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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악으로 보는 왜곡된 관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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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23-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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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예수님을 믿는 이들을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설명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의 개념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상식적으로 “나라”라고 하면 국민과 영토를 먼저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에서 영토 개념은 매우 신비롭습니다. 하나님 나라 영토, 즉 영역의 개념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 나라가 어디냐고 물으면 아무도 대답을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 나라는 영역의 개념으로 이해할 수 없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눅 17:20, 21에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 나라는 볼 수 없기 때문에 특정 장소에 있다고 말할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중에 하나님 나라를 죽어서 가는 어떤 장소로 생각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어떤 이들은 천국의 구체적인 모습을 보았다고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하나님 나라는 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볼 수 없다고 하신 하나님 나라를 보았다고 하는 것은 잘 못 보았거나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볼 수 없기 때문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할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회개하라, 하늘나라(ἡ βασιλεία τῶν οὐρανῶν)가 가까이 왔다.”(마 4:17)라고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천국으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세례 요한도 예수님과 같은 메시지를 마 3:2절에서 선포하였습니다. 여기서 하나님 나라를 물리적이거나 공간적 개념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오해가 생깁니다. 천국은 물리적으로 규정할 수 있는 물건이나 어떤 장소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다스림이고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겨자씨 비유에서 씨와 싹과 잎과 줄기 그리고 꽃과 열매와 무성한 나무가 등장하지만, 그 중 어느 것도 하나님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싹이 나고 잎과 줄기가 자라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하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이러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씀을 물리적 또는 공간적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오해가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고 통치인 하나님 나라는 누구에게나 똑같은 깊이와 넓이와 느낌으로 인식되고 경험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아주 가까이 다가간 사람이 있고, 아주 먼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 사람이 같은 책을 읽어도 이해의 깊이와 폭은 사람마다 다른 것과 같습니다. 어떤 정보를 들어도 사람마다 이해하는 깊이와 폭과 지평이 다릅니다. 다 같은 역사나 철학을 공부해도 사람에 따라 이해의 깊이와 넓이가 다르고 따라서 적용하는 차원도 다릅니다. 세상의 학문과 정보도 그렇지만 하나님 나라는 특별히 그 인식의 폭이 대단히 넓습니다. 사랑도 그렇고 생명도 모든 사람이 똑같이 경험하는 것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한 번은 포도원 비유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셨습니다. 마 20:1절에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라고 합니다. 주인은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이른 아침에서부터 일이 끝나기 한 시간 전인 오후 5시까지 여러 차례 포도원에 들여보내 일을 하게 하였습니다. 하루 일이 끝나자 주인은 회계 담당자에게 품삯을 나눠주라고 하였습니다. 이른 아침에 고용된 일꾼은 한 데나리온을 받기로 주인과 약속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맨 나중에 온 일꾼에게 먼저 한 데나리온을 주자 이른 아침부터 일한 사람은 한 데나리온을 받기로 약속을 하였지만 주인이 일당을 올려 줄 거라고 기대하였습니다. 하지만 모든 일꾼에게 한 데나리온씩을 주었습니다. 그러자 아침 일찍부터 일한 일꾼은 그것이 불공평하다고 불평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불평은 단순한 불평이 아니라 주인이 불편부당하고 악하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자 주인이 문제의 핵심을 찌르는 말을 합니다. 내 돈을 내 마음대로 주는데 뭐가 문제냐, 내가 선한 일을 하였기 때문에 너희가 나를 악하게 보는 것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한 시간 일한 일꾼에게 종일 일한 일꾼만큼의 삯을 준 것이 아니라 그의 형편을 고려하여 준 것입니다. 그것은 그 일꾼에 대한 주인의 선행이고 자비이며 사랑입니다. 그런데 불평하는 자들은 주인의 선행을 악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성경의 이 지적이 너무 의미심장합니다.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이 설명은 만약 나중 온 일꾼에게 일찍부터 일한 자의 품삯의 5분의 1 정도 주었다면 주인을 악평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나중 온 자에게 파격적 선을 베풀어 일찍 온 자와 같이 주었기 때문에 악하다고 했다는 지적입니다. 주인이 그에게 약속대로 정당하게 하였지만, 이를테면 나보다 못한 사람을 나처럼 대우하였다고 하여 그것을 악하다고 하는 것은 왜곡된 평가라고 지적한 것입니다. 심리적으로 자신을 섭섭하게 느끼게 하는 것을 악하다고 평가하는 것이 인간의 왜곡된 보편적 평가라는 지적입니다. 나에게 잘하는 사람이나 특혜를 주는 사람은 선한 사람이고 나를 섭섭하게 하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고 악한 사람이라는 평가는 타락한 인간의 왜곡된 보편적 현상입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말은 성경적 인간관의 정곡을 찌르는 속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는 자기에게 잘해주는 사람은 좋은 사람으로 자기에게 잘해주지 않는 사람은 나쁜 사람으로 분류합니다. 사실은 어린아이뿐만이 아니라 어른들도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구별하는 기준이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다만 어른들은 공평이나 정의나 합법이나 온갖 논리와 이론과 경험을 빙자하여 어린아이 같은 수준의 나이브한 이기심을 숨기기 때문에 그럴듯하게 보일 뿐입니다. 이른 아침부터 와서 종일 일한 사람들은 상식적으로 자기와 동등한 대우를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 자기와 같은 대우를 받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불공평이라고 하였습니다.

