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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목사 "최고의 법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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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22-06-18

본문

황상하성경은 주님이 주신 이 최고의 법 “네 이웃을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모범적으로 실천한 한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눅 7:1-10절에 어떤 백 부장이 자기의 종이 병들어 죽게 되어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고쳐달라고 하였습니다.“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라고 합니다. 무심코 읽으면 지나쳐 버릴 이 대목은 그 백부장이 종을 매우 특이하게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종은 주인의 재산에 불과했던 시절에 그 백 부장이 자기 종에게 한 행위는 매우 특이하고 인상적인 일입니다. 실제로 그 백부장은 자기의 종을 마치 자식처럼 사랑했던 것 같습니다. 까다롭고 비판적이기로 유명했던 유대의 장로들이 이 백부장을 존경한 것을 보면 그 백부장의 종에 대한 사랑이 거짓 없는 사랑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 장로들이 이 백부장의 부탁을 받고 예수님께 찾아가서 부탁할 때 한 이야기가 매우 인상적입니다. “그들이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이르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니”(눅 7:4,5). 점령군 장교가 피점령지 국민을 사랑했다고 합니다. 뿐만이 아니라 노예 같은 종을 사랑하였습니다.

사건의 정황을 살펴볼 때 그 백부장은 종이 병들어 아파할 때 그도 아파하였을 것으로 추측하는 것은 무리가 아닙니다. 그 사람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매우 놀라워하시며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눅 7:9)라고 하셨습니다. 이 백부장이야말로 최고의 법을 실천한 사람입니다. 왕의 법을 지킨 사람입니다. 그의 신앙이 최고이고 그의 인격이 최고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종을 고쳐주시려고 그의 집을 향하여 가고 있을 때 백부장은 급히 사람을 예수님께 보내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나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병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우리는 주님에 대한 참 모범적인 태도를 이 백부장에게서 보게 됩니다.

야고보 사도가 제시하는 율법에 대한 새로운 해석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라는 말씀은 최고의 법인 사랑이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로마 가톨릭교회의 큰 문제점은 인간의 공로를 교리화 했다는 점입니다. 마리아와 성자들에게 기도하는 것은 그들의 공로의 덕을 보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인간의 공로를 부정합니다. 인간의 공로를 주장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소용없게 됩니다. 개혁교회가 하나님의 예정 교리를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예정 교리가 어려운 것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증명하는 데는 그 어떤 반대 이론도 단번에 종식시킬 수 있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예정 교리는 논리적으로 이해하거나 접근하면 혼란에 빠지게 되지만 예정 교리가 의도하고 있는 계시의 맥락과 지평에 눈을 뜨게 되면 감사와 찬양으로 반응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예정에 대한 이러한 반응이 에베소서 1장 3-14절에 바울 사도에 의해 잘 드러나 있습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예정을 설명하는 처음 말과 결론이 “찬송하리로다”입니다. 성경이 예정 교리를 계시하는 동기와 목적이 모두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은혜를 찬송하기 위함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죄와 선행에 대하여 우리는 저울질 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일곱 가지 죄를 지었는데 아홉 가지 선행을 하면 일곱 가지 죄는 지워지고 두 가지 선행이 여분의 공로로 남는다고 생각을 합니다. 사람들은 날마다 이처럼 저울질을 하면서 나쁜 짓에 대해 벌충하려는 심리로 좋은 일을 하려고 합니다. 이런 인간의 심리가 가톨릭교회에서는 교리적으로 정당화 되고 있습니다. 가톨릭교회는 인간 공로를 교리로 인정하기 때문에 악행을 선행으로 지울 수 있다고 믿고 가르칩니다.

법에 대한 이러한 왜곡은 세상에서도 용납되지 않습니다. 나라를 구한 위대한 사람이라도 살인을 저질렀으면 살인 죄인입니다. 가톨릭교회의 공로설은 일면 인간을 위하는 것 같지만 최고의 법인 사랑에 반하는 것이고 결국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이론입니다.

