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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오피니언

진실과 정직 실종 시대를 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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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송연2013-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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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난 옷이냐? 어서 사실대로 말해 봐라. " 환경미화원인 아버지와 작은 고물상을 운영하는 어머니는 아들이 입고 들어 온 고급 브렌드의 청바지를 본 순간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며칠째 다그쳤다. 부모님의 성화에 못 이겨 아들이 사실을 털어놓았다. "죄송해요. 버스 정류장에서 손지갑을 훔쳤어요." 아들의 말에 아버지는 그만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내 아들이 남의 돈을 훔쳤다니....' 잠시 뒤 아버지가 정신을 가다듬고 말했다. "환경이 어렵다고 잘못된 길로 빠져서는 안 된다. "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며 아들의 손을 꼭 잡고 경찰서로 데려가 자수시켰다. 자식의 잘못을 감싸기 바쁜 세상에 뜻밖의 상황을 대면한 경찰은 의아해하면서 조사를 시작했다.

경찰 조사 과정에서 아들의 범죄 사실이 하나 더 밝혀졌고, 결국, 아들은 법정에 서게 되었다. 그 사이에 아버지는 아들이 남의 돈을 훔친 것에 마음 아파하다가 그만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재판이 있는 날 법정에서 어머니가 울먹였다. "남편의 뜻대로 아들이 올바른 사람이 되도록 엄한 벌을 내려 주세요." 아들은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가 저 때문에 돌아가셨어요.. 흑흑." 이를 지켜보던 주위 사람들은 숙연해졌다. 드디어 판결의 시간이 왔다. "불처분입니다. 꽝-꽝-꽝." 벌을 내리지 않은 뜻밖의 판결에 어리둥절해 하는 당사자와 주위 사람들에게 판사가 그 이유를 밝혔다. "우리는 이처럼 훌륭한 아버지의 아들을 믿기 때문입니다. "- 중앙일보 기사 중

이 대목을 읽어나가던 필자의 가슴이 뭉클, 눈시울이 뜨거웠던 이유는, 비록 가난하나마 진실함을 삶의 우선순위로 삼았던 한 훌륭한 아버지가 부족한 아들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 목숨을 내건 그 큰 사랑에서 우리 예수님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아버지를 가리켜서 판사는 “훌륭한 아버지”라고 정의한다. “훌륭한 아버지.” 그는 부자도 아니었고 지식인도 아니었고 정계를 주름잡는 유명 인사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진실했고 정직했었다. 그런 아버지의 죽음은 그 아들을 바른 길로 이끌어 주는 힘의 원천이 되었을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던 아들에게 그가 가야할 길은 세상의 헛된 부귀영화 뜬구름을 잡는 것이 아니라 “진실”과 정직의 길이란 것을 가르쳐 준 것이다!

지금 세상이, 교회가 이토록 시끄러운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모두 "진실과 정직 실종"에서부터 출발한다고 해도 결코 과장된 표현은 아니리라. 세상도 그러하겠지만, 특히, 목회자가 걸어가야 할 길이 어딘가? 그 길은 부귀영화의 길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야 하는 길, 외롭고 척박한 길이어야 한다. 십자가를 따르는 길, 의로운 길을 걷는 것이 부름 받은 자들의 길이란 사실을 망각한 데서부터 진실과 정직은 실종된다. 진실함과 정직함이 생명이어야 하는데, 그 길을 이탈해 버린 자들의 결국은 무엇이겠는가?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라는 말이 있다. "높은 신분에는 도덕적 의무와 책임"이 따른다는 뜻이다. 신분이 높은 사람일수록 더욱 도덕적이고 정직해야 하고 헌신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는 말이다.

조금만 주위를 둘러보면, 금방 알 수 있는 것이, 공인으로서 자리에서 물러나야 할 시기에 물러나지 않고 그 자리를 무리하게 지키고 있다가 그 시기를 놓치고 자기 의사와 반하여 쫓겨나게 되는 일도 허다하고,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쫓겨나 후세의 지탄을 받게 되는 경우도 많이 있다.

