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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힌 담을 헐라! (리버사이드 교회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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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일2006-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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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힌 담을 헐라!
뉴욕 리버사이드교회(the Riverside Church) 스케치(하영호 목사)

한국교회에 리버사이드교회가 잘 소개되어 있지 않은 것이 놀랍다. TV 전도자 로버트 슐러, 크리스탈교회, 새들백교회 등은 의외로(?) 상세히 소개되어 있다. 이런 현상이 내게는기이하게 받아들여진다. 내가 리버사이드교회를 소개할 위치에 있지도 않고 능력도 없으나, 진솔하게 느낌을 전하려고 한다. 더 많은 정보는 홈페이지(www.theriversidechurchny.org)를 참조하면 좋을 것이다.

나는 뉴욕을 서너 차례 방문할 기회가 있었고, 그때마다 뉴욕의 다양한 색깔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대할 때마다 바뀌는 느낌. 하지만 굳이 하나의 색을 말하라면 나는 주저 없이 <짙은 회색>이라고 말할 것이다. 빛의 삼원색(빨강, 파랑, 초록)을 섞으면 흰색이 된다고 한다. 하지만 색의 삼원색(빨강, 파랑, 노랑)을 혼합하면 검은 색이 된다고 한다. 내 눈에 보이는 뉴욕은 감색혼합(減色混合)을 통한 짙은 회색의 도시이다. 가색혼합(加色混合)을 통한 환한 백색을 띄지 못한 아픔의 흔적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산업화 200년의 역사가 섞이고, 어렵지 않게 미추(美醜)의 궤적을 훑어볼 수 있다.

뉴욕, 더 정확히 만하탄은 현대문명의 꽃이라 할 수 있는 국제금융의 핵이다. 그래서 소위 말하는 ‘9/11 테러’의 상흔을 남겼다. 점잖게 말해서 경제, ‘돈’은 자본주의의 핵심 언어다. 만하탄의 월가(the Wall Street)에는 악명 높은(?) 황소상이 길거리 한 복판을 차지하고 있다. 힘과 돈의 결합체인 현대문명의 우상(偶像)이다. 최첨단 산업은 전자정보기술(IT)도 생명공학기술(BT)도 아닌 금융이다. 20세기 산업화의 황태자였던 일본이 타의 추종을 허락하지 않는 앞선 기술력을 지녔음에도 뒤뚱거린 것은 낙후된 금융시장 때문이었다. 우리가 IMF 위기를 겪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돈 되는 기술, 산업>이 가장 밑바닥에 깔린 기조다. <돈 안 되는 기술, 산업>은 비웃음꺼리에 지나지 않는다.

만하탄의 다운타운에 월가(街)가 있다면, 미드타운에는 센트럴파크가 있고, 리버사이드교회가 있다. 센트럴파크가 육체의 쉼터요, 활력소를 일깨우는 초록 공간이라면, 리버사이드교회는 미국의 정신적 기둥이다. 단순히 기독교의 상징만은 아니다.

이 교회의 설립정신은 세 단어에 간명하게 나타나 있다. 교파의 교류(interdenominational), 인종의 교류(interracial), 국가의 교류(international)다. 그냥 지나치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있다. 상호(相互, inter)라는 접두어다. 교파주의의 극복이나, 인종차별의 철폐 등으로 새겨서는 안 된다. 예를 들면, 반인종주의(anti-racism)가 아니라 인종의 교류를 지향한다는 점이다. 이는 <복음주의가 아닌 복음>의 정신이다. 정반합(正反合)도 아니고, 갈등하고 대립되어 있는 상대방을 받아들이고, 끌어안고 승화된 내일을 열자는 정신(信仰)의 결정체다.

역사를 살펴보기 전에 지역적 특성을 볼 필요가 있다. 만하탄의 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다. 소위 말하는 다운타운은 빌딩 숲으로 우거진 부유함의 상징이기도 하다. 이 교회가 자리 잡은 곳으로부터 북쪽은 다운타운과 대비되는 흑인 빈민 거주지역인 할렘이 시작된다. 아프리카계, 스페인계(말이 스페인계지 남미 출신) 빈민지역이다. 리버사이드교회는 장로교 대학이라 할 수 있는 컬럼비아대학, 유니온신학교, 유대교신학교, 미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와 더불어 서있다. 이 지역은 미국 기독교의 상징적 신학자이자, 미국의 상징적 지성인인 라인홀드 니버를 기념하는 거리로 명명되어있기도 하다.