신약 성경은 어떤 사람이 살인도 하지 않고 간음도 하지 않고 도적질도 하지 않고 거짓말도 하지 않았어도 그가 사람을 차별했다면 그가 애써 법을 지킨 것이 다 무효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수만 가지 죄 중 한 가지만 범해도 죄인이라는 율법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최고의 법인 사랑에 대한 설명입니다. 인간의 행위를 다섯 가지 좋은 일을 하고 네 가지 나쁜 짓을 저지른 후 5-4=1식의 수학으로 계산하면 안 됩니다.

야고보는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고 하였습니다. 자유 하게 하는 율법이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율법이 얽매이고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 하게 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율법을 지기 싫은 짐을 지듯이 억지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나를 보호해 준다는 고마운 생각으로 지키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법을 자유하는 법으로 지키면 안전하고 평안합니다. 교통법규도 어기면 위험할 뿐만 아니라 마음이 불안합니다. 모든 법은 잘 지키면 안전하고 평안합니다. 지키면 안전하고 안 지키면 위험하다는 생각으로 법을 지킬 뿐만 아니라 그 법을 고맙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키는 태도가 자유의 율법대로 지키는 것입니다. 가벼운 교통법규 하나를 지키는 때도 이러한 태도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의식으로 그 나라가 제공하는 혜택을 누리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에 따라 천국 가고 지옥 가는 것이 결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천국은 예수를 믿으면 갑니다. 예수를 안 믿으면 지옥 갑니다. 율법을 잘 지킨다고 천국 가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 못 지켰다고 지옥 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천국과 지옥 문턱을 넘나들면서 불안해합니다. 물론 천국 가기로 되어 있는 신자는 율법을 잘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지옥 형벌이 무서워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법을 지키는 것은 자유의 법입니다.

사람들은 법을 자유를 구속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판단하는 데 법을 사용합니다. 법을 판단하는 데 사용하는 사람은 법을 집행하는 법관입니다. 삶에서 법을 판단의 기준으로 사용하는 태도는 율법적으로 사는 것이고 ,감사하며 적극적으로 지키는 태도는 그 법에 대해 자유하는 혜택을 누리는 것입니다. 법을 율법적으로 지키면 판단과 평가를 하게 되고 그 판단과 평가에 따라 다른 사람을 대하게 되는데 이렇게 하면 사랑을 실천하기가 점점 어려워집니다. 현대에는 최고의 법인 사랑을 실천해야 할 하나님 나라 백성에게도 율법적 경향이 심화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서도 율법적 판단이 작용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예쁘면 더 사랑하고 예쁘지 않으면 덜 사랑하고, 똑똑하고 똑똑하지 못한 것에 따라 사랑의 유무와 경중이 결정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본래는 못난 자식일수록 더 사랑하는 것이 부모의 사랑인데 지금의 세태는 그러한 부모의 사랑에 역행하고 있습니다. 잘난 아들은 나라의 아들, 돈 잘 버는 아들은 사돈의 아들, 카드빚에 신용 불량자 된 아들은 내 아들이라는 자조 섞인 농담도 그러한 세태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런 농담도 있습니다. 3대 정신 나간 여자를 며느리를 딸로 착각하는 여자, 사위를 아들로 착각하는 여자,며느리의 남편을 아직도 아들로 착각하는 여자’라고 하는데 이것도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자조 섞인 농담입니다.

율법적 삶은 부부간이나 모든 인간관계에서 시비를 불러일으킵니다. 화내고 짜증 내는 거의 모든 경우가 율법적으로 사람을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도 법을 온전하게 지키지 못하는데 자기 성에 차지 않는다고 불평하고 비판하는 것은 자유의 율법을 지키는 자로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적으로 사는 태도입니다.

