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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목사 "삶의 허상과 실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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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22-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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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실존주의가 기독교에 끼친 영향은 실로 치명적입니다. 실존주의가 합리주의 관념론과 실증주의에 반발하여 일어났는데 합리주의 관념론과 실증주의는 하나님과 기독교를 거부한 철학입니다. 실존주의가 하나님과 기독교를 거부한 철학에 반발하여 일어났다고 하여 기독교가 실존주의를 우군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합리주의 관념론이나 실증주의나 실존주의가 나름의 기여한 바가 없지 않지만 하나님과 기독교 진리를 심각하게 훼손함에 있어서는 다를 바가 없습니다. 기독교의 복음이 그러한 세속 철학에 의하여 얼마나 오염되고 왜곡되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버리고 인간의 생각을 좇는 것의 결과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솔로몬의 말을 빌리면 바람을 잡는 것처럼 헛된 것입니다. 기독교인들 중에도 합리주의 관념론과 실증주의와 실존주의 철학에 영향을 받아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따르지 않고 세속 철학적 가치관인 허상을 좇는 이들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 삶의 원리 중 대표적인 것이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산상수훈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 중에도 산상수훈을 아는 이들이 많습니다. 산상수훈 중에 팔복이라고 부르는 원리가 있고 그 외에도 우리가 좋아할 뿐만이 아니라 불신자들도 좋아하는 하나님 나라 원리들이 많습니다. 이렇게 좋은 하나님 나라 원리를 듣는 것은 좋은데 그것을 지키려고 하면 여간 곤혹스럽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들의 귀를 즐겁게 하려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물론 좋은 말씀이니까 듣기만 해도 즐겁고 좋지만 듣고 즐거워하는 것으로 끝나면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듣고 즐거워할 뿐만이 아니라 지켜 행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 원리는 너무 은혜스럽고 심오해서 감동을 주고 듣는 것만으로 즐겁지만 지키기는 너무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뜻이 심오하고 감동적일수록 지키기가 어렵습니다. 산상수훈이나 고린도전서 13장 같은 말씀은 너무 심오하고 감동적인 말씀인데 지키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은혜스럽고 감동적이고 심오한 말씀일수록 잘 지키지 못하는 이 아이러니 때문에 늘 갈등하게 됩니다. 좋아하고 은혜받는 것과 실천을 별개로 생각하면 고민할 것도 없겠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 때문에 우리는 갈등을 느끼고 고민하게 됩니다.

신약 성경에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과 여러 사람들을 식사에 초대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초대 받은 사람들 중에 어떤 이들이 높은 자리에 앉는 것을 보시고 식사 자리에 초대를 받았을 때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고 하시고 또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새인에게 사람을 식사 자리에 초대하려거든 초대 받은 것을 되갚으려고 너를 초대할 수 있는 사람을 초대하지 말고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을 초대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평범한 일상에서는 내가 식사를 한 번 대접하면 그 다음에는 대접 받은 사람이 대접하는 것이 예의이고 정상적인 관계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친한 사람들끼리 주고 받는 것을 누리고 즐기며 살아갑니다. 어떤 모임에 초대 받아 가게 되면 좌석이 정해져 있지 않는 이상 누구라도 좀 더 좋은 자리 즉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높아지려고 하면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면 높아진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은혜로운 말씀을 실천하기 어려운 것은 우리의 상식과 가치관에 비추어 볼 때 이러한 가르침이 역설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의 상식과 합리와 예의와 욕망과는 완전히 반대 되는 행동을 하라고 합니다. 그것이 복되다고 하셨습니다. 초대 받은 모임에서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이나 중요 인사를 초대한 사람이 바라고 기대하는 것은 허상이고 그들이 기대하고 바라는 것과 반대로 행하는 것이 삶의 실체 즉 생명의 실체라고 하신 것입니다. 높은 자리에 앉아서 얻게 되는 것은 사람들에게 주목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그것은 허상입니다. 명예와 인기를 얻어도 영혼이 더 평안을 누리게 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는다고 해서 우리 삶 자체가 새로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교수가 되고 박사가 되어도 밥이 더 맛있다거나 삶이 더 행복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도 명예와 인기를 얻는 것이 중요하지 않으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대통령이 되고 판사가 되고 국회의원이 되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서 지위가 높아진다고 해서 더 진실하게 되거나 영혼이 평안하고 영적 생명이 풍성하게 되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높은 지위에 올라서 얻게 되는 것은 모두가 허상입니다. 솔로몬에게 물어보면 그런 것들은 바람을 잡는 것과 같이 헛되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에서 그리스도인들도 허상을 좋아하며 좇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목사인 나 자신도 예외가 아닙니다. 누가 나를 존경한다고 하면 마음에 바람이 들어 들뜨게 되고 누가 나를 훌륭하다고 하면 그 말이 사실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말과 행동을 더 조심하고 예의를 지키기는 하지만 그렇게 해서 경건하게 되기 보다는 바리새인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칭찬과 인기와 권력과 대접받기를 좋아하는 것은 진실로 허망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초대했던 바리새인이나 그곳에 초대를 받아서 높은 자리에 앉았던 사람들을 향하여 주님은 “복 있는 사람”의 반대편에 있는 불행한 사람들이라고 지적하신 것입니다.

