 자녀를 스스로 기를 수 있는 분입니다. 당신이 지금 보시는 바와 같이 그의 눈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고 가장 좋은 책을 손에 들었으며 입술 위에는 진리의 법칙들이 쓰여져 있습니다. 이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그가 하는 일은 참된 진리를 알고 세상의 어두운 면을 밝혀내어 죄인들 앞에서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또한 보시는 바와 같이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탄원하는 듯한 표정으로 서 있고, 그의 배경에는 전 세계가 그려져 있으며 머리 위에 황금 면류관을 쓰고 있는데 이는 주님께 바치는 봉사를 사랑하기 때문에 세상에 속한 헛된 것들을 경시하고 무시해 버리고자 애쓰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내세로 가게 되었을 때 이런 노력에 대한 보상으로 틀림없이 영광의 면류관을 얻게 될 것임을 보여 주기 위한 것입니다.”

 

해석자가 크리스천에게 이 초상화를 보여준 목적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여정에 온갖 어려움, 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처럼 사칭하는 거짓 교사들을 만날 때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바로 이 말씀의 사역자를 통해서 가르쳐지는 사도적 복음의 진리를 붙잡는 것”임을 보여주려는 것이었습니다. 청교도들이 이해한 목사—설교자의 존재는 이렇게 중요하고 그 기준은 높은 것이었습니다.

 

B. 설교는 무엇인가?

 

이제 청교도들이 생각하는 설교의 정의와 의도, 목적 등에 대해서 잠깐 생각해보겠습니다. 그들이 설교를 어떻게 이해하고 정의했는가에 대한 그들 자신의 말을 들어보는 것이 어떤 설명 보다도 유익할 것입니다. 

 

청교도들의 설교와 설교 방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을 꼽으라면 윌리엄 퍼킨스(William Perkins, 1558-1602)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윌리엄 퍼킨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설교의 임무는 교회를 모으고 택자들의 수를 채우는 것이다…설교의 또 다른 기능은 주님의 양무리 중에서 이리를 쫓아내는 것이다. 설교는 사람들을 지식으로 세워주어, 각색의 영적 이리들이 이단과 오류와 거짓 가르침과 악행을 가지고 들어올 때 말씀으로 그들을 쫓아내게 해야 한다. 설교는 택자들의 수를 채우고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들을 보호한다.”

 

그는 설교의 긍정적 기능과 부정적 기능을 모두 말했습니다. 교회를 불러모으고 택자의 수를 채우는 것 그리고 교회에서 이리를 쫓아내는 것입니다. 설교가 이 두 가지 기능을 모두 수행한다고 볼 때, 하나님의 손에서 설교처럼 존귀한 도구는 없고, 교회에서 설교처럼 중요한 요소는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두 기능이 설교를 통해서 동시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모습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국의 거의 모든 예배당 입구에서는 “신천지 출입금지”라고 쓰여진 포스터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교회의 불안함을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설교가 온전하게 전해지고 있다면, 그 설교의 두 기능이 바르게 작동하고 있다면, 오늘날 한국교회가 이처럼 이단 사이비에 의해 혼란을 겪지는 않았을 것이고 이런 불안함과 두려움을 가질 이유도 없을 것입니다. “무지는 헌신의 어머니가 아니라 이단의 어머니이다.”라는 코튼 매더(Cotton Mather, 16631728)의 말은 온전한 설교가 얼마나 필요한지를 잘 보여줍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한국교회는 그동안 설교를 무시해온 대가를 톡톡히 지불하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됩니다.

 

청교도의 설교는 철저하게 그리스도 중심적이었고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윌리엄 퍼킨스는 “모든 설교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스도에 의하여 그리스도 그분을 설교하는 것”이라고 말했고, 리처드 십스(Richard Sibbes, 1577-1635)는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설교해서는 안 된다. 성도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모든 것을 들어야만 하고 목사는 그리스도에 대한 모든 것을 설교해야만 한다.”고 말했습니다. 피터 루이스는 청교도들이 이해한 설교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선포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신비한 비밀을 드러내는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밝히는 것입니다. 그윽한 그리스도의 향기가 모든 사람들에게 퍼지도록 상자를 깨뜨려 여는 것이 설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속성과 성품이 무엇인지를 드러내는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밝히는 것입니다.”(피터 루이스, p.94이하).

