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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오피니언

새 해보다는 주의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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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08-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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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아들이 바둑을 두었습니다. 수가 비슷한데 아버지가 가끔 실수를 하여 악수를 둡니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한수를 무르자고 합니다. 수가 비슷하니까 한 수를 무르면 불리하니까 아들은 안 된다고 합니다. 그렇게 실랑이를 하다가 아버지가 화가 나서 ‘그러면 다시 두자!’고 하면서 바둑판을 둘러엎어버렸습니다. 아버지로서의 체면도 있고 한데 오죽했으면 바둑판을 둘러엎었겠습니까. 바둑이나 장기를 두다가 판을 둘러엎는 것은 최악의 경우입니다. 그래서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좀처럼 그렇게는 안 합니다. 그런데 바둑이나 장기를 두어 본 사람은 알지만 악수를 두어서 후회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고 그래서 판이 불리하게 되면 정말 판을 둘러엎고 처음부터 다시 두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판을 둘러엎고 다시 두자고 억지를 부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바둑이나 장기 같은 것이야 판을 둘러엎고 다시 두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고 해도 그게 무슨 빅딜이겠습니까. 하지만 인생을 둘러엎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내가 왜 그런 악수를 두었든가, 내 인생을 십년만 되돌려 놓을 수만 있다면... 라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나는 새 해의 새 달력을 좋아합니다.
누가 만들어 놓았는지 해를 만들어 놓은 것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습니다. 한 해 두 해가 나눔이 없이 계속된다면 얼마나 지루하겠습니까. 다행스럽게도 365일이 지나면 새 해가 되어 묵은 달력 치우고 새 달력을 겁니다. 지난 한 해 365일 동안에 일어났던 모든 일은 일단 달력과 함께 처분해 버리고 새 달력을 걸고 새롭게 시작합니다. 바둑을 두다가도 판을 둘러엎고 새로 두기가 쉽지 않은 데 새 해가 되면 새 달력을 걸고 새로 시작하니까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후회되는 일도 많고 한 수 무르고 싶을 때도 많은데 새 해에는 새로 시작할 수 있으니까 어떤 면에서는 바둑판 둘러엎고 다시 두는 마음으로 시작할 수 있으니까 좋습니다. 물론 새 해가 된다고 하여 내용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별로 없지만 형식적으로 라도 새로 시작한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심리적으로 위안이 되는지 모릅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비록 청소년이 아니라고 하여도 가끔은 인생에 대하여 진지한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나는 왜 사는가?”, “돈은 무엇 하러 버는가?”, “공부는 왜 하는가?”, “나의 삶엔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사람에 따라서 또는 형편과 처지에 따라서 이런 생각이 강렬할 때가 있습니다. 마치 무슨 습격이라도 당한 것처럼 이런 생각에 휩싸여 자신을 주체하지 못할 경우가 있습니다. 자신의 삶의 의미에 대한 회의가 습격해오면 지금까지 너무나 익숙하던 모든 것들이 갑자기 낯설어집니다.

일상적으로 하던 일이 무의미하게 느껴집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출근하는 것이나, 밤새워 공부하는 일이나, 친구를 만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나, 승진을 위한 피를 말리는 경쟁이나, 화려한 파티나, 질탕한 술자리나, 분주한 종종 걸음이 부질없고 의미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무의미해지고, 지루하고, 역겨워지기까지 합니다. 산다는 것이 무의미한 일상의 궤도를 습관적으로 따라 돌아가는 덧없고 하찮은 것에 불과하다는 느낌이 들어 아득바득 일상에 쫓기며 살아가는 자신이 우습게 느껴집니다.

