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상하 목사 "영적 생명의 존재 방식" > 오피니언

본문 바로가기


페이스 상패 제이미 제이미혜택



이곳은 2017년 이후에 올려진 글입니다. 이전에 올려진 오피니언 글은 지난 오피니언 게시판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오피니언

황상하 목사 "영적 생명의 존재 방식"

페이지 정보

황상하2023-11-04

본문

황상하케플러와 뉴턴은 비교적 단순한 수학 법칙이 자연 전체에 두루 영향을 미치고, 지상에서 적용되는 법칙이 천상에서도 똑같이 적용되며, 인간의 사고방식과 세계가 돌아가는 방식이 서로 거스럼이 없이 명백하다고 하였습니다.

케플러의 <코스모스>는 신성한 기하학에 대한 사람들의 신앙을 뒤흔들어 놓았고 그 자신의 영혼에게도 충격적이었다고 전해집니다. 이를테면 그는 인류사에서 최초로 신비주의를 배제하고 천제의 운동을 설명한 것입니다.

다윈은 물체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것과 달이 지구 둘레를 도는 것이 같은 원리에 따라 일어나는 현상임을 최초로 알아낸 사람입니다.

칼 세이건과 다윈은 과학으로 무한한 우주의 활동을 설명하려고 하였다면 리처드 도킨스는 그 우주를 가장 작은 단위로 쪼개어 유전자를 통해 철학적 존재론의 문제를 과학으로 설명하려 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사람은 왜 존재하는가'에 대한 물음을 철학이나 신학을 배제하고 순전히 과학적으로 설명하려고 한 것입니다. 다윈의 진화론을 토대로 하는 그의 주장과 이론의 한계는 곧 진화론 자체의 한계이기도 합니다. 진화론은 아직까지 이론이 아닌 가설인데, 그 이유는 너무나 긴 시간이 요구되는 실증이 불가능 하기 때문 입니다. 이론이 아닌 가설을 거의 정설로 받아들이는 현대과학은 비과학적 토대에서 과학적 탑을 쌓는 형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킨스는 모든 동물을 유전자가 만들어 낸 기계로 설명합니다. ‘존재’는 결국 ‘생존’이며, 성공한 유전자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는 모든 유전자를 ‘이기적이다’라고 전제하고 의인화시키며 이기적인 유전자가 우리에게 어떤 행동을 지시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곧 ‘천성’과 ‘교육’에 대한 문제로 반발에 직면하게 됩니다. 고등생물인 인간은 교육을 통해서, 사회적인 합의를 통해서 얼마든지 집단을 위해 이기심을 버리고 이타적으로 변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주로 집단선택설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이러한 반박을 하는데, 이에 대해 도킨스는 그런 이타적인 집단이 있더라도 결국 집단 내에서 눈곱만치도 희생하고자 하지 않으려는 ‘반역자’가 있기 마련이기 때문에 그런 반역자가 결국 다른 개체들보다 더 잘 살아남고 자손 번식도 많이 하며, 이타적 집단이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는 더 이상 이타적일 수 없게 될 거라고 반박합니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유전자의 존재에 대한 그의 설명과 그 유전자가 이기적이라는 것도 그가 그렇게도 소중하게 여기는 과학으로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기적 유전자에 대한 그의 설명에 의하면 최초의 자연선택은 단순히 안정한 것을 선택하고 불안정한 것을 배제하는 것으로 이 ‘안정적’인 단위가 바로 가장 작은 단위의 유전자인 ‘자기복제자’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자연선택과 유전자를 정의하는 방식은 다양합니다. 그는 학자로서 자신의 이론을 펼쳐야 하는 의무감 같은 것에 너무 집착하여 무리하게 자연선택과 유전자의 정의를 내린 것이라는 느낌이 들게합니다. 우리를 가장 불편하게 하는 그의 표현은 ‘우리는 유전자의 생존기계’라는 것입니다. 그는 유전자가 언제 생겨났는지 왜 생겨났는지 확실하게 알지 못하면서 '우연'을 빙자하여‘불확실성’을 인간이 얼마나 다양하게 다루고 있는지에 대해서 간과하고 있습니다. 유전자를 중심으로 생각한다면 개체는 유전자를 담고 있는 그릇이나 유전자를 보존시키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지만, 이런 식의 과학은 초과학적 ‘생명’을 과학으로 규명할 수 있다는 오만입니다. 그의 이론이 유전공학의 발전과 의학에 기여한 바가 있겠지만 가장 심각한 실수는 하나님께서 창조한 생명을 과학으로 경시한 것입니다. 또한, 유전자가 생존 기계 즉 인간 행동을 제어한다는 설명으로 치명적이게도 인간의 고귀한 윤리 도덕적 의무를 해제해 버려서 엄청난 사회적 혼란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모든 생명체는 살려고 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모든 생명체가 살려고 하는 본능을 어떻게 갖게 되었는지는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과학을 믿는 진화론에서도 생명체의 살려고 하는 본능에 대해서는 전제하는 것이지 규명하지는 못하였습니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을 비롯하여 모든 동물과 식물은 살려고 하는 본능이 있으므로 생존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과학적 설명입니다. 하지만 모든 생명체가 살려고 하는 본능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생명에게 주신 기능으로 그것을 생명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어떤 생명체에게 이런 기능이 없다면 오래 생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식물의 잎이 햇빛을 따라 방향을 잡는 것도 생명체의 본능적 기능 때문이고 식물의 뿌리가 수분과 영양분이 있는 곳으로 뻗어가는 것도 살려고 하는 본능 즉 그 기능 때문입니다. 아프리카의 야생 동물들도 비가 내리지 않는 건기가 계속되면 물이 있는 곳을 찾아 대이동을 합니다.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본능에 의해 그렇게 합니다. 그래서 가뭄이 지속하여 열악한 환경에서도 생존할 수 있습니다. 생존하려는 본능적 활동에서 게으름을 피우는 생명체는 없습니다. 생명체의 모든 활동은 생존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생존 본능이 바로 생존의 방식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살려고 하는 모든 노력이 생존의 방식입니다. 기분이 좋은 것도, 기분이 나쁜 것도, 화를 내는 것도, 노래를 부르는 것도, 고통을 피하려고 하는 것도, 쾌락을 추구하는 것도 모두 생존의 방식입니다. 이런 생존의 본능을 부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도 생존 본능에 의한 생존의 방식을 취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 생존의 본능을 거스르면 죽습니다. 배가 고픈데도 음식을 안 먹는다거나 목이 말라도 물을 안 마시면 죽습니다. 고통을 느끼는데도 그 원인을 제거하고 치료하지 않으면 죽습니다. 배가 고파도 밥을 먹기 싫어하는 병이나, 몸이 병들었거나 다쳤는데도 고통을 못 느끼는 병은 대단히 위험합니다.