 

그들이 설교를 통해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목적은 오직 한 가지, 청중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이르고 그것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와 교회를 하나로 묶는 것이 청교도 설교자들이 생각하는 설교의 일관된 목표였습니다. 아프지 않은 사람이 진통제를 찾을 까닭이 없기에, 청교도 설교자들은 먼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도록 만들기 위해 율법을 선포해야 했습니다. 율법 안에서 청중들이 자신들의 저주받을 수 밖에 없는 처지를 보게 하였고, 인간의 모든 교만함을 꺾어 먼지 속에 내동댕이치게 만들어야 했습니다. 찰스 스펄전이 “설교자의 임무는 죄인들을 전적인 절망 속으로 내려뜨려서 그들이 자신들을 도우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신 하나님만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이다.”라고 했을 때(The Soul-winner: How to Lead Sinners to the Savior kindle loc. 145), 이것은 정확하게 청교도들의 설교의 목표를 설명해주는 말이었습니다. 이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율법 선포였고 그들은 이 율법 선포를 설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로 생각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청교도들에게 설교는 단순히 성경의 지식이나 정보를 제공해 주는 것에 머무를 수 없었습니다. 설교는 그 지식에 열기와 생명과 능력을 주어서 청중들이 그 말씀을 전인격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윌리엄 에임즈(William Ames, 1576-1633)의 말입니다. “설교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일으키기 위해, 그리스도를 아는 지성의 문을 열기 위해, 의지와 감정을 그리스도에게 이끌기 위해 구별된 하나님의 규례다.” 설교는 그야말로 참된 신앙 감정을 만들어내고 불러일으키며 소생시키는 하나님의 도구였던 것입니다. 토머스 카트라이트(Thomas Cartwright, 1535-1603)의 말은 이점을 잘 설명합니다. “불을 휘저으면 열기가 더해지듯이, 말씀도 설교를 통해서

바람을 불어넣으면 그냥 읽는 것보다 듣는 자들 속에서 더 많은 불꽃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런 청교도들의 설교관이 설교를 ‘붙붙는 논리(logic on fire)’라고 정의했던 로이드존스의 말에 그대로 반영이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청교도 설교자들이 자신들이 가진 설교에 대한 높은 기준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어떻게 설교를 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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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날 “뉴잉글랜드 청교도가 꿈꾸던 교회”라는 강의를 한 조영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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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교도 설교의 특징들

 

A. 청교도 설교의 삼요소

 

청교도 설교의 특징 가운데 가장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그들 설교의 삼요소입니다. 그들의 설교는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된 일정한 형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세 가지 요소는 본문(text), 교리(doctrine),

적용(application)입니다. 이것을 ‘성경적이며 교리적이고 체험적이자 실천적인 설교’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설교의 형식에 영향을 주었고 또 이것을 공식화한 것이 윌리엄 퍼킨스의 『설교의 기술』입니다. 이런 청교도 설교의 특징은 당시 국교도들의 설교와 확연한 차이를 만들어냈습니다. 국교도들은 설교의 내용(contents)보다는 전달(delivery)에 관심을 둠으로써 수사학에 집중했다면, 청교도들은 단순하게 설교했지만,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본문의 의미를 드러냄으로써 복음의 진수를 담아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청교도 설교의 삼요소는 그들이 인간의 지성과 양심과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자 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특징이기도 합니다.

 

로이드존스는 청교도 설교의 삼요소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청교도가 설교에서 가장 관심을 가진 것은 본문에 대한 정확한 주해였습니다… 본문의 정확한 의미를 찾아낸 다음에는 그 본문 속에서 교리를 찾아냅니다. 이것은 그들의 설교관에서 핵심적 요소였습니다. 그들은 교리로 시작해서 그 다음에 그것에 맞는 본문을 찾지 않았습니다…그리고 그 본문에서 이 교리를 찾아낸 것이 왜 정당한지 이유를 밝히고 같은 교리를 가르치는 성경 본문들을 참고하여 그 교리를 확증합니다. 그 다음에, 용도 또는 적용으로 나아갑니다. 그들은 강해에서 멈추지 않았고 언제나 적용이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 반론들을 제시하고 대답까지 제시했습니다. 청교도들은 이 특별한 방식을 주장했습니다.” (MLJ, The Puritans, p.382)

 

첫번째 요소를 먼저 살펴보자면, 그들의 설교는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본문에 뿌리를 내린 설교였습니다. 토머스 리아(Thomas Lea)가 말하는 청교도 설교자들이 가지고 있던 설교 준비의 원칙을 몇 가지만 소개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 성경본문에서 단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 본문 문맥의 중요성을 인정했다.

- 성경을 사용해서 성경을 해석하고, 그리하여 성경의 각 부분은 성경 전체와 조화시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신앙의 유비를 강조했다.