반대로 깨끗이 물러나야 할 자리를 내어놓지 못하고 그 자리를 연연하여 더 있겠다 고집하다가 강제로 쫓겨나는 어리석은 폐단을 저지르기도 한다. 그뿐이랴, 맡긴 양 떼를 잘 목양하고 기르는 대신, 학대하고 발로 차서 쫓아내기도 하고, 그 양 떼 중에서 토실토실 살찌고 마음에 드는 양이 있으면 염치도 없이 잡아먹어 버리는 것도 예사다. 자신이 주인이요, 자기 것이라 착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오늘 그리스도인이라 자처하는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는 과연 어떤 자리인가? 우리가 선 이 자리는 바로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을 대신하여 서 있는 영광의 자리이다! 우리는 하나님 아들의 목숨과 맞바꾼 자녀들, 그분의 이름이 걸려 있는 귀한 신분이다. 이런 우리이기에, 우리는 흙탕물에 휩쓸려 맥없이 떠내려갈 것이 아니라,  "진실과 정직 실종 시대"란 흙탕물을 거슬러 위로 올라가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사탄의 덫을 인지(認知)하라 
C.S 루이스가 쓴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라는 책을 읽어본 적이 있다. 인간을 어떻게 유혹하는가에 대한 최고의 통찰력이 담긴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거기에 고참 악마인 '스크루테이프'가 신참 악마에게 어떻게 인간을 유혹해서 함정에 빠뜨릴 것인가를 가르쳐주는 대목이 있는데 여기 잠시 소개해 보면,

“현재 우리의 가장 큰 협력자 중 하나는 바로 교회라네. 내 말을 오해하지는 말도록. 내가 말하는 교회는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뻗어 나가며 영원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교회, 깃발을 휘날리는 군대처럼 무서운 그런 교회가 아니니까. 자네한테 고백하는데 그런 광경은 우리의 가장 대담한 유혹자들까지도 불안하게 만들지.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이 인간들은 그 광경을 전혀 보지 못한다네.” 물론, 이 대목은 “fiction”이지만, 그럼에도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 크다고 할 것이다. 어지러운 교회(공동체 교회, 개인 교회) 때문에, 모든 교회가 함께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교회를 흔들어 깨는 것, 이것이 사탄의 덫이다!!

2. 엘리트 의식을 버려라.
엘리트 의식이란, 다른 사람(공동체)보다 내가 더 나은 그 무엇이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보이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과 자기 자신의 사이에 뭔가 뚜렷한 차이(distinguish)가 드러나야 하는데, 실제적으로 아는 것도 별로 없고 가진 것도 별로 없다. 생각해 낸 것이 보이지 않는 영적인 부분에서 사기를 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자기 자신이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인양, 신령한 척 하기도 하고, 급기야는 없는 학위마저도 부풀리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모두다 부질없는 생각이다.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지 않으면 그 모든 아성이 하루 아침에 물거품이 된다. 구두 수선공이었던 무디 선생을 지금에 와서 무시하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모두들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사탄이 쳐둔 올무에 사정 없이 걸려 넘어지고 만다.

성도는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부르시고 그 피로 깨끗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신 주님의 몸이다. 이에서 무엇이 더 필요한가? 그런고로 엘리트 의식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굳게 선 공동체 속의 한 일원임을 명심해야 실수가 적을 것이다.

