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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오피니언

인문학적 소양과 신학의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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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2008-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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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축구에서 선수가 헛발질 하는 것을 보는 것은 재미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국가 대표선수가 시합에서 헛발질을 하면 화가 납니다. 축구에서 헛발질을 하는 것은 기초체력과 기본기가 부실하기 때문입니다. 바쁜 직장 생활에 매여 살면서 공을 찰 기회가 일 년에 한두 번 밖에 없는 사람의 헛발질을 나무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축구를 직업으로 하는 선수가 헛발질을 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용납이 안 될 일입니다.

설교자들 중에 신학 무용론을 주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무슨 권위로 그러는지 “교리란 미신을 체계화한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는 이런 극단적 신학 무용론 자와 논쟁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습니다. 하지만 전문적으로 설교를 하는 목사가 강단에서 교리와 신학적 헛발질을 하는 것은 우려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나 역시 그런 실수를 할 가능성이 있기에 그런 실수를 하지 말아야겠다는 다짐과 예방의 차원에서 문제 제기를 해 보는 것입니다.

선교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첫째는 전할 복음이 있어야 하고 둘째는 복음을 전달할 언어가 있어야 합니다. 전해야 할 복음은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이고 전달 수단인 언어는 배워서 습득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언어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언어가 곧 학문이고 문화이고 철학이고 사상입니다. 언어는 인간의 습관과 풍습과 가치관을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언어를 배우는 것은 그 언어가 내포하고 있는 모든 것을 함께 배우는 것이고 그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그 언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초기 기독교가 복음을 헬라 문화권에 전할 때 헬라어를 사용하는 것은 필수적이었고, 헬라 문화권은 헬라 철학의 토대위에 형성된 문화이기 때문에 논리적이고 이론적인 방법으로 복음을 전해야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성경은 전혀 이론적이거나 논리적인 책이 아니지만 그 성경을 받아들여할 사람들이 이론적이고 논리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에 성경에 대한 이론적 작업이 필요했고 그것이 교리와 신학의 시작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형편과 사정은 초기 기독교 뿐 아니라 지금도 동일하다고 보아야 합니다. 교리와 신학의 무용론을 주장하는 것은 선교지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도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주장과 같습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헬라 철학적인 방법을 이용하여 교리와 신학의 체계를 세웠습니다. 그것은 헬라 철학을 모르면 신학의 개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말도 됩니다. 기독교가 헬라 철학의 방법으로 성경의 내용을 이론화 하여 교리와 신학을 세우는 역사적 과정을 통하여 복음뿐 아니라 헬라철학도 서구 사람들에게 전하여 주었던 것입니다.

교회는 헬라 철학을 방법 논으로만 이용했는데 결과적으로 철학의 내용까지 전달하게 된 것은 언어가 지니는 중요성과 그 영향력을 다시 한 번 실감하지 않을 수 없게 합니다. 교리와 신학에 대한 평가는 차치하고 소위 인문학으로 총칭되는 철학과 역사와 문학과 문화를 알지 못하면 신학의 개념이 불분명하여 오해를 하게 될 수 있습니다.

조직신학이 하나님, 인간, 죄, 구원 등을 설명할 때 존재론과 인식론을 사용합니다. 물론 존재론과 인식론에도 순전히 철학적 존재론과 인식론 그리고 기독교적 존재론과 인식론으로 구별하기도 하지만 그 것은 결국 철학적 방법론이기 때문에 그 개념을 분명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문학적 소양이 필요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구원에 대한 설명을 할 때 개혁주의 신학을 표방하는 설교자는 당연히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를 강조하게 됩니다. 개혁주의 신학에 의하면 구원은 철저히 믿음으로 얻는 것이고 믿음이란 또한 철저하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을 표방하는 설교자라면 누구나 이 사실을 인정하지만 목회적 필요에 의해서 인간의 책임부분을 강조하고 싶어지게 됩니다. 이런 갈등에서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를 잠시 잠정하고 인간 편에서의 행위와 결단을 강조하게 됩니다.

여기서 아주 나쁜 경우는 신학 무용론으로 빠지게 되기도 하고 그보다 조금 나은 경우 ‘칭의는 은혜지만 성화는 인간의 몫’라는 이원론에 빠지게 되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이런 경우는 목회적 필요 때문이 아니라 인문학적 소양의 부족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행위에 대한 인식론적 한계 때문이지 그것 자체가 존재론적으로 구분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 이해의 한계 때문에 인식론적 차원에서 칭의와 성화가 구분되는 것이야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것을 이원론적으로 분리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칭의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이지만 성화는 인간이 책임져야 할 몫이라고 하는 것은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 교리에 대한 헛발질을 하는 것입니다. 칭의도 하나님의 은혜요 성화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인간의 책임을 강조할 수 있는 분별력은 인문학적 소양을 통한 신학 개념의 정확한 이해가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설교자는 철학과 역사와 문예사조에 대한 폭넓은 지식 습득에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이 모든 인문학적 소양은 성경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기 위한 능력을 쌓기 위함입니다. 창조 세계의 모든 것은 성경에 감추어진 복음의 비밀을 이해하는데 유익한 것이고, 성경을 깊이 깨달을수록 그 만상이 하나님의 솜씨를 드러내고 있음을 볼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 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시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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