- 문맥이 다른 방향에서 의미를 지시하지 않는 한, 본문의 문자적 의미에 초점을 맞추었다.

- 신앙과 관련된 모든 문제 속에서 성경의 명료성을 주장했다.

- 정확한 해석을 위해 성령의 조명에 의존했다.

 

청교도들은 이렇게 철저하게 자신들의 설교가 성경 본문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교리를 강조했던 그들이었을지라도, 교리를 증명하기 위해서 성경 본문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그 본문으로부터 도출되는 교리를 본문에 입각해서 다루려고 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이토록 그들 자신이 성경 본문에 매였고 본문의 의미를 드러내는 설교를 하려고 했기에, 그들은 실로 탁월한 성경 주석가들이었고, 그 한 열매가 매튜 헨리(Matthew Henry, 1662-1714)의 성경 주석입니다. 이렇게 청교도 설교자들이 성경 본문을 강해하는 설교자들이었음을 조경진 목사는 이렇게 말합니다([개혁신앙] http://www.thetruthlighthouse.org/개혁주의-설교의-특징/). “문체에 있어서 애매모호하지 않고 명백한 것이 청교도 설교의 진수였다. 강조점에 있어서 교리와 실제가 놀랍게도 균형을 이루었으며, 설교 특성을 보면 그들이 사랑한 성경말씀을 문자적으로나 영적으로 강해하는 일에 충성스럽게 헌신하였다. 그들은 성경 이외의 어떤 것으로 설교한 적이 없다. 그들은 하나같이 충성스런 강해 설교자들이었다.”

 

청교도 설교의 두 번째 요소는 교리 논증이었습니다. 본문 주해에 이어서 그 본문이 가르치는 교리를 도출해낸 다음, 그 교리를 확증하는 일이 이어졌습니다. 이점에서 청교도 설교에는 모호함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성경 교리에 대한 명료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도 해석이 가능하고 저렇게도 해석이 가능할 만큼 모호한 표현들이 넘쳐나는 오늘날의 설교와 특별히 차별점을 가지는 지점입니다.

 

청교도 설교자들의 교리 논증이 주로 부정의 방식과 긍정의 방식을 통해서 전개되었다는 점도 그들의 설교의 명료함을 더해주는 요소였습니다. 부정의 방식은, “이 본문이 가르치는 교리는 이런 의미가 아닙니다”를 먼저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그 본문에서 도출한 성경의 교리에 대한 오해의 여지를 없앨 수 있었고 또 모든 반론을 논박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긍정의 방식을 사용하여, “이 교리는 이런 의미입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로이드존스는 청교도 설교의 이점을 이렇게 진술합니다. “청교도들의 설교관은 신학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한 사람의 설교관은 궁극적으로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그가 가진 신학적 관점의 표현이며, 실로 궁극적으로 복음에 대한 그의 관점을 드러냅니다.”(The Puritan, p.374)

 

청교도 설교가 신학적이고 교리적이었다는 점은 오늘날 많은 이들이 오해하는 것처럼, 그들의 설교가 딱딱하거나 건조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교리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문제와 직결되는데, 윌리엄 에임즈가 “신학은 하나님을 향해 살아가는 삶의 교리다”라고 말한 것은 청교도들의 신학과 교리에 대한 이해가 어떠했는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진술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교리가 하는 일을 분명하게 이해했던 것 같습니다. 리처드 백스터의 말입니다. “건전한 교리는 건전한 판단과 건전한 마음, 건전한 삶과 건전한 양심을 만든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 교리는 올바른 것이 아니든지 바르게 이해되지 못한 것이다.” 19세기의 찰스 브리지스(Charles Bridges, 1794-1869)도 같은 말을 합니다. “기독교적인 체험은 교리적인 진리가 우리의 정서에 영향을 미친 결과로 나타난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과거 30-40년전과 비교할 때 교리 설교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어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교리에 대한 강조가 청교도들이 다루었던 방식과 현저히 다른 방식인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생명력 없고 딱딱하고 따분한 교리 강좌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리를 설교하는 목사들에게 주는 조엘 비키의 권면은 유용합니다. “어떤 설교자가 자신의 경건을 위해 윌리엄 에임스나 프란시스 튜레틴 같은 17세기의 개혁파 스콜라주의 신학자들이 쓴 논문을 주로 읽는다면 이때는 신앙의 체험적인 측면을 좀 더 강조할 필요가 있다. 설교 때에 어느 정도의 적용을 제시하지 않으면서 십 분 이상의 시간을 보내서는 안 된다.” (『설교에 관하여』p.530)

 

이런 말들은 청교도들이 성경의 본문에 근거하여 가르친 교리가 단순한 이론이나 지식 쪼가리에 그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주지만, 청교도 설교의 세번째 요소인 적용에서 이점은 온전하게 드러납니다.