사랑은 무엇을 바라고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고 그다음은 다른 사람을 위하는 것이고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유익한 것이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부부간을 비롯하여 모든 인간관계에서 무엇을 바라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착한 마음과 선한 행동과 따뜻한 사랑으로 행동하는 것이 자유의 율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야고보가 자유의 율법 또는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라고 하여 자유와 율법을 연관시킨 것은 그냥 반짝하는 인간의 아이디어가 아니라 놀라운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입니다. 흔히 사랑을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상대를 높여 사랑하는 것입니다. 상대를 존경하고 공경하고 경외하는 것이 바로 높여 사랑하는 것입니다. 영어의 honor, respect 라는 것이 상대를 나보다 높여 사랑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상대를 나와 동등하게 여기는 사랑입니다. friendship이 그런 것입니다. 이것은 연인들 사이나 친구들 간의 수평적 사랑입니다. 셋째는 나보다 못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바로 이 사랑을 긍휼이라고 합니다. 불쌍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약한 사람, 소외당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사람이기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어느 가정에 심방을 가서 유치원 다니는 꼬마가 놀고 있는 방을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인형이 가득한 방에서 아이가 인형을 가지고 놀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아이를 보고 ‘너 인형을 좋아하는구나.’라고 하자 아이는 ‘네, 목사님도 인형 좋아하세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래 나도 인형을 좋아한다.’라고 하자 아이가 또 질문하였습니다. ‘목사님은 어떤 인형을 제일 좋아하세요?’ 목사님은 얼떨결에 그중에서 아주 예쁜 인형을 가리키며 ‘이것이 제일 예쁘구나.’라고 하며 아이에게 ‘너는 이 중에 어느 인형을 제일 좋아하니?’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이는 손에 들고 있던 못생기고 다 떨어진 인형을 들어 보이면서 ‘이거요’라고 하였습니다. ‘아니 예쁜 인형도 많은데 왜 못생기고 다 떨어진 인형을 좋아하니?’라고 묻자 아이가 ‘아무도 예뻐해 주지 않으니까요.’라고 하였습니다. 아이의 그 대답에 목사님은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 정신이 아찔했고 또 가슴이 울컥했다고 합니다. 아이는 못생기고 다 떨어진 인형을 제일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아무도 사랑해 주지 않고 예뻐해 주지 않기 때문에 자기가 사랑하고 좋아하고 예뻐해 준다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긍휼”이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mercy, 헬라어로는 엘레오스 ἔλεος인데 이것이 바로 최고의 법인 사랑이 수직적으로 작동하는 형태입니다. 우리 말의 “내리사랑”이라는 것도 부모를 통해 수적으로 작용하는 최고법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리사랑은 하나님께서 부모에게 주신 귀한 선물이고 이 사랑이 대인 관계에 적용된다면 그 사람은 매우 성숙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 나라 백성에게 더 고차원의 사랑을 요구합니다. 예수님께서 마 5:48절에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하셨는데 하나님의 온전하심은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사랑에 의해서 우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탕자 비유에서 아버지는 탕자를 사랑할 뿐만 아니라 아버지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며 불평하는 큰아들도 사랑하십니다.

불평하는 큰 아들에게 아버지가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눅 15:31-32). 이 아버지의 마음은 우리의 구원이 가능하게 한 마음이며 동시에 모든 대인 관계의 전제가 되어야 할 마음입니다. 이 아버지의 마음은 악인과 선인에게 차별 없이 대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 아버지의 눈으로 보고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면 사랑하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성경은 이 사랑을 긍휼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긍휼을 그렇게도 기뻐하시고 좋아하십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신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 5:7)라고 하셨고 야고보는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긍휼로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을 위해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고, 스데반도 자기를 돌로 치는 자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긍휼은 심판을 이깁니다. 여기에 우리의 승리의 비결이 있고 승리의 보장이 있고 행복의 약속이 있습니다.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 아멘넷 뉴스(USAame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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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누지문서님의 댓글