3. 성령으로 충만케 하라
오늘날 기독교계가 이토록 심각하게 병들게 된 그 원인을 찾으라고 한다면, 필자는 "잘못된 성령론에서부터 파생된 것이다." 라고 정의할 수 있다. 눈에 보이는 기현상, 화끈하고 뜨끈해야만 한다는 것, 쓰러트리고 쓰러지는 현상, 심지어는 횡설수설 하는 술취한 현상이 성령 충만이라고 가르치고 그렇게 믿고 있는 어리석은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성령 충만함을 외적으로 나타나는 어떤 기현상에 두는 것이 문제다. 무디 선생은 “성령 충만은 곧 말씀 충만이다.”라고 말했다.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 1 : 1)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 자신이시고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을 입은 분이 예수님이시다. 성령 하나님 역시 말씀이시다. 에베소서 5장 18절의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아라”는 말씀과 병행 구절인 골로새서 3장 16절을 보면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며...”라고 명시되어 있다. 성령 충만은 말씀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성령 충만은 자기의 신비적인 환상이나 감정에 따라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그 말씀을 온전히 지킬 때 성령님의 인도와 주장을 확실하게 받고 있다는 증거가 됨을 알아야 한다. 말씀을 멀리하고 개인이 직접 신탁(神託, oracle)을 받는다는 엘리트 의식을 경계해야 하며, 신비적 현상에 치중하여 꿈이나 환상을 더 따르려는 성도들을 속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돌려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는 그 어느 것도 따라서는 안 된다.

4. 잘못된 회개(悔改) 관을 회개(悔改)하라
구약 성경에서 " "(슈-브)는 "회개하다" 시 7:12) "돌이켜 회개하다" (겔 18:30), 이며, 신약의 회개(悔改, repentance), 그리스 어로 Μετάνοια(메타노에아) ‘돌이키다’의 뜻을 함축하고 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해서 돌아서는 것, 그런 뜻이다..

도적질 하던 사람은 도적질을 그치고 손으로 구제할 것이 있게 열심히 일하는 것, 아내를 버린 사람은 아내에게 돌아가는 것, 이것이 참된 회개다. 회개는 전인격의 방향전환이다. 우리는 간음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용서해 주신 주님을 믿는다. ‘간음한 자도 주님의 눈에 불쌍히 여김을 받는다.’라고 믿는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실수한 것을 깨닫고 회개했으면 그 한 번으로 충분하다. 주님께서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용서해 주심과 동시에, 용서함을 받은 후에 취해야 할 자세를 지시해 주셨음을 기억해야 한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Neither do I condemn you go and sin no more.)” ( 3 :11) 이 말씀을 모든 죄와 회개에 그대로 적용시켜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성도들이, 여기서 앞부분만을 똑 떼서 남용을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 간음현장에서 잡힌 여인에게 “너를 정죄하지 아니한다.”하셨는데, 누가 나를 나무랄 수 있다는 말인가? 한 문장 안에서도 이렇게 자기의 입맛에 맞게 말씀을 마음대로 각색하는 것이다. 참된 회개란 전적 돌이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어떤 죄가 되었건, 한 번 회개했으면, 용서함을 받고 그 용서함 받은 죄를 두 번 다시 짓지 않는 것, 이것이 참된 회개이다.

성도(聖徒)가 죄를 지을 수 있다. 문제는 오늘 회개하고 돌아서서 그 죄를 짓고 내일 다시 회개하고 또 다시 같은 죄를 반복해서 짓고…이것은 회개가 아니란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의 목적이나 방법들이 하나님 앞에서 잘못된 것을 슬피 탄식하고 마음 아파하고 통회하고 돌이킨다고 하는 고백이, 고백적 행동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짐짓 죄로서 오히려 여호와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스런 것이다. 구약 성경에서 "회개(悔改)"라는 용어 표현은 오역을 합하여 불과 3번 언급되고 있지만 결코 "회개"의 요구가 경시되고 있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신약에서도 줄기차게 지적해 오는 것은, 성령의 사람은 행동 따로, 회개 따로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오늘 기독교가 세상으로부터 욕먹는 것은 바로 이 잘못된 회개(悔改)관 때문인 것을 깨닫고 회개(悔改)해야 한다.

