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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오피니언

목회자의 건강한 자기 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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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흥용2010-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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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의 건강한 자기 견제
Healthy self-containment of pastors

얼마 전 목회자들을 위한 네트워킹을 통해서 정기적으로 만남을 갖고 있는 어느 비한인 목사님의 말이 생각납니다.
“우리 교회의 제직들은 내가 하자는 대로 다해서 문제입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왕같은 존재군요. 그런데 목사님 소신대로 해서 좋지 않나요?”

그 분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물론 내맘대로 하면 좋을 수 있지요. 하지만 전혀 좋은 일이 아니예요. 내가 신이 아닌 이상 잘못된 판단으로 말할 가능성은 언제든지 있을 수도 있죠. 제직들이 그 때마다 바로 잡아 주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교회는 내 개인 소유가 아니지 않습니까. 저들도 나와 같이 주님의 교회를 위해서 부름받은 사람들이니 자신들의 생각도 있을텐데 의견을 말해야 제가 저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목회자에 대한 신임이 깊을수록 목회자가 혼자의 재량으로 결정할 수 있는 사항들도 많아지기 쉽습니다. 물론 교회 전체가 목회자의 비전과 목회 방향에 맞는 빠른 결정이 용이해 진다는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을 많은 목회자들이 바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목회자와 평신도들의 마음이 하나가 되는 것을 무조건 나쁘다고만 말할수도 없습니다.

목회자와 평신도의 관계적 관점

하지만 다른 각도로 이 문제에 대해서 접근할 필요도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목회자와 평신도의 관계적 관점입니다. 이들은 상호간에 심리적으로 불평등한 관계에 놓이기도 쉽습니다. 종종 경험하지만 목회자라고 하는 성직에 대한 높은 도덕적 기대치 만큼 대우가 남다를 때가 많습니다. 또한 목회자가 한 교회에서 목회를 오래 할수록 교회 구성원들과 목회자의 깊은 관계가 형성되어기 마련이어서 목회자에 대한 평신도들의 신뢰와 의존도 또한 자연스럽게 높아지면서 위임된 권한 또한 그 권한의 폭이 넓어지기도 합니다.

행정적으로도 교회안에서 목회자에게 위임된 행정및 영적 지도에 대한 책무들이 목회자와 평신도의 관계를 지도자와 피지도자의 위치에 서게 하기도 합니다. 사회 심리적인 틀안에서 보더라도 한국사회를 지탱해온 민족 특유의 계급의식이 교회에도 엄연히 존재하면서 이러한 관계를 형성한다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이런 목회자에 많은 책임과 권한이 위임되는 모습이 항상 건강한 교회, 건강한 목회를 만드는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목회자 자신의 건강한 목회를 위한자기 견제수단을 잃어버리기는 위기가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제도적, 심리적 장치들이 없거나 미약할 경우 문제가 처음 발생할 때는 잠재적 파괴력에 대한 심각성에 대해서 무시하거나 모르고 지내다가 통제 불능상태가 되서야 깨닫게 되기 쉽습니다. 마치 암 덩어리가 몸에서 자라고 있는데도 통증이 없다고 해서 스스로 건강하다고 믿고 살다 수술도 못할 정도의 꼴이 되는 것입니다.

잘못된 목회자와 평신도의 관계

목회자 스스로 건강한 자기 견제 장치를 만들지 않으면 오히려 목회자와 교인간의 정서적 괴리감이 깊어 집니다. 흔한 말로 목사가 혼자서 독재한다는 불평을 만들어 내고, 평신도들에게 우리는 들러리라는 무력감에 빠지게 할 수도 있습니다. 경우가 심할 경우에는 목회자와 교회에 대한 반감과 통제 불능의 불신으로 돌아올수도 있습니다.

목회자의 자기견제라는 말의 뜻은 목사 장로 사이의 감정적 힘의 대결 혹은 어느 한쪽 길들이기등 과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목사와 평신도간에 서로 불신과 대립의 각을 세우는 것 자체가 이에 관여한 영들이 시험들었다는 증거입니다. 목사와 평신도의 사이는 신뢰를 바탕으로 해야하는 관계이기에 오직 협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기본을 잊지 말고 실천함으로 증명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가지의 상반된 모습들은 경계해야 합니다.