누지문서

지난 3월 31일~4월 4일까지 국민일보와 사귐과섬김 부설 코디연구소가 기독교에 대한 대국민 이미지 조사를 한 결과가 얼마 전에 발표됐습니다. 그 결과는 18.1%라는 실로 참담한 숫자입니다.  그리고 더 충격적인 사실은 청소년들의 복음화율이 3 % 라는 실로 암담한 사실입니다.
<<출처 : 기독신문(http://www.kidok.com)>>

이제 벼랑 끝에 선 한국 교회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
저는 이런 '최고의 법'이니 '인생 실패의 원인'이니 라는 그럴듯하고 안일한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응급처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즉, 비신자들이나 젊은이들, 청소년들의 마음에 어떤 인상적인 사실들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신의 기득권을 과감히 포기하고 이를 행동으로 옮겨 저들에게 새로운 비젼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분당우리교회의 29 교회 분립개척같은 명명백백한 기득권 포기의 사실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비신자나 청소년들이 보았을때 무언가
이전의 개신교와는 사믓 다른 새로운 사실들이 일어날 때 저들이 교회로
눈을 돌릴 수 있을겁니다.

물론 이런 칼럼에서는 쉽지 않은 시도입니다.
그래도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내용들을 이렇게 올리는 것보다는
무언가 새롭고 참신한 , 그리고 현대 한국 교회에게 시급한 무엇인가를 제시하는 것이 칼럼니스트의 본연의 모습이 아닐런지 궁금합니다.

ㅂㄷㄱ님의 댓글

ㅂㄷㄱ 댓글의 댓글

누지문서님 글에 많이 공감하지만, 저는 윗글이 안이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해야지요. 우리들의 마음 하나하나 바로 세우는 것도 정말 중요한 일이니까요. 물론 기득권 포기도 정말 참신하고 목사님들이 각성해서 기독교가 다시 부흥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함께 기도해야 하겠지요.

누지문서님의 댓글

누지문서 댓글의 댓글

ㅂㄷㄱ님, 제 반론에 관심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올린 글 내용중 응급처치란 단어에 대해 조금 더 설명을 하고 싶습니다.

저는 뉴욕에서 병원 근무 32년만에 은퇴한 사람이며 응급실 계통의 근무를 하였기에 시스템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환자들이 응급실에 와서 환자 등록을 하였을때 등록 순서대로 환자 케어를 하지 않고 응급 순서대로 합니다.

즉, 누가 더 병증이 심각한가가 관건입니다. 예를 들어 stroke case 는 환자가 응급실에 들어오는 즉시 20분 내에 CT scan 이 완료되어 뇌출혈 여부가 진단되어야 하며 이에 대한 처치의
protocol이 반드시 순서대로 행해져야 합니다.

현재 한국 개신교의 상태가 심각한 상황이며 이런 응급시에 맞는 protocol 이 우선적으로 행해져야 한다는 것이 제 요지입니다.

저는 은퇴후 거의 2달 동안 한국에서 여행을 다니고 있는 중입니다.  여러 다른 지역에서 호텔과 맛집 식당과 관광지를 다니며
여러 계층의 사람들을 옆에서 눈여겨 보며 그 동안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중에서 남원의 유명 냉면집과 영주의 모 호텔의 조식 장소에서 그리고 속초의 모 장소에서 만났던 목회자들과의 경험은
(물론 그 분들의 목소리가 크기에 대화 내용을 듣고 알게 된 )
마냥 씁쓸하기만 했습니다.
대화 내용을 통해 알게 되기 전까지는 전혀 목사답지 않은 언행과 심지어는 주위 사람들의 눈쌀을 찌프리게 만든 호텔의 조식 장소에서의 경험들은 목사 이전에 인격적인 무례까지 느껴져
그냥 제 고개를 돌리게 만들었습니다.

물론 눈에 안 띄는 곳에서 아직도 신실한 목사님들이 본연의 사명을 조용히 다하시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상당수의
목회자들에게서 보여지는 사태들은 응급상황임을 보여주며
그러기에 응급처치가 필요하다는 것이 저의 요지입니다.