이런 중요한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일부 몰지각한 목자들, 성도라 이름하는 이들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이 원수들로부터 심하게 훼방을 받고 있다. 현대 기독교가 x독 교라고까지 손가락질 받고, 모든 교회, 그 자체가 잘못된 듯 거세게 항의하는 소리가 드높고, 교회의 존속 그 자체마저 위협을 받고 있다. 그것도 다른 이들로부터가 아닌, 우리들 내부에서 거세게 항의하는 소리가 크고, 자중지란 (自中之亂), 좌충우돌하고 있다. 이것은 모두 자신의 설 자리를 알지 못하거나 알았다고 해도 그 선 자리의 귀중 성을 망각하고 주어진 자율성을 남용하는 악한 종들에 의해서 비롯된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우리는 비록 종이긴 하나 우리가 선 자리는 종으로서만이 아닌, 주인을 대신하는 자리란 점, 이런 우리들에게는 자율성과 타율성이 동시에 함께 주어졌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실수가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율성은 스스로 있는 것이 아니라, 타(창조주)에 의해 주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주어진 자율성을 너무 남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자율성은 언젠가는 거두어지게 될 것이고, 결국은 주인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미천하고 어리석고 죄 많은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밖에 없는 당신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고 그 생명과 맞바꾼 생명, 이토록 귀한 우리가 또 이렇게 허망하게 무너져 내려서야 하겠는가? "진실과 정직 실종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그대와 나, 이제 돌아가자. 가슴을 찢고 여호와 우리 주께로 돌아가는 길만이 나와 내 자녀가 사는 길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저희는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서 내게 패역을 행하였느니라."( 호 6: 1, 3, 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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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태 
2013-02-11 09:29
 112.xxx.171
 유명한 설교자의 명설교보다도 더 은혜로운, 강한 깨달음과 성찰이 있는 메세지, 별사모님의 칼럼을 제 방으로 가져갑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샬롬.

기자석 
2013-02-13 15:43
 65.xxx.228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미천하고 어리석고 죄 많은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밖에 없는 당신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고 그 생명과 맞바꾼 생명, 이토록 귀한 우리가 또 이렇게 허망하게 무너져 내려서야 하겠는가? "진실과 정직 실종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그대와 나, 이제 돌아가자. 가슴을 찢고 여호와 우리 주께로 돌아가는 길만이 나와 내 자녀가 사는 길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
 
짐보 
2013-02-12 14:16
 207.xxx.36
 '진실과 정직 실종 시대를 넘어...'
제목을 읽다 든 생각...이심전심 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알고 보면(교제)글도 같아 지는 지
 우연인지 그럴수가.
인애...

 '사랑하는 이여 주께로 가자 
금색 청색 자색 홍백실로 고운 헌신을 짜서
 인애와 진리로 동여 묶고서
 의와 화평을 공고히 하여
 주의 길을 닦으러 가자'
라는 자유계시판에 올린 글과 일맥상통 한 글 입니다.
옳습니다.
주의 길을 딱으러 가야 겠습니다.
 
기다림... 
2013-02-10 22:29
 119.xxx.197
 구구절절 옳은 말씀, 훌륭한 예시 감사 드립니다. 참 귀한 은사 받으셨습니다 :)

한국은 구정이라 정신없는 시간이었는데... 사모님이 계신 곳은 어떠셨는지요?

C.S루이스의 예시를 보니, 저 역시 예전에 은혜받은 부분이 생각납니다. 정확한 원문은 생각나지 않으나, 인간은 '어머니의 환상'을 만들어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고, 실제 부모님을 무시하면서.... 기도를 할 때나, 부모님과 함께 지내지 않을 때 '후회하는 척', '행동하는 척'을 하며 자신의 회개하는 마음과 책임지려는 마음을 회피한다고...

제 스스로 기도는 열심히하였지만, 실제 부모님께 무심했던 부분이 많아 눈물로 회개한 부분이었습니다. 참 부끄러웠지요...

 "무슨 영", "무슨 영"이니... 하는 각종 '영'을 만들어 놓고, 인간의 책임을 회피하며 그 '영'의 탓이라 돌리는 인간의 죄성과 거짓된 가르침을 지적해 주셨지요...

죄의 책임은 자기 자신인데... 스스로 주님 앞에 자복하고 회개해야 하는데... 그리고 사모님께서 지적해주셨듯, 진정어린 회개는 너무나 당연한 열매로 그 잘못된 행동의 반복성이 끊기는 것인데...