눈으로 보이는 시각적 상징들을 보자. 강변 쪽에서 보면 지금은 잘 사용되지 않는 서문(西門)이 있는데, 의미를 지닌 부조(浮彫)가 문을 감싸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같이 하나님의 말씀의 두루마리를 가슴에 안고 있는 장면이다. 얼핏 카톨릭교회 같은 웅장한 고딕양식의 건축물이나, 그 입구에 새겨진 조형물은 <말씀 중심의 교회>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이 역시 오래된 교회의 전통 모두를 끌어안겠다는 이미지일 것이다.
반대편 동문(東門)이 주출입구인데 놀랍게도 핵(核)물질 표시가 있다. 핵물질 대피소 표시다. 내 눈에는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현대문명의 아픔을 보여준다. 종교집회시설이기에 굳이 대피소가 될 필요는 없을 것이나. 교회가 이 세상의 피난처라는 신학적 상징을 담고 있는 듯이 보였다. 종교적 상징들로 채워져야 할 입구에 낯선 표시를 부착한 소중한 뜻이 마음에 남는다.
교회의 내부에는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목사를 기리는 사진이 걸려 있고 (1959년 12월에 마틴 루터 킹 기념관이 본관 남쪽에 이어져 봉헌되었었다.), 할렘을 그려놓은 그림, 잘 알려져 있는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 그림 등이 눈에 띈다. 이 역시 진보와 보수, 과거와 현재, 고전과 모더니즘이 공존하며 숨쉬는 상징일 것이다. 지역과 교회의 안팎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이 교회의 상징성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예배에 대한 느낌을 전하기 전에 역사를 거칠게 훑어볼 필요가 있겠다. 교회의 뿌리는 184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노포크스트리트 침례교회가 모체였다. 1848년에는 영국 감리교 출신으로 침례교로 전향한 토마스 아미티지 목사가 부임하였고, 1860년에는 미드타운에 5번가 침례교회의 이름으로 모이게 되었다. 1889년에는 진보적 성향을 지닌 윌리암 화운스목사(담임목사 사임 후 브라운대학 총장이 되었다.)가 부임하였고, 이를 계기로 새로운 뉴요커들이 모이게 되었다. 1901년에 부임한 루푸스 존스턴 목사는 침례교회 목회자였으나, 침례가 더 이상 회중들의 핵심적인 요소가 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1907년에 부임한 찰스 에이크드 목사는 서로 다른 교파적 배경을 극복하려고 애썼다. 이 흐름은 후임목사들에게도 이어져 간다.
1925년에 부임한 해리 포스딕 목사시기에 이르러 교회에는 중요한 토론이 전개되었다. 열린 신앙과 근본주의의 문제였다. 이 과정을 거치며 현대적이고 초교파적 성향이 강화되었고, 1차 세계대전으로 미루어졌던 새 교회건물 건축도 방향을 잡아간다. 1927년에 지금의 리버사이드 지역에 신축공사가 시작되었다. 1929년에 교회사무실을 열었고, 여름에는 예배를 드리지 않고 여름방학을 갖는다. 가을부터 놀랍게도 유대교 회당(Temple Beth El)에서 예배를 드리게 된다. 1930년에 드디어 완공된 교회에서 첫 예배를 드린다. 성전건축에는 미국의 거부 록펠러 2세의 절대적 공헌이 있었다.
2차대전이 끝나고 로버트 맥크라켄이 설교목사로 부임하였고, 그는 강력한 사회적 메시지, 반전 메시지를 선포하였다. 1959년에는 앞서 언급한 마틴 루터 킹 기념관이 봉헌되었다. 1960년에는 파블로 코토목사가 히스패닉 사역자로 부임하였다. 1989년에는 지금의 제임스 포브스 목사가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리버사이드교회는 침례교를 모태로 출범하였으나, 어느 교단에도 가입하지 않고, 우리에게는 다소 낯선 그리스도교회(United Church of Christ) 전통을 존중한다고 밝히고 있다. 가난한 자와 소외계층의 아픔을 나누는 정신을 지니면서도, 록펠러 2세의 헌금으로 교회를 건축하는 등 진보와 보수,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 인종과 소수 민족의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끌어안기 위해 애쓰고 있다.