첫번째 경계해야 할 것은 목사의 절대권력 추구 노력입니다. 목사는 사이비 교주가 아닙니다. 따라서 목사가 교회에서 팥으로 메주를 만든다고 해도 성도는 '아멘' 하도록 훈련시켜야 한다는 어떤 이들의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어떤 이는 더 심한 표현으로 이를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럴 땐 '아니오'라고 해야 맞습니다. 이런 시도는 목회자의 특권의식에서 비롯된 권위주의적 발상이기도 하고, 공산당이나 독재 정부가 하는 세뇌 정책과 다를 게 없습니다.

그리고 두번째로는 경계해야 할 것은 평신도들의 고의적 목사 길들이기 시도입니다. 교단 사역을 하다보니 보통 한 교회에서 겪는 일보다 더 다양한 사람들과 사건들을 겪어왔습니다. 그중에는 목회자를 자신들이 고용한 월급장이 처럼 함부로 취급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고의로 목회자들을 짧게는 몇개월 길게는 3년 미만씩만 사역하도록 하고는 어떤 이유를 들어서든지 목회자를 내보내는 교회도 보았습니다.

막 부임한 목사를 돕기는 커녕, 오래된 제직들이 고의로 목회자를 힘들게 하면서 목회자에게 협조를 하지 않는 교회도 보았습니다. 이런 사태가 지속적으로 발생할 경우, 필자가 속한 미국 교단의 경우에는 해당 감독 노회가 법적절차를 거쳐서 그 해당 교회의 당회를 강제로 해체시킬 수도 있고, 심할 경우 교회를 아예 문닫게 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최근에 그러한 예들이 비한인 교회들에게 있었습니다. 양쪽 모두 교회안에서의 자신들의 기득권을 주장하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이런 시도를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자신들의 영이 건강하지 않다는 증거일 뿐입니다. 물론 목회자가 뭔가 의욕을 갖고 일을 추진하려는데 번번히 반대하는 교인이 있다면 골치아픈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런 교인들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한국인 교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미국인 교회에도 있습니다. 교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 회당에도 있고, 캐토릭 교회에도 있고, 모든 종교 기관에 존재합니다. 이런 자들때문에 목회자의 건강한 자기견제 노력을 게을리 하거나 무시해서는 않됩니다. 이 노력은 남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목회자 자신의 발전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목회자는 자신의 건강한 목회를 지속하기 위해서 역설적이지만 자기를 스스로 견제할 수 있는 장치들을 만들어 놓고 운영할 필요가 있습니다. 목회자가 스스로 자신에 대해서 경계를 늦추지 않는 목적은 목회자 스스로가 내외적 유혹이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을 효과적인 관리를하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목회자 스스로 자기의 역할을 건강하게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목회자 스스로 자기의 역할을 건강하게 통제할 수 있는 방법

①제일 먼저할 일은 일보다 사람이 먼저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름심만큼 소중한 것이 나와 함께 하는 사람들과의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사람을 일때문에 만나는 것은 목회자에게 불행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자세로는 사람들을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만 보이기 쉽기 때문입니다.

이러다 보면 하나님의 소명과 자신의 목표를 동일시하는 착각속에서 살기쉽고, 자신의 뜻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을 경우 자기는 열심히 하는데 교인들은 손 놓고 놀고 있다는 식의 불평으로 모든 책임을 남의 탓으로 돌리기 쉬워집니다. 심한 경우 피해 망상에 사로 잡히게 됩니다.

교인들은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위해서 기도해주고 격려 혹은 위로해 주는 목사님을 존경합니다. 저는 고인이 되신 이중표 목사님께서 시무하시던 한국의 한신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제가 출석할 당시에는 교회의 세가 그렇게 크지 않은 때였습니다. 세례식 전날 이 목사님과의 개인 인터뷰에서 물으셨던 질문이 지금도 기억에 남습니다.

이중표 목사님은 “이 세상에서 누가 가장 훌륭한 목사야?”라고 물었습니다. 저는 얼떨결에 “이중표 목사님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분이 다시 물으셨습니다. “어째서?” 갑자기 답을 하긴 했는데 이유까지는 생각을 미처 못했었습니다. "어~" 하는 사이에 이 목사님이 답을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너의 교회 목사지 않겠어? 내가 너와 너의 가족을 위해서 기도하는 목사이니 내가 자네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목사이지” 지금생각해도 명답입니다.

