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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은 빌면 소원을 들어주는 착한 귀신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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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16-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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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력에서 여러 절기 중 성령 강림절이 가장 깁니다. 5월 중순부터 11월 말까지가 성령강림절입니다. 장로교회에서는 6개월이 넘는 성령강림절을 창조절과 왕국절로 나누어 지키려는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종교 개혁 이후 성일은 거의 폐지되었고 절기를 지키는 교회도 많지 않습니다. 어쨌거나 다른 절기보다 성령강림절이 긴 것은 나름 성령에 대한 필요가 그만큼 절실하고 크기 때문이라 볼 수도 있습니다. 장로교회는 침례교회나 오순절 교회에 비해 성령을 강조하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70년대 이후 제3의 물결 등 은사주의 운동이나 교회 성장과 선교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성령에 대한 관심에 교파적 특색이나 차이가 사라졌습니다. 거의 모든 교회들이 성령을 강조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령을 강조하는 거의 모든 교회들의 성령에 대한 이해와 강조가 은사주의 운동을 주도하는 교회들과 비슷해졌습니다.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고 약속하신 성령께서 오셨습니다. 성령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의 부분적 성취입니다. 종말을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 백성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성령을 의지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성령의 인도를 받고 성령을 의지하여 사는 것은 성령에 대한 바른 이해를 통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바른 성령론이 강조되어야 합니다.

성령이 어떤 분인지 이론적으로 설명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영이기 때문에 인간의 이성이나 오감으로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많은 신학자들이 성령에 대해 글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성령이 어떤 분인지에 대한 논의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성령에 대한 논의는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 될 것입니다. 성령에 대해 아무리 잘 설명을 해도 성령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고대 구리거울로 얼굴을 보는 것처럼 희미할 뿐이고 주님 다시 오실 때에는 얼굴을 마주 보는 것처럼 분명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삼위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부분적일지라도 그릇된 설명을 분별하는 것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로서 그 책임을 맡고 있기 때문에 삼위 하나님에 대한 논의를 계속해 오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에 대한 공부와 이해도 삼위일체의 신학적 관점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전통 교회는 성령을 하나님으로 봅니다. 삼위일체란 아버지로서의 하나님, 아들로서의 하나님, 영으로서의 하나님이 한 분이라고 설명합니다. 신학자들은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이 본질적으로 동일하나 위격으로 분리된다고 보았습니다. 이런 존재가 어떻게 가능하고, 그런 설명이 순전히 관념적인 것처럼 생각되지만 초월적인 하나님에 대해 인간의 논리적 설명이 갖는 한계 때문에 그렇게 설명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성령론에 대한 중요한 사건은, 성령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는지, 아니면 ‘그리고 아들로부터’(필리오 케) 왔는지에 대한 서방교회와 동방교회의 충돌입니다. 동방 교회는 성령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보았고 서방교회는 거기에다 ‘그리고 아들로부터’를 삽입하여 이해하였습니다. 동, 서방의 교회는 이 문제로 지금까지도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는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바로 알고 믿는 것이 성령을 받은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영으로서 성령의 역할은 예수님에게 일어난 일을 알게 하고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았는지 아닌지, 성령에 충만한지 아닌지를 알려면 예수님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지를 보면 됩니다. 성령을 강조하는 대부분의 교회들은 성령 충만을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하고 병을 고치고 신비한 체험을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 것도 성령 충만한 것의 증거들일 수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성령 충만의 증거들일 수도 있다고 하는 것은 아닐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사실은 성령 충만의 핵심은 어떤 능력이나 신비로운 체험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일어난 십자가와 부활을 이해하고 믿고 그 일에 심취하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모든 관심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귀결됩니다. 그 외의 것에는 별 관심조차 없습니다. 시(詩)에 미친 사람은 시적 영감에 사로 잡혀 온통 시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것과 같습니다. 골프에 미친 사람이 온통 골프에만 정신이 빼앗기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것에 미친 사람들은 그 어떤 것 때문에 다른 것에 대한 관심은 자연히 줄어듭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온통 모든 것을 그 사랑하는 사람과 관련 지어 생각하게 됩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저절로 사랑하는 사람의 모든 것에 집중하게 됩니다. 