실존주의자 알베르 카뮈(Albert Camus)는 이 비참한 순간을 “위대한 의식(意識)의 순간”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실존”을 자각하고 생의 “부조리”에 눈뜨는 순간이라는 것입니다. 카뮈는 그의 사상을 집약한 철학적 에세이 『시지프스의 신화』에서 “인생은 무의미하다. 그러나 살아야 한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호머는 시지프스가 인간 중에서 가장 현명하고 신중한 사람이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들의 편에서 보면 엿듣기 좋아하고, 입이 싸고, 교활할 뿐 아니라 특히나 신들을 우습게 여긴다는 점에서 신들의 노여움을 사 마뜩찮은 인간으로 일찍이 낙인찍힌 존재였습니다. 그가 주제넘게 신들의 일에 끼어들어 고자질을 하다가 죽게 되었는데 죽기 전에 자기의 아내 멜로페에게 자기가 죽으면 화장도 매장도 하지 말고 광장에 내다 버릴 것이며 장례식도 치르지 말라고 은밀히 당부하였습니다. 죽어 저승에 당도한 시지프스는 명계의 대왕 하데스를 알현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내가 저의 시신을 광장에 내다 버리고 장례식도 치르지 않은 것은 죽은 자를 수습하여 무사히 저승에 이르게 하는 이제까지의 관습을 조롱한 것인즉 이는 곧 명계의 지배자이신 대왕에 대한 능멸에 다름 아니니 제가 다시 이승으로 가 아내의 죄를 단단히 물은 후 다시 오겠습니다. 하니 저에게 사흘간만 말미를 주소서."

시지프스의 꾀에 넘어간 명계의 대왕 하데스는 그를 다시 이승으로 보내 주었습니다. 그러나 시지프스는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산 좋고 물 좋은 곳을 찾아 이생을 즐기며 살았습니다. 이를 괘씸하게 여긴 하데스가 결국 시지프스를 잡아다가 가혹한 형벌을 주었습니다. 그 형벌은 높은 바위산 아래에 있는 큰 바위를 늘 산꼭대기에 있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시지프스는 바위를 산꼭대기가지 밀어 올립니다. 그런데 천신만고 끝에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밀어 올리면 바위는 다시 산 아래로 굴러 떨어집니다. 그렇게 하기를 수백만 번, 아니 끝도 없이 계속하는 것입니다.

시즈프스는 다시 굴러 떨어질 것을 뻔히 알면서도 산 위로 바위를 밀어 올려야 하는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가혹한 영겁의 형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언제 끝나리라는 보장도 없는 무익한 노동 앞엔 헤아릴 길 없는 영겁의 시간이 있을 뿐인데 까뮈는 이것이 인간의 실존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카뮈는 시지프스가 진정으로 위대한 사람인 까닭은 바로 “다시 굴러 떨어질 것임을 알면서도, 부질없는 노동이 영원히 계속 될 것임을 알면서도 수백, 수천, 수만 번 바위를 밀어 올리는 행위"에 있다고 했습니다. 인간에 대한 까뮈의 통찰은, 우리가 생각하기에 가장 절망스럽고 참혹 한 순간, 굴러 떨어진 바위를 향해 다시 내려오는 그 순간이야말로 시지프스가 자신의 운명을 이기는 ‘승리의 순간’이라고 하였습니다. 인간 실존에 대한 이 같은 실존주의자들의 설명에 사람들은 매료되었습니다.

한 사람으로서 자기만의 고유한 삶을 살아가는 실존은 주체로서의 자신을 자각하면서 시작된다고 하는 실존주의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르트르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는데 그것은 인간의 주체성을 한껏 강조한 말입니다. 그 뜻은 목적이 선행한 후의 창조물이 아니라 인간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무의 실존이라는 것입니다. 즉 인간은 무이기 때문에 행동에 의해서 자기 자신을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곧 인간의 운명은 인간 수중에 있다는 무신론적 근간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물론 케에르케고르와 같은 유신론적 실존주의자도 있지만 대부분의 실존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을 가르치는 성경과는 반대되는 사상의 토대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현대 상담학과 심리 치료는 거의가 실존주의적 인간 이해에서 출발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의 해결이나 병의 치료의 방법 또한 성경적이라 할 수 없습니다. 실증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기독교적이지도 않은 실존주의가 사람들에게 그렇게도 어필하는 것은 철학적 모호함과 감각적 현실주의로 인간 삶의 모순과 자유와 책임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인간에게는 궁극적으로 희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희망 없음을 직시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가치 있는 것이라고 하는 실존주의는 결국 인간 스스로를 기만하는 것일 뿐입니다.