황목사님의 칼럼 내용이 닥터 클리닉에서 정기 체크시에는 맞을런지 모르겠으나 응급실 용은 아니라는 것이며 한국 교회의 현 상황은 응급 상황이고 응급 처치에 해당하는 칼럼 내용을 올리시면 어떻겠냐는 것이 저의 반론 주장입니다.

성도님의 댓글

성도 댓글의 댓글

전 개인적으로 우리의 개신교는 응급조치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맨냇 첫패이지에 부흥을 거론하지만 현재의 종교로서의 개신교는 부흥하면 안됨니다 너무 늦었읍니다  너무 비성서적이고 예수님의 가르침과 상관이 없는 다른 형태가 된 상황에서 부흥되면 아마 더 이상한 조직이 될겁니다 그러나 전 남은자들 거듭난 주님의 제자들은 계속 기독교 종교안에도 박에서도 존재하며 주님의 다시오실날을 기다리는 정결한 신부로 제자로 존재함을 믿음니다
아주 혼란하고 어렵지만 주님의 역사를 기다립니다

ㅂㄷㄱ님의 댓글

ㅂㄷㄱ 댓글의 댓글

누지문서님도 성도님도 다 이해됩니다. 교회와 한국 기독교를 걱정하는 마음은 다 같을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들의 죄악이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닙니다. 저도 처음 믿게 되었을때 교회생활이 즐겁기만 했는데 점점 인간들의 실체를 보게되고 교인들이 인터넷을 통해 목사님을 비난하고 잘 모르는 네티즌들이 동조하면서 목사님을 쫓아내듯 하는 모습을 보고 경악했었습니다. 그게 벌써 십 몇년 전이고 몇년 전에는 방송국 카메라 앞에서 수제 화염방사기를 뿜는 모습과 그런 모습을 정치적으로 같은 편이기 때문에(?) 아멘넷에서 아무런 언급을 안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민주당은 공산당이라며 비난하고 여기서 정치적 발언해도 된다고 소리치던 사람들이 침묵하고 오히려 한때 여기서 많이 존경받았던 어느 사모님은 그 화염방사기 교회의 목사를 옹호하는 글들을 자기의 블로그에 쓰더군요. (그래서 저는 반공이 종교보다 강하다는 말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저런 상처들을 계속 받다보니 저는 이 "응급상태"가 만성적으로 느껴져서 이걸 어떻게 해서 고칠 수 있다는 느낌이 없습니다. 우리 한국 기독교는 예전부터 지금까지 항상 응급상태였습니다. 그나마 하나님이 붙들어 주셔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생각해보면 우리 모두가 응급상태입니다. 이런 글 쓰는 저도 하나님과 멀어지고 가까와지기를 반복합니다. 멀어질때마다 붙들어 당기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우리 인간들이 너무 불쌍합니다. 우리의 운명은 죽는 순간 영원한 천국과 영원한 지옥으로 갈립니다. 제 주변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운명을 모르는체 하나님을 무시하고 시집가고 장가가며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그들을 구하고 싶으면서도 저는 제 자신의 문제만으로도 허덕이고 있습니다. 그게 저의 현 주소입니다.

우리 모두가 응급상태입니다. 저는 힘이 없어 한국교회를 구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제가 한국교회의 일부이기에 제가 바뀌면 한국교회도 딱 그만큼 좋아지지 않을까 합니다. 또 제가 한사람이라도 더 전하면 그만큼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을까 합니다.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황상하 목사님의 이 글을 비난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분은 그분의 할 일을 하고 있습니다. 님이 원하는 대로는 아니겠지만 말입니다. 우리 각자가 하나님께 구하고 감동받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실까 생각합니다.