이 하나님 나라의 역설적 가르침을 한사코 거부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야 돈도 더 벌고, 사람들에게 제대로 인정받는 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돈과 권력과 인기와 인정받는 일은 삶의 실제(reality of life)가 아닙니다. 즉 생명의 실제가 아닙니다. 기독교인들 중에도 높은 자리도 얻고, 삶의 현실도 붙들고 살면 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뽕도 따고 님도 보고, 처남 좋고 매부 좋고,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요즘 식당에 가면 웨이터가 ‘따뜻한 물 드릴까요, 찬물 드릴까요?’라고 물어봅니다. 나는 따듯한 물을 달라고 하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따뜻한 물이 좋으면서도 어떤 때는 찬물도 마시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둘 다 달라고 합니다. 따뜻한 물 찬물은 둘 다 마셔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문제 앞에서 이것과 더불어 저것은 안 됩니다. 이런 문제에 대한 주님의 말씀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라고 하셨습니다. 높은 자리를 피해야 하는 더 근본적인 이유는 사람에게는 높은 자리를 감당할 능력이 본래 없기 때문입니다. 능력이 없는 사람이 높은 자리에 앉게 되면 감당하기가 힘들어 불행하게 됩니다. 교수 될 능력이 없는 사람이 교수가 되면 불행하고, 목사의 은사가 없는 사람이 목사가되면 불행하고, 대통령이 될 자격이 안 되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불행합니다. 모든 사람이 모든 지위에 능력이 안 된다면 누가 그 일을 하느냐고 반문하는 분들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모든 사람이 모든 지위에 자격이 안 된다고 합니다. 다만 자기는 능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고 자기가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대통령이나 판사나 검사, 국회의원, 교수, 교사, 의사, 변호사, 시인, 화가, 어떤 직업의 어떤 지위라도 완전하게 자격을 갖춘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자리에 있든지 자기의 한계를 의식하면서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일단 그런 사람은 굳이 자기가 감당할 수 없는 높은 자리에 올라가려고 아등바등하지 않을 것입니다.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는 사람은 그 자신도 불행하고 다른 사람도 불행하게 합니다. 우리는 구원 받을 자격만 없는 것이 아니라 어떤 지위에도 자격이 없습니다. 낮은 자리에 앉으라는 겸손의 교훈이 어떤 특정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보편적인 교훈인 이유가 이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과 율법 선생들은‘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고,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를 좋아했다고 합니다. 바리새인처럼 이미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들은 언제 어디서나 자기가 대접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뻔뻔해서 그런 게 아니라 인간 본성이 그렇습니다. 그런 대접을 받지 못하면 어딘가 섭섭하게 느낍니다. 인격적으로 준비된 이들은 그런 서운한 감정을 숨기지만, 준비가 안 된 사람은 노골적으로 표출하며 화를 내기도 합니다. 율법 교사와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권위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은 예수님에게 종종 화를 내다가 급기야 예수님을 죽일 생각으로 음모를 꾸미고 모의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였습니다.

손주가 초등학교 1학년 때 물어보았습니다. "할아버지가 교회에서 뭐지?" 이제 겨우 말을 배운 손주가 "Church Leader"라고 하였습니다. 목사는 설교를 독점한다는 면에서 그 자리가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설교자의 자리가 목사를 불안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목사에게는 설교할 능력이 본래 없기 때문입니다. 장님 코끼리 만지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목사의 설교 행위는 마치 장님 코끼리 만지기와 같은 것입니다. 부분을 알면서 전체를 아는 것처럼 착각하기가 일쑤입니다. 목사는 설교와의 관계에서 하나님 말씀에 대하여 인식의 불가능성과 선포의 당위성이라는 딜레마에 직면해 있습니다. 목사가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하고 신학을 깊이 있게 공부해도 목사 역시 일반 교인들과 마찬가지로 유한한 존재입니다. 존재론적으로 그럴 뿐만이 아니라 죽음을 경험하지 못한 것, 영혼이 무엇인지 정확하고 완벽하게 모르는 것, 사람의 마음 속에 들어가보지 못한 것, 천국과 지옥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 교인들과 같습니다. 목사인 나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늘 안개가 짙게 낀 길을 운전하는 것 같습니다. 바울에 의하면 그런 것이 정상입니다.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한 것은 목사나 평교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서도 목사에게는 전해야 하는 당위성 때문에 조금 아는 것으로 하나님의 뜻을 전한다는 기쁨과 보람이 있습니다. 교인들이 은혜를 받거나 깨닫는 것은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감동을 이끌어내려고 억지로 무리하지 않고 또한 그렇게 걱정도 안 합니다. 나 자신이 허상에서 깨어나 생명의 실체를 만나려고 노력합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사는 것이 영적 생명인데, 하나님과 진리에 대하여 나의 의식과 감정과 의지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늘 점검하며 살아야 겠습니다.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눅 14:12-14)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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