 "신학은 학문일뿐이다...", "복음이란 각각 사람에게 조명해 주시는 것이다"라는 주장 속에... 사도로부터 그 수 많은 믿음의 선조들의 피값으로 전해진 '복음'.... 그 귀한 말씀을 수호해 온 초대교회와 2000년 역사의 정통교회의 교리들을 깡그리 무시하는 그 무시무시한 교만들이 있지요...

정말 호세아 말씀처럼 우리는 "여호와를 힘써" 알아야 합니다.

주의 평화 :)
 
 
  기다림... 
수 많은 핍박과 힘든 사역 중에... 아멘넷을 또 하나의 선교 현장으로 품고 섬기고 계신 귀한 분께 결례를 범해 참 마음이 아픕니다.
저를 탓하지 않고, 오히려 감사와 기쁨으로 맞아주심에 고맙습니다.
그 글의 댓글에서도 언급했지만... 모든 장애인의 부모는 장애를 갖고 있듯, 저 역시 저의 장애 중 한 부분이 인터콥 문제입니다.
최근 욥기를 묵상하였습니다. 어느 순간 주님의 자리에 앉아있던 욥의 교만을 제 모습에서 발견했습니다.
주 앞에 죄를 지었고, 귀한 별 사모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 번 사과 드리고, 제 혈기를 귀엽게 봐 주심에 감사 드립니다.
송편을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주님 앞에서 뵙기 전에, 이 땅에서의 인연도 허락해 주시길 바랍니다. 떡국 대접하고 싶습니다 :) 2/11 09:35
 119.xxx.109
 
허참 
2013-02-10 16:17
 69.xxx.32
 세상을 바라보면 실망할 수 밖에 없고, 절망할 수 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현대의 지상교회도 문제가 많아서 오죽하면, 한 목사님은 "큰 교회가 망하여야, 한국교회가 산다"고 하셨을까?

실제로 현실은 사랑이 메마르고, 평강이 없고, 기쁨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겉으로 보기에는 평화롭지만, 결혼과 가정과 사업과 교회에서 내면적인 갈등은 없는지요? 평강은 갈등의 부재가 아닙니다. 참된 평강은 그리스도 앞에서 가질 수 있습니다. 사실 "마음의 평강은 그리스도의 심령을 통하여 오는 것입니다."

별똥별님의 칼럼은 빌립보서 1:9-11 말씀의 사도 바울의 기도를 떠올리게 합니다. 모범적인 훌륭한 글입니다. ^^*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빌 1:9-11)

 "진실과 정직 실종시대를 넘어", 개신교의 모순과 갈등을 열정과 행동으로 도전하는 크리스챤들이 다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믿음은 
2013-02-10 05:03
 119.xxx.99
 아멘..
믿지 않는 사람들도 진실, 정직, 양심 등을 귀하게 여기는데 하물며
 하나님을 믿는 크리스챤들, 특히 목회자들이 정직해야 하는 것은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기본 덕목 중에 하나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십계명에도 “네 이웃에 거짓증거하지 말라.”고 말씀하셨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정직과 진실이며, “거짓 입술은 여호와께 미움을 받아도 진실하게 행하는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느니라.”(잠 12:22)라는 성경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진실함에 기뻐하십니다.

우리를 정직하지 못하게 하는 것도 마귀의 궤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개신교 교회 내에서 우후죽순처럼 일어나는 여러 종류의 교회의 타락사건들과 보이지 않게 뒤에서 양심을 저버리고 불신자들보다 못한 행동들을 일삼는 것들을 보면 개탄스럽고, 개신교 교인으로서 불신자들이나 타교도인을 대하기가 정말 민망하기 그지없습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별똥별님께서 “진실과 정직 실종 시대를 넘어“라는 주제의 검과 같은 말씀이, 정직과 양심을 저버리고 행동들을 하고 있는 떳떳치 못한 목회자들에게 찔림의 말씀이 되어 그들이 회개 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별똥별님께서 이곳에 틈틈이 올리시는 말씀들은 마음이 흐트러진, 헤이해진 우리들에게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는 귀한 말씀으로 전해져 우리의 신앙을 돌아볼 수 있는 좋은 본이 되고 있습니다.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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