누지문서님의 댓글

누지문서 댓글의 댓글

" 우리 한국 기독교는 예전부터 지금까지 항상 응급상태였습니다. "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
ㅂㄷㄱ 님께서는 초대 한국 교회사에 대해서 어떻게 알고 계시기에 응급상태라고 언급하시는지 저는 도저히 이해가 안됩니다.

제가 이곳에서 굳이 나열하지 않아도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초대 한국 교회 시대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그리고 그런 모습에 비추어 볼 때 현재의 우리 모습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지.

제가 아멘넷에 드나든지 어언 14년을 넘어섰습니다.
저는 사실 그 당시부터 같은 모습으로 댓글과 칼럼을 썼습니다.  그리고 그런 저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첫 댓글에서 인용한 기독신문의 참담한 통계자료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20 년 전보다 10년 전이, 그리고 10년 전보다 현재가 한국 교회의 암울한 상황이 점차로 심화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계 뉴스나 칼럼에서는 황상하 목사님같은 좋은 글로 , 좋은 기사거리로 장식이 되고 저 같이
경종을 울리자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소수로 밀려나고 있는 현실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을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목회자가 아닙니다. 그래서 제가 할 수 있는 영역은 제한적입니다.
그렇기에  황목사님같은 훌륭한 목사님께서 칼럼을 통하여 좀 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내용을 통하여 교계 쇄신을
힘써 주십사하는 건의를 드린 것 뿐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올린 통계들은 분명히 내년에는 더욱 심각한 숫자로 우리들에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ㅂㄷㄱ님의 댓글

ㅂㄷㄱ 댓글의 댓글

항상 응급상태라는 말은 좀 과장된 것 갈네요. 전 그저 제가 하나님 믿게 된 이후 보고 들어온 것들이 황당한 것들이 많아서 그랬습니다.

어쨌든 황상하 목사님께 그런거 바라면 안됩니다. 이분은 제가 전에 말씀드린대로 신뢰회복이 우선이 되야 할 분이지 교계에 쓴소리 할 위치는 아니신 것 같습니다. 그저 이렇게 황당무계한 정치 얘기 안하신것만 해도 고맙고 제가 칭찬해드리고 싶은 겁니다.

한편으론 이해가 됩니다. 저는 이곳에서 댓글로만 존재합니다. 저는 이런 글들에 기생하여(?)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입니다. 황상하님의 글은 제 사상과 극단적으로 반대여서 이곳에 쓸 가치가 있지요. 일종의 대비효과라고 할까요? (검정색에 노란색을 놓으면 더 잘보이잖아요). 그래도 이런 글은 좀 격려해드려고 안좋은 글 쓸때 비판하셨으면 해서 제가 외람되게 글을 올렸습니다. 저도 누지문서님 글에 많이 동감하고 우리 나라 교계가 더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곳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ㅂㄷㄱ님의 댓글

ㅂㄷㄱ

황상하 목사님도 종종 이렇게 좋은 글을 쓰십니다. 진의도 모르고 사실인지도 의심스러운 주장들 대신 이렇게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전하는데만 집중하는 글을 앞으로도 계속 쓰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점점 메말라가고 있습니다. 기독교가 욕먹고 교세가 기울어가는 것도 나쁜 짓을 하는 몇몇 교계 지도자들을 비난함으로 고칠 수 있는게 아닙니다. 우리 하나 하나가 그를 위해 더 기도하고 겸비해야 더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걸 더 기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윗 글에서 네가지 죄를 짓고 다섯가지 선행을 했을때 선행을 더 했기때문에 죄가 상쇄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정말 맞는 말입니다. 거기에 제가 덧붙이자면... 우리는 네가지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백가지, 천가지가 넘는 죄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으로는 여자를 보고 잠깐 음욕을 품어도 죄고 친구를 바보라 불러도 지옥불에 떨어질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도저히 이 죄들을 해결할 수 없고 심지어 몇개인지 세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그저 납작 엎드려서 회개하고 또 용서하심을 감사와 눈물로 찬양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현실이며 바른 자세일 것입니다.

어쨌든, 목사님,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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