그런데 영적 생명은 생존 본능을 따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본능을 거슬러 행동해야 사는 것이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모든 생명체는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데 영적 생명은 죽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우리의 영적 삶이 어려운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본능을 따라 사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따로 배울 필요도 없습니다. 좀 세련되고 품위 있게 행동하기 위해서는 교육도 필요하지만, 생존 자체를 위해서는 그런 것이 그렇게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본능을 거슬러 행동하려고 하면 본능을 대체할 무엇인가가 있어야 합니다. 본능은 그 자체가 행동을 일으키는 에너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욕망입니다. 먹고 싶고 하고, 하고 싶어 하고, 갖고 싶은 욕망이 행동의 에너지로 작용합니다. 그러나 영적 생명은 그 본능을 거부하고 다르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본능을 거슬러 다르게 행동하는 것은 본능처럼 자체 에너지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본능을 거슬러 하는 행동은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본능은 본능의 욕구를 따라 하면 되지만 그 본능을 거부하고 나면 그다음은 의지적으로 결정을 하고 의지적으로 행동을 해야 합니다. 성경이 영적 삶에 있어서 감정보다는 의지적으로 행동할 것을 가르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의 의지가 본능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선택하고 행동해야 영적 생존이 가능합니다.

오늘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지나치게 감정적인 것을 강조하는 것은 본능의 욕망에 따르기 때문입니다. 본능은 대개 의지가 아니라 감정에 호소합니다. 감정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 감정이 의지에 의해 통제되고 조종될 때 비로소 인간이 짐승과는 다른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만물의 영장의 지위에 합당한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육체적 죽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 명백합니다. 육체의 죽음은 날마다 죽을 수 없습니다. 날마다 죽는다고 한 것은 인간의 생존 본능을 거슬러 행동하는 영적 생명의 생존 방식을 의미합니다. 물론 영적 생명이 무조건 인간의 생존 본능을 거슬러 행동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를테면 배고플 때 밥을 먹고 싶은 욕망을 무조건 거부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어떤 욕구가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날 때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욕구들은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는 것이 너무 많아 바울은 거의 매일 죽어야만 했습니다. 인간 욕망에 따른 일상의 삶에서 날마다 죽는 것은 영적으로 날마다 사는 영적 생명의 존재 방식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 아멘넷 뉴스(USAamen.net)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오피니언 목록

게시물 검색



아멘넷의 시각게시물관리광고안내후원안내ㆍ Copyright © USAamen.net All rights reserved.
상단으로

아멘넷(USAamen.net) - Since 2003 - 미주 한인이민교회를 미래를 위한
Flushing, New York, USA
카톡 아이디 : usaamen / USAamen@gmail.com / (917) 684-0562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