여행을 해도,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옷을 사거나 자동차를 사거나 집을 사거나 산책을 하거나 무엇을 해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집중하는 것처럼 성령 충만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 즉 복음과 관련 지어 생각하고 계획하고 행동합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문제는 예수님께 대한 뜨거운 열정이 계속 유지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결혼 생활에서 연애감정이 계속 지속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아주 특별한 경우에는 죽을 때까지 뜨거운 연애감정을 유지하는 경우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경우가 절대 있을 수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그 뜨거움과 열정은 식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뜨거운 열정으로 신앙생활 하던 사람들도 시간이 지나면 예수님께 대한 관심은 줄어들고 그 대신 교회생활에 대한 관심이 늘어납니다. 장로, 권사, 집사가 되고, 예배당 짓고, 단기 선교 가고, 성경공부에 참여하고, 기도회에 참여하고, 교회에서 하는 바자회 같은데 열심히 참여하는 데 온통 관심을 집중합니다. 그런 것들 자체가 잘못 된 것이라든가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이 자기중심적으로 변하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장로가 되든지 권사나 집사가 되든지 선교나 봉사나 기도회나 찬양이나 모든 교회 활동이 시간이 지나면서 자기중심적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모든 관심과 활동에 예수 그리스도가 제외 됩니다. 그런 상황이 지속되면 그 모든 교회 활동에 예수 그리스도가 제외되는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싫어하시는 일까지 서슴지 않게 됩니다. 현실적으로 이런 상황에 처한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많습니다.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어도 그렇게 변하면 성령께서 떠나신 것입니다. 교회에서 이런 저런 봉사의 일을 할 때 예수님에 대한 관심으로 하는지 아니면 사람들에게 돋보이고 인정받고 자기만족의 집착에서 하는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이런 문제를 지적 받으면 당당히 예수님을 내세웁니다. 기독교 역사를 돌아보면 예수님을 빙자해서 온갖 악한 일도 다 했습니다. 십자군 정쟁, 마녀재판, 성직 매매, 면죄부 판매, 성지순례, 교회 안의 싸움 등 모든 악행이 다 예수님에 대한 충성이라고 정당화 되었습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입니다. “진리”라는 말의 헬라어는 알레떼이아 ἀλήθεια입니다. 이 단어에는 숨겨진 것을 드러낸다는 뜻이 있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계시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성령 충만한 사람은 자연히 성경의 진리를 드러내게 됩니다. 반대로 진리를 거스르고 감추고 왜곡하는 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그런 일이 있다면 성령을 떠난 행동입니다. 성령이 진리의 영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영이라는 뜻입니다. 사도 요한은 성령을 가리키는 보혜사가 곧 예수님이라고 하였습니다(요일 2:1). 예수님께서는 진리이시고 진리는 하나님을 계시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이루어 가십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성령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역사적 실존 인물로서의 예수님께서는 지금 이 세상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 사실이 초대 교회 성도들을 고아처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역사적 인물로서 계시지 않으시는 예수님께서 다른 방식으로 이 세상에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라는 예수님의 약속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줍니다. 그 다른 방식이 바로 성령의 활동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성령을 어떻게 경험하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성령님이 예수님의 영이라는 사실이 강조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역과 관련해서 볼 때 성령은 ‘살리는 영’입니다. 신구약 성경이 성령을 그렇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부활을 일으키는 것도 성령께서 하신 일입니다. 사람이 생명을 얻는 것, 진리를 깨닫는 것, 새로운 발명이나 문명의 진보도 모두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성경은 성령을 생명활동을 하시는 분으로 설명합니다. 생명활동은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을 지향합니다. 교회가 마치 성령을 독점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성령을 왜곡하는 것이고 성령의 생명활동을 축소시키는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성령의 생명활동은 창조에서 구속의 완성에 이르는 원대한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은 그 일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천지만물의 창조와 섭리와 구속과 모든 역사는 하나님께서 주도하시고 계십니다. 인간은 성령의 인도를 따라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여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순종함으로 참여합니다. 인간이 어떤 일을 계획하고 진행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그 일은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성령은 인간의 어떤 실패와 역부족을 만회하기 위해 필요에 따라 불러 사용하는 착한 귀신이 아닙니다. 민간 신앙에서나 우상종교에서 귀신이나 우상을 사람이 부리는 것처럼 성령을 부리는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심각한 성령 왜곡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이르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베드로가 이르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행 8:18-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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