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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메시야 대망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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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18-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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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구약은 “옛 언약”이라는 뜻이며, 신약은 “새 언약”이라는 뜻입니다. 구약은 인간을 죄에서 구원할 언약에 대한 기록이고, 신약은 이 언약의 성취에 대한 기록입니다.
구약을 옛 언약이라 하고 신약을 새 언약이라고 함은 두 언약 사이에 본질적인 언약의 연속성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창조 기사에 언약이라는 용어가 등장하지는 않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만드셔서 당신이 창조하신 이 땅을 당신 대신 통치하게 하시고 더불어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하신 명령은 언약의 의무 규정인 청지기 역할이고, 아담이 청지기 역할을 충성되게 수행하는 동안 하나님께서 아담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실 것이라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이 죄를 지어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제가 깨어졌고 창조언약도 끝이 났습니다. 창조언약이 끝이 나고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다는 것은 인간 편에서는 회복이 불가능한 절망적 상황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구속의 언약을 세우시고 인간이 이 언약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를 회복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이 구속의 언약이 실현되는 수단을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마련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구속을 약속하시고 이루어 가시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구체적 역사에서 분명하게 계시하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구속의 언약이 실현되는 역사적 과정에서 생생하게 계시하셨습니다. 이 같은 성경의 계시와 역사의 관계는 비인격적인 플라톤의 형상과 아리스토델레스의 부동의 운동자와는 아주 다르게 철저히 하나님의 인격적인 의와 사랑과 은혜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제 구속의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새 언약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새 언약은 구속의 언약에 대한 확증입니다. 새 언약을 통해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계시하셨고, 죄로 죽었던 인간에게 구속의 길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 뿐 아니라 그의 모든 가르침과 행하신 이적은 구속의 언약을 이루시는 것이며 동시에 자신의 신성과 인성을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속의 언약이 성취되기를 확수 고대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언약의 의무 규정을 지키지 않으므로 숱한 고난을 겪게 됩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메시야에 대한 기대는 절절했고 너무나 아픈 현실은 그 언약이 정치적 해방으로 실현되기를 기다리는 방향으로 빗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오시기 전 수 세기 동안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오실 메시야가 정치적 메시야로 적들을 멸하고 이스라엘을 강력한 나라로 세울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잡아 왕으로 세우려 했던 것이 그러한 기대를 반영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의 그러한 기대에 부응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메시야이심을 적극적으로 드러내지 않으시고 제자들에게도 드러내지 말라고 당부하신 것도 유대인들의 그릇된 메시야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후에는 당신이 메시야이심을 드러내셨는데, 그것은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정치적 메시야가 아님이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이같이 구속 언약의 성취인 새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가 유대인들이 기대했던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메시야가 아니라는 사실과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동시에 고난 받는 메시야이심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야가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메시야라면 이스라엘을 정치적으로 해방시키고 강력한 나라로 세우기만 한다면 그 메시야가 누구이든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구속의 언약을 통해 약속하신 메시야는 “그 메시야”입니다. 유대인의 그릇된 메시야 기대는 “그 메시야”에 대한 기대에서 메시야 시대를 기다리는 것으로 왜곡되었던 것입니다. 이 같이 그릇된 메시야 기대와 오해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수 세기 전부터 지금까지 반복되고 있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모든 철학과 사상과 정치와 경제도 정직하게 이야기 하면 모두가 Messiahnism을 지향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정치, 경제, 교육, 군사, 심지어 전쟁까지도 결국은 Messiahnism을 이루려고 하는 것입니다. 인류는 그 메시야니즘을 이루기 위해 경쟁도 하고, 전쟁도 하고, 혁명도 하고, 개혁도 단행합니다.
경제를 성장시키는 것이나 과학을 발전시키는 것도 결국은 메시야 시대를 이루기 위함입니다. 칼 마르크스의 철학과 그 사상에서 출발한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나 광의적으로는 진보사상까지도 메시야 시대를 이루려는 목적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보수주의나 진보주의나 방법만 다를 뿐 지향하는 것은 메시야 시대입니다. 하지만 “그 메시야”가 아닌 “메시야 시대”에 대한 인류의 기대는 낭만적인 착한 방법에서 피를 부르는 폭력적 혁명의 방법들로 이루어보려고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심지어 민주화, 환경보호, 인권보호, 경제민주화, 보편복지 등 온갖 좋은 방법을 동원해보았지만 인간은 그 착한 방법들을 이용하여 더 지능적으로 악을 자행하였습니다. 인권을 강조하는 휴머니즘에 의해서 성의 구별마저 철폐되어 윤리 도덕의 가치는 박물관에 보관된 유물처럼 되어버렸고, 자연과 환경에 무지한 환경론자들에 의해 환경오염은 심화되고 발전과 생산은 위축되며, 글로벌리스트들에 의해 국경이 철폐되어 테러리스트나 폭력집단들의 활동영역이 확대되고 정치인들과 글로벌 기업들의 검은 거래가 일반화되어 악덕정치인이 위인처럼 행세하는데도 사람들은 그러한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사악함은 노골적 폭력으로도 나타나지만 양의 탈을 쓴 이리의 모습을 하기도 하기 때문에 불행하게도 인류는 메시야 시대의 도래를 기대하며 스스로에게 속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모든 인간은 메시야니즘을 구가한다는 사실을 악용하여 무지하거나 악한 지도자들은 지상낙원을 약속합니다.