성경은 결코 인간이 삶에서 경험하게 되는 모순과 고통 자체가 의미 있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고통과 모순은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고 비록 인간에게 그것을 극복할 능력과 대안이 없지만 하나님의 대안이 있기에 인간에게는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묵은 달력 뜯어내고 새 달력 거는 것이 비록 근본적으로 인간을 새롭게 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새 삶의 상징적 기회로 삼는다면 이 또한 의미 있고 감사한 것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새 해가 되어 새 달력을 걸게 되는 것이 나름대로 의미가 있고 또 감사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새 해에다 큰 의미를 부여합니다. 새로운 결심을 하고, 새로운 계획을 세웁니다. 무엇인가를 새롭게 한다는 것은 기분 좋은 것이고 또 가슴 설레는 일입니다. 어떤 분들은 새 해에는 꼭 성경을 한 번을 읽겠노라고 다짐을 합니다. 어떤 분들은 열심히 전도하리라고 다짐을 합니다. 어떤 분들은 십일조를 철저히 하리라고 다짐을 합니다. 어떤 분들은 예배 시간에 늦지 않고 일찍 나오리라고 다짐을 하기도 합니다. 어떤 분들은 기도 열심히 하리라고 다짐도 합니다. 다이어트를 성공하리라고 다짐도 하고, 성숙한 인간관계를 결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회봉사에 참여하려고 하는 이들도 있고, 환경 문제에 관심을 가져보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아무런 결심도 하지 않는 분들도 많을 것입니다. 아무런 결심도 하지 않는 분은 그나마 새 해가 주는 유익도 챙기지 못합니다. 기회가 주어져도 자기 것으로 취하지 못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새 해에는 모두가 좋은 결심을 많이 했으면 합니다. 좋은 계획도 많이 세웠으면 합니다. 위대하고 거창한 계획이 아니고 소박한 결심이라도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올해 나이 서른아홉인 어떤 아주머니는 마흔이 되기 전인 이 무자년에 아주 큰 결심 하나를 하였습니다. 마흔이 다 되도록 그렇게도 벼르고 벼르던 것인데 하지 못했던 것을 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 결심은 다름 아닌 가계부를 쓰리라는 것입니다. 그 결심을 인터넷 자기의 개인 블로그에 올려놓았습니다. 공개결심을 하였습니다. 모든 이들이 이 무자년에 무쟈게 복 많이 받으시기를 기원하며 소박한 결심을 하였습니다. 그 아주머니의 결심이 지켜지기를 바랍니다. 또한 모든 이들의 결심과 계획과 기도가 성취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크신 복이 넘쳤으면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무리 새로운 결심을 하고 새로운 계획을 세워도 여전히 실망스러운 일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여전히 눈에는 희망이 보이지 않을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그래서 실망하고 좌절하고 낙심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으로 낙심하면 안 됩니다.