공평의 문제는 오늘날에도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공평은 인간 사회에 참으로 필요한 가치입니다. 하지만 공평은 상대적 가치이지 절대적 가치는 아닙니다. 공평은 같은 조건에서 요구할 수 있는 것인데, 모든 사람은 능력과 경험과 기술이 다 다릅니다. 공평이 귀한 가치이지만 조건과 능력을 무시하고 모두에게 같게 대우하는 것을 공평이라고 하면 안 됩니다. 백번 양보해서 능력은 달라도 대우는 같아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사회주의는 그 이상을 꿈꾸는 정치 형태입니다. 그렇다면 부지런한 사람과 게으른 사람은 어떻게 대우해야 할까요? 아주 게으른 사람과 아주 부지런한 사람에게 같은 일당을 주어야 할까요? 바로 이 문제로 인해서 미국이 정치와 경제와 교육과 외교와 문화가 엉망진창이 되고 있습니다. 돈과 권력과 심지어 지식까지도 나누어 가져야 공평하므로 일류학교를 없애고 영재반도 없애고 경쟁도 못 하게 합니다. 교사나 학생이나 다 같은 사람이고 부모와 자식이 다 같은 인격체이기 때문에 일체의 차별을 두면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심지어 무엇이 옳다거나 무엇을 틀렸다고 말하지 못하게 합니다. 각자의 판단과 생각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요즘 학교에서는 아이들에게 단어도 외우지 못하게 하고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라고 묻습니다. 각자의 생각을 존중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공평의 가치입니다. 이러한 정부 정책과 교육 방법과 정치 시스템에 대해서 듣고 보아도 사람들은 그런 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예상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국민의 뜻이나 다수의 뜻을 우상화합니다. 하지만, 다수는 진리를 따르기보다 거짓에 충동 되기 쉽습니다. 공평의 가치를 강조하는 사상에 설득되어 대중은 부모 자식, 학생과 교사, 남자와 여자의 차이도 부정하고 있습니다.

불평하는 자들이 주인에게 따집니다.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이는 정당하고 설득력 있는 주장입니다. 이것이 자본주의의 주장입니다. 일한 만큼의 정당한 대가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매우 논리적인 주장입니다. 열 시간 일한 사람과 한 시간 일한 사람에게 똑같은 품삯을 준다면 당연히 열 시간 일한 사람은 불평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된다면 앞으로 아무도 이 포도원에 일하러 오지 않거나, 한 시간만 일하고 하루 일당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기회를 엿보려고 할 것입니다.

이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오늘의 상황으로 바꿔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국회의원과 국회 경비원의 연봉을 똑같이 준다면, 그럴 리야 없겠지만, 만약 그런다면 국회의원들의 눈이 뒤집힐 것입니다. 국정을 책임진 우리를 경비원과 똑같이 취급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당장 임금 체계와 규정을 뜯어고치려 들 것이 분명합니다.

이런 문제에 대한 포도원 주인의 해명은, 자신은 잘못한 게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주인은 온종일 일한 사람과 맺은 본래 계약을 위반하지 않았습니다. 언뜻 생각하면 포도원 주인은 이른 아침에 온 일꾼과 오후 5시에 온 일꾼에게 다른 원칙을 적용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 원리는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주인은 열 시간 일한 사람만이 아니라 한 시간 일한 사람도 역시 가족을 부양하려면 하루 일당이 있어야 할 것을 고려하여서 한 데나리온을 준 것입니다. 그런데 포도원 주인에게 불평을 하는 이들은 자기보다 일을 조금밖에 안 한 사람이 자기들과 같은 대우를 받는 것은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 이야기를 확대 적용하면 자기보다 못한 인간이 자기와 똑같은 대우를 받는다는 사실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루 한 시간밖에 일하지 못한 일꾼의 진지하고 심각한 필요가 무엇인가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이러한 하나님 나라를 불공평하고 악하다고 불평하고 비난하고 거부합니다. 성경은 이같이 왜곡된 인간의 관점을 예리하게 정곡을 찔러 지적합니다.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마 20:15)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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