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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와 신학의 역사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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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2006-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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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기독교가 만난 헬라 철학은 모든 것을 이론적으로 다 설명하고 있는 반면 기독교는 성경의 진리를 체계화된 진술로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헬라 철학자들은 이론적이지 않은 기독교의 가르침을 천하고 무식한 자들의 주장이라고 일축했으며 이에 도전을 받은 초기 교부들이 기독교의 가르침을 이론적으로 변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또한 헬라 철학자들의 신에 대한 가르침이 기독교의 하나님과 너무나 유사(?)하였기 때문에 저스틴(Justine Martyr)같은 신학자는 소크라테스를 가리켜 실제로는 기독교도라고 볼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플라톤의 이원론적 세계관, 신관, 영혼회기설 등은 기독교인이 되기 전에 헬라 철학에 깊이 젖어 있던 초기 교부들에게 그대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들은 희랍의 철학을 받아들일 뿐 아니라 기독교에도 헬라 철학이 주장하는 가르침이 있으니까 기독교를 그렇게 가소평가하지 말라는 태도로 기독교를 변증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변증에 대해 강하게 반발했던 터툴리안 같은 신학자는 철학적인 것을 극단적으로 배격하였습니다.

하지만 초대교회는 이미 철학과 이방 종교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유대주의적 이단인 에비온파는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부인했고 민족주의적 요소와 함께 율법은 유대인에게만 적용된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이방의 종교적 혼합주의를 추구한 노스틱주의는 초기 기독교에게는 너무나 치명적 폐해를 끼친 사상이었습니다. 나아가 노스틱주의의 배경에서 그들과 차별화를 주장한 말시온, 몬타누스도 기독교의 가르침을 왜곡시키는 이단들이었습니다.

초대교회는 이들의 주장과 영향을 간과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초대교회는 성경적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시며 하나님이신 양성에 대하여 이론적 설명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성경의 교리화 작업으로 말미암아 중세에 이르러서는 신학이 모든 학문의 여왕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기독교와 헬라 철학이 처음 만났을 때는 헬라 철학이 기독교를 유치한 종교라고 무시하였으나 중세에 오면 철학은 여왕의 자리를 차지한 신학의 시녀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신학이 여왕의 자리를 치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의 영향권 아래 있는 서구의 나라들에서 모든 학문과 사상은 합리적이고 이론적인 특징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기독교가 헬라 철학을 기독교의 진리를 변호하고 증거하는 방법으로 도입하였지만 기독교는 철학의 영향을 심각하게 받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서구의 모든 학문이 이론적이고 합리적인 것은 단순히 헬라 철학의 영향이라기보다는 희랍 철학의 영향을 받은 기독교의 신학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세의 모든 학문의 여왕으로서의 신학은 서구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지만 그 영향은 기독교적인 것뿐 아니라 헬라 철학을 서구 사회에 소개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론적인 것은 헬라적인 것이지만 그것을 실제로 서양 사람들의 머리에 집어넣은 것은 기독교 신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쯤 되었을 때 신학에게 여왕의 자리를 내주었던 철학이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문예부흥입니다.

그 동안 그렇게도 대단 권위를 누리던 신학이 13-14세기 문예 부흥 때(the period of the renaissance) 충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문예부흥이란 중세의 모든 학문으로부터 히브리적인 요소를 제거하고 헬라적인 요소를 회복시키고자 한 운동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문예부흥은 신학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시작하였고 그 결과 견고했던 신학의 지위가 그 때 한 번 기우뚱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까지만 해도 신학은 여전히 매우 중요한 자리를 고수하고 있습니다. 그 후 두 번째 신학이 철퇴를 얻어맞은 것은 자연과학(Natural Science)의 발전에 의해서입니다. 그 대표적인 케이스가 16,17세기 갈리레오 사건입니다. 이것은 그 시대의 형편을 대변해 주는 사건입니다. 그 때 자연 과학이 신학에 대하여 노골적으로 대항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무렵부터 갈릴레오는 자신의 천문관측 결과에 의거하여,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地動說)에 대한 믿음을 굳혔는데, 이것이 로마교황청의 반발을 사게 되었습니다. 그는 성경과 지동설과의 모순성에 관하여 제자들에게, 그리고 자신이 섬기는 대공(大公)의 어머니에게 편지형식으로 자기의 생각을 써 보냈습니다. 그로 인하여 그는 로마의 이단심문소로부터 직접 소환되지는 않았지만 재판이 열려, 앞으로 지동설은 일체 말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습니다. 그 이전에는 감히 다른 학문이 신학에 도전한다는 것은 상상을 할 수 없었지만 이 때 와서는 가릴레오의 주장과 같은 주장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이 자연 과학과 신학이 대결하므로써 그 결과로 생겨난 것이 18세기의 계몽주의 운동(a campaign for enlightenment)입니다. 계몽주의를 우리가 여러 가지로 정의 할 수 있으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반기독교적 사상이라는 점입니다. 특히 불란스에서 많은 계몽주의 학자들이 일어났습니다. 볼테르, 다름벨트, 엘벨티우스 같은 사람들은 거의 무신론자들이었는데, 그 시대에 무신론의 교과서가 나오기 시작하였습니다. 볼테르는 무실론자였지만 도덕을 위해 신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여 당시 무신론자들과 구별되었던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신이란 도덕을 위한 관념적인 신이었고 그 아들 예수에 대하여는 우리가 알바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상이 바로 계몽주의의 정신이었습니다. 이 정신을 이어 받은 것이 포이에르바하의 무신론이고, 그의 무신론을 이어 받은 사람이 공산주의 이론을 확립한 칼 막스라는 사실을 생각할 때 지성인들을 매료시킨 계몽사상과 자연과학이 그렇게도 존중하는 이성적 합리주의의 결과는 반기독교적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 골로새서 2:8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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