내 뜻과 계획보다 중요한 것은 내게 맡겨진 양들과 인간적 관계를 맺어 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 인격적인 관계가 바로서야 목회자 자신도 목표 성취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고, 건강한 자기영역을 구축할 수 있습니다.

②두번째로 중요한 것은 교회가 가지고 있는 성문화된 제도의 투명한 운영입니다.

한국교회에서는 교단헌법에 밝은 평신도들을 만나기가 어렵습니다. 교회의 문제점을 입에 침튀기면서 지적하는 평신도들중에도 교단 헌법에 대한 바른 상식과 해석을 갖고 말한다기 보다는 몇 가지 아는 부분적 내용을 자기식 기준과 세상적 상식으로 잘못 해석하고, 부풀려서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다보니 올바르지 않은 내용의 말들이 통제불능의 겉잡을수 없을 상태로 재생산 되어서, 교회와 목회자에게 치명적 흠집을 내는 경우가 많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내가 속한 미국교단에서는 평신도들에게도 교단 헌법을 교육시킵니다. 교단 웹사이트에도 물론 헌법이 올려져 있고, 각 노회의 서기들도 어느 누가 교단헌법에 대한 적용과 관련된 질문을 하면 답변해 줍니다. 제직 훈련의 중요 내용에도 헌법교육은 교회 운영의 기초에 해당하는 만큼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물론 개 교회 마다 약간의 유연성은 갖을 수 있도록 헌법의 어느 부분은 유연하게 되어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헌법을 알아야 법대로 하고, 법대로 해야 목회자의 자기 견제 장치가 건강하게 운영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와 함께 교회 운영의 투명성또한 덤으로 확보됩니다. 또, 교회의 결정사항이나 목회자의 사역부분에 대해서 누가 잘못된 해석을 하거나 오해를 해도 다른 사람들이 바로 잡아줄 여지가 많아집니다.

③세번째로 정기적으로 목회자의 역할과 책임을 평신도 지도자들과 대화를 통해서 조정할 것을 권합니다.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아지면서 아브라함도 자신의 일의 일부를 다른 사람들과 나누었습니다. 초대 교회의 사도들도 그랬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모세도, 초대교회의 사도들도 자신들이 반드시 해야할 가장 중요한 사역에 모든 역량을 집중할 수 있었고, 교회의 불필요한 불평과 잡음 또한 없앨 수 있었습니다.

목회자가 혼자서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아지면 일의 효율성이 떨어지는 것은 필연적입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모든 것을 혼자 처리하는 것이 남의 간섭을 받지 않아서 좋아 보일 수도 있지만, 이는 동시에 목회 탈진으로 이어지는 초기 증상이기도 하다는 점을 꼭 인지하고 스스로 조심해야 합니다.

④마지막으로 목회자는 자기 가족과의 행복한 관계유지함으로써 건강한 자기 견제 체제를 만들고 유지해갈 수 있습니다.

목회에서는 성공했는데 가정에서 실패한 목회자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목회자의 가정은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다는 멋있는 말에 미혹되어서 자신이 가장으로써, 아빠로써, 혹은 남편으로써 할 일은 무시하거나 소홀히 한 경우들입니다. 최소한 저의 경험만을 갖고 말하자면 가정이 불안하면 목회도 하기 어렵고, 목회자의 마음도 불안정하여 여러가지 유혹과 시험의 덫에 걸려 넘어질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목회자의 가정은 목회자 자신이 지켜야 합니다. 그 누구도 목사 자신을 대신해서 가장이 될 수 없고, 남편이 될수도 없으며, 아빠가 될수도 없습니다. 목회자의 가정이 평안해야 목회자 자신의 목회도 되고, 건강한 자기견제도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아내를 무시하는 자세를 가진 목회자는 목회를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도 무시하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은 존중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아내의 목회에 대한 쓴 소리를 거북해 하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목회자에게 가장 가까우면서도 냉철하게 조언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사모입니다.

목회자들의 자기 견제 노력이 필요한 이유는 결국 목회자가 있어야 할 위치를 확인시켜 주는 지속적인 작업입니다. 목회자가 있어야 바로 그 자리에서 소명을 행복하게 감당하기 위함이고, 자신이 주님께로 부터 맡아서 목양하는 분들을 건강하게 세우기 위함입니다. 목회자들의 자기 견제노력속에서 행복한 목회, 건강한 목회가 이루어지길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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