바울은 우리의 바라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우리는 우리의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참된 소망과 필요는 성령께서 챙겨주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하였습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은 모든 부정적인 물리적이고 정신적인 환경을 극복하고도 남을 보장이 되어 위로가 되고 희망을 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흔히 전화위복이라는 말을 하는데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니까 모든 것이 잘되어서 좋고 못되어도 좋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사야는 이스라엘의 암울한 시대에 하나님의 위로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그 위로는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게 될 것이고 모든 것은 회복되고 고생한 것 이상으로 보상이 주어질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그 때를 가리켜 여호와의 은혜의 해라고 하였습니다. 그 예언의 약속은 주전 538년에 바벨론을 점령한 페르시아의 고레스의 칙령에 의해 성취되었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어떤 나라도 70년 전에 전쟁 포로로 잡아온 노예들을 자기 나라로 돌려보내 준 경우는 없습니다. 그것도 그냥 돌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나라를 건설하고 그들의 종교를 회복시킬 인적 물적 자원을 지원하면서 돌려보냈습니다. 노획물도 돌려보냈습니다.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 이사야가 예언을 했을 때 사람들이 그 말씀을 믿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했는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 예언이 성취되기에는 너무나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물리적인 환경을 생각하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새로운 제국 페르시아의 왕인 고레스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유대의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우연히 고레스가 이사야의 예언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예언서에 자기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잘 알지도 못하는 히브리 민족의 선지자인 이사야의 글에 고레스라는 자기의 이름이 나오고, 그가 바벨론 제국 때 포로로 잡혀 와서 노예로 살고 있는 그 히브리 민족을 해방시킬 것이라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 예언은 히브리인들이 믿는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 하게 하신 약속이었습니다. 하지만 고레스는 당시 그의 백성들과 함께 마르둑이라는 신을 섬기고 있었기 때문에 이름 없는 조그만 민족 히브리인의 신인 하나님의 신탁을 존중할 가능성도 이유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고레스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고레스로 하여금 이 일을 내가 반드시 해야겠다고 결심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예언이 성취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벨론 사람들의 노예로 , 노리개로 온갖 모욕과 인권을 유린당하며 말도 정체성도 다 잃어버린 채 처절한 절망과 좌절 속에서 희망 없이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할아버지 노예, 아버지 노예, 아들 노예, 손자 노예 대를 이어 노예로 태어나 노예로 살다가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언하고 약속했지만 믿어지지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예연의 약속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이사야의 이 예언이 신약에서 예수님께서 당신에게서 성취되는 예언이라고 하시면서 인용하셨습니다. 이사야가 예언한 말씀이 당신에게서 성취되었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호와의 은혜의 해는 이스라엘이 70년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해방되어 돌아오므로 성취되었고, 또한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오시므로 성취되었고, 나아가 주님이 재림하실 때 온전히 성취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은혜의 해란 희년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각 족속에게 나누어 주시면서 땅을 관리하고 정치와 사회생활을 하는데 필요한 여러 가지 법을 주셨는데 그 중에 하나가 희년 제도입니다. 이스라엘이 비록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따라 살지만 욕심으로 인하여 동족을 노예로 삼고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을 괄시하고 무자비하고 정의롭지 못하게 될 것을 내다보시고 이 희년을 반드시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희년이란 매 50년이 되는 해를 희년으로 지키는 것인데 그 희년에는 빚 때문에 노예가 되었던 사람은 자유인이 되고, 모든 경제적 빚은 탕감되고, 집이나 땅을 빼앗겼다면 그것도 돌려받게 됩니다.

희년에는 모든 빚이 탕감되고 억매임에서 자유하게 됩니다. 이것은 개인의 경제적 무한 소유를 금지하고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기본권이 침해되지 못하도록 하신 하나님의 조치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흔히 있는 부동산 투기와, 힘없고 가난한 자에 대한 인권유린을 금하신 것이 희년의 정신입니다. 적극적으로는 모두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함께 나누며 기뻐하고 감사하게 하신 것입니다. 한국을 비롯하여 세계 많은 나라에서 성경의 이 희년 정신으로 경제 정의를 실천하고 인권을 보호하자는 운동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예언이 당신에게서 응하였다고 하셨고 그를 믿는 우리는 주님의 해에 참여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2007년도를 역사의 한 장으로 넘기고 2008년이라는 새 해를 맞았습니다. 새 해를 맞이하는 것은 마치 새로운 도화지에 새 그림을 그리기 시작할 수 있는 것처럼 기분이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지난해의 상처와 아픔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새 해에는 형식적으로 또는 심리적으로 한 해를 잊고 새 해를 맞이하는 신선함과 새로움을 맛보지만 그 정도 가지고는 과거로부터 해방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여호와의 은혜의 해, 곧 주의 해는 우리를 붙잡고 있는 과거로부터 우리를 온전히 해방시킵니다. 이것은 불가능한 관념이 아닙니다. 불가능한 것 같은 가능함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게서 이 은혜의 해는 성취되었고 그를 믿는 우리들은 그 은혜의 해에 참여하였다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이 희년, 주의 해에 참여한 감격을 다음과 같이 외쳤습니다.

고후 5:17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전과 같은 인간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 것이라는 고백이며 선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의 해를 맞아서 새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삭개오도, 탕자도, 세리도, 베드로도, 바울도 모두 주의 해, 여호와의 은혜의 해를 맞이하여 살아갔던 분들입니다. 우리 중에도 주의 해를 맞이하여 살아가고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우리 모두 새 해 보다는 주의 해를 맞아 바둑판을 둘러엎듯이 옛 생활의 방식을 둘러엎어버리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그 나라의 통치를 받으며 그 나라에 참여한 자로서 감격과 감사와 기쁨과 희망이 가득한 새 삶을 창조해 갔으면 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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