무지한 인간은 그 거짓 이상의 실현을 기대하며 온갖 거짓과 폭력도 감수하고 인간의 생명과 존엄과 정조와 신념과 양심까지도 기꺼이 포기하기도 합니다. 문학과 예술의 제단에 성이 제물로 바쳐지고 경제 성장이라는 이데올로기 제단에 전통 신앙까지 희생제물이 되고 있습니다. 교회들도 “그 메시야”를 메시야 시대로 왜곡하여 정통신앙을 혼란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 메시야”에 대한 기대는 언약을 믿는 믿음이고 메시야 시대를 기대하는 것은 그저 좋은 세상이 올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인데 그런 인간의 희망은 역사적으로 한 번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바른 신앙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이고 그저 좋은 세상이 올 거라는 기대는 사이비 기독교 신앙입니다.
내가 바라는 어떤 부족한 것이 이루어지고 성취되기를 바라는 것은 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옛말에 “말 타면 종 두고 싶다.”고 했는데, 인간의 욕망은 하나가 성취되면 또 다른 욕망을 갖게 됩니다. 인간은 누구나 욕망의 지계 표를 자꾸 옮깁니다. 욕망의 지계표를 자꾸 바꾸는 것은 “the Messiah”가 아닌 “a messiah”를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the Messiah”를 기다린 이들은 예수를 만났지만“a messiah”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고도 그가 “the Messiah”임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한 평생 “the Messiah”를 기다리다가 예수님을 만난 대표적인 인물이 시므온입니다. 시므온이 만난 메시야는 활발하게 천국 복음을 전하고 표적과 기사를 행하던 예수가 아니고 부모의 보호아래 있는 어린아이 예수입니다. 물론 시므온이 “그 메시야”이신 어린 예수를 알아보게 된 것은 성령에 의해서입니다. 수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그 분이 메시야이심을 증거 하는 많은 표적들을 보면서도 알아보지 못한 것은 “그 메시야”가 아닌 메시야 시대를 기다린 때문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 중에도 메시야 시대를 구가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기복신앙과 신비주의를 추구하는 이들의 신앙이 바로 메시야 시대를 구가하는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을 통해 마음에 위로와 정신 수양을 쌓으려 하는 이들도 메시야 시대를 구가하는 이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물질적 복과 병 고침과 형통과 출세와 성공을 바라는 신앙은 한 번 쯤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당시에도 그런 경향의 사람들은 왜곡된 메시야 대망 신앙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므온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그 어떤 표적도 보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아직 어렸기 때문에 천국 복음을 가르치거나 선포할 수도 없었고 더욱이 아무런 표적도 행할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므온은 어린 예수님을 보고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히브리인들의 독특한 표현법입니다. 자신이 메시야를 보았다고 말하지 않고 자신의 눈이 메시야를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시므온이 메시야를 알아 본 것이 자신의 능력에 의한 능동적 깨달음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표적을 행하는 메시야를 원하지만 시므온은 아직 어린 예수 안에서 완성된 구원을 보았습니다. 참된 신앙은 메시야가 이룰 구원을 바라봄과 동시에 이미 그 메시야를 통해 실현된 구원을 보는 것입니다. 이 같은 메시야 대망 신앙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기대하는 것과 그 내용이 얼마나 다른가를 간파하게 합니다.
시므온은, 구약시대 동안 계속해서 예언되었지만 아무도 보지 못했던 메시야를 맞이하는 구약시대를 마감하는 인물이요, 또 메시야를 맞이함으로 신약시대를 알리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직 갓난아기의 모습인 예수를 보고서 그토록 즐겁고 평안한 심정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던 시므온의 모습은 너무나 순수하고 감동적이며 도전이 되고 그래서 깊이 묵상하게 됩니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그의 부모가 그에 대한 말들을 놀랍게 여기더라.”(눅 2:25-33)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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