이 정신은 한국교회, 특히 한국기독교장로회에 많은 것을 시사해주고 있다. 최근 들어 한국사회는 극심한 국론 분열로 인해 혼란을 겪는 듯이 보인다. 일제강점기, 해방과 남북분단, 이어진 한국전쟁은 우리에게 씻을 수 없는 고난의 상처를 남겼다. 한편으로는 절대 빈곤에서 벗어나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소홀히 간주되었던 민주주의의 실현이라는 과제가 충돌하였다. 4.19, 5.16, 10.26, 12.12, 5.18 ... 지금은 이 과정을 숨 가쁘게 달려온 한국사회가 숨 고루기를 하고 있다. 이제 모든 분야, 부문에서 자신의 목소리만을 크게 외치고 있다. 모든 집단이 자신의 눈(時角)으로만 상대방을 바라보고 있다. 지난 1세기 동안 마음 놓고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까닭에 상대방을 받아들일 정신적인 여유, 관용이 사라진 것이다.

교회는 이 갈등과 긴장의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다. 막힌 담을 허물고 하나가 되도록 하는 큰 소명을 지니고 있다. 리버사이드교회는 이 흐름, 신앙고백 위에 서서 예배를 드린다. 어느 한 편을 정죄하고, 다른 한편에 서지 않는다. 상호관용(inter)의 자리에 선다. 미국은 우리보다도 더 이질적인 요소가 많은 다민족국가다. 흑백 갈등은 해결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부끄러운 일이나 뉴욕을 떠받들고 있는 하부조직을 이룬다. 그들을 보듬어 안으며, 백인들과 더불어 신앙공동체를 형성해간다. 지금의 담임목사는 검은 피부를 지녔다. 여성 목사, 백인 목사가 함께 도우며 교역에 전념한다. 하나가 될 수 없는 듯이 보이는 이질적 문화적 배경을 지닌 이들이 모여 예배를 드린다.
그래서 예배는 역설적으로 더 장엄하고, 경건하고, 축제적이다. 마치 카톨릭 미사를 연상시키는 의식의 상징성, 절제된 언어. 모든 이들을 위한 폭넓은 기도, 아름다운 찬양, 그리고 다이나믹한 설교, 이 메시지는 철저하게 성서적이다. 어느 교회보다도 더 정통적인(orthodox) 분위기를 지닌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선포를 받아들인 회중들이 세상으로 나간다. 목사는 강단에서 내려와 회중석을 지나 출입구에서 축도한다. 세상에 파송하는 상징을 지닌 것이다. 모이는 교회, 고백하는 교회, 말씀을 듣는 교회, 봉헌하는 교회, 세상에 나가는 교회의 상징성이 잘 조화돼 있다.

굳이 말하자면, 예배는 보수적인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진보적인 분위기의 프로그램은 주중 활동으로 전개된다. 일례로 한 한국인 선교사가 인디언으로 불리는 미국 원주민(native American)들을 위해 원주민 언어 웅변대회를 개최하려고 하는데 재정지원을 요청했더니, 서류심사만으로 5,000불을 선뜻 지원해주었고, 앞으로도 추가 지원하겠다는 의사를 밝혀 와서 놀랐다는 것이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 아무런 연고도 없는 교회가 편지 한 통으로 재정지원을 하는 일은 쉬운 일은 아님이 분명하다.
예배에 참석하는 이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 수 없다. 가난한 이들도 정성껏 차려입고 가족의 손을 잡고 나오기에 겉모습으로 그들의 삶을 가늠할 수는 없다. 하지만 주중에 교회에 나와 다양한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이들의 모습을 엿보면, 중산층과 가난한 이들이 뒤섞여 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2,400명이라는 결코 작지 않는 교회. 신앙과 지성의 균형감각을 잘 유지하고 있는 교회. 진보와 보수를 아우르는 교회. 잠자는 신앙심을 일깨우는 예배. 우리에게도 이런 교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http://www.mago37.co.kr/(마산 고등학교 37회)의 2402(송세진)에서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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