 

제임스 패커는 “설교는 본질적으로 가르침에 적용이 추가된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청교도들은 세 번째 요소인 적용을 어떻게 이해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적용을 교리의 사용법(use)이라고 이해했습니다. 즉, 이 교리를 어떻게 삶에서 사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교리와 적용을 청교도들은 분리시키지 않았습니다. 조엘 비키가 조나단 에드워즈의 설교에 대해서 “그의 모든 교리는 적용이었으며 그의 모든 적용은 교리였다.” 라고 말한 것이 이점을 잘 보여줍니다.

 

적용은 결국 ‘So what?’에 대한 대답입니다. 19세기 영국의 목사인 찰스 브리지스(Charles Bridges, 1794-1869)가 “기독교의 생명은 교리를 해설하는 일 자체에 있지 않고 오히려 그 교리를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 적용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성화에 이르며 위로를 얻게 하는 데 있다”고 말한 것을 청교도 설교의 세번째 요소는 잘 보여줍니다.

 

가령, 존 제닝스(John Jennings, 1687-1723)는 설교자가 적용을 해야 하는 다양한 경우들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1. 조롱하는 자들을 책망하며 우리 말에 반대하는 자들을 논박하기—변증과 책망

2. 세속적이며 무지한 죄인들을 향해 회개하지 않으면 일어나게 될 일들에 대한 두려움을 일깨워주기.

3. 자신의 죄를 깨달은 죄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4. 자신의 의를 내세우는 도덕주의자들을 상대로 논증하면서, 그들의 죄인됨을 드러내주기.

5. 교만한 위선자들의 정체를 드러내주고 책망하기.

6. 미약한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하고 분발시키기.

7. 자신의 죄를 깨닫고 각성했다가 다시금 이전의 상태로 타락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책망하고 그들을 일깨우기.

8. 핍박과 환난 중에 처한 신자들을 격려하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일깨워주기.

9. 성숙한 확신을 지닌 그리스도인들에게 연약한 자들을 배려할 것을 가르치고 권면하기.

10. 자신의 죄악됨을 느끼면서 신음하는 자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11. 상한 심령으로 겸손히 통회하는 자들을 위로하고 하나님의 자비로운 약속을 일깨워주기.

12. 방향을 잃은 자들을 이끌어 기도하도록 권면하기.

13. 영적으로 버림받았다는 느낌 때문에 고통받는 자들을 돕고 괴로움 속에서도 계속 하나님을 신뢰하며 나아가도록 권면하기.

 

설교자는 늘 이런 상황에 처한 청중들이 있음을 의식하고 적용을 하라고 그는 말합니다. 이런 식의 적용은 이미 윌리엄 퍼킨스가 그의 『설교의 기술』에서 말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는 거기서 일곱 가지로 설교의 적용 대상을 분류했습니다.

 

1. 불신자, 성경에 무지하고 가르침을 받으려 하지 않는 사람—조리있는 말씀의 가르침으로 양심을 찌르는 책망이 필요하다.

2. 가르침을 받으려 하지만 무지한 사람—기독교의 근본 교리를 배워야 한다.

3. 성경지식은 있지만 겸손하지 않은 사람—죄에 대한 근심과 회개를 촉구하는 율법을 선포하고 그 다음에 복음을 설교해야 한다.

4. 이미 겸손해진 사람—성급히 위로하지 말고 겸손이 믿음에 뿌리를 둔 것인지 살피고 충분히 겸손한 자들에게는 믿음과 회개, 복음의 위로 교리를 선포하고 진정시켜야 한다.

5. 이미 믿고 있는 사람—율법의 저주 보다 행위 규범으로서 율법과 함께 칭의, 성화, 견인과 같은 핵심 교리를 배워야 한다.

6. 믿음에서 실족한 사람—복음으로 회복시켜주는 일이 필요하다.

7. 신자와 불신자가 함께 있는 교회 전체

 

청교도 설교자들은 이 적용의 요소를 정말 중요하게 여겼고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적용을 중요하게 여긴 것은, 그들이 믿는 바를 삶에 적용하여 그것이 경험적으로 맞는 것인지 아닌지를 실험해 보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청교도 신학을 ‘경험적 신학(experiential theology)’ 또는 ‘실험적 신학(experimental theology) 라고 말하고, 그들의 설교를 동일한 방식으로 ‘경험적 설교(experiential preaching)’ 또는 ‘실험적 설교(experimental preaching)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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