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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혈연관계를 넘어 언약공동체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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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16-05-18

본문

5월을 가정의 달이라고 하는데, 이는 5월에 가정과 관련된 기념일이 많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국에서 5월 5일은 어린이 날, 5월 8일은 어버이 날, 5월11일은 입양의 날, 5월 21일은 부부의 날로 지킵니다. 그 외에 5월 1일은 근로자의 날, 5월 15일은 스승의 날, 5월20일은 성년의 날입니다.

가정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지만, 무엇이든지 그 중요성을 강조할 때는 바른 이해의 토대와 지향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가정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세상이나 교회나 구별이 없습니다. 가정의 중요성은 보편적 가치이기 때문에 그 중요성을 강조 함에서는 세상과 교회가 다를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가정에 대한 이해는 세상과 교회가 같지 않습니다. 세상이 가정의 중요성을 강조하듯 교회도 가정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어린이 주일이나 어버이 주일을 제정하여 지키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보편 가치를 보존하고 고양하는 일에 힘쓰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교회는 보편 가치도 특별 계시의 토대 위에서 이해하고 강조해야 합니다.

어린이 주일과 어버이 주일은 교회력으로 하면 부활절에 해당됩니다. 종교개혁 이후에는 성일과 절기의 폐단을 우려해 교회력을 지키지 않는 교회들이 많지만 교회력은 긍정적인 면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교회력에 따른 설교를 하면 성경의 중요한 내용을 중심으로 설교할 수 있어서 매우 유익합니다. 성일이나 절기의 폐단을 우려해 교회력을 지키지 않던 개혁교회가 어린이 주일이나 어버이 주일, 또는 선교 주일이나 환경주일 같은 것을 제정하여 지키는 것은 넌센스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주일”앞에 그 어떤 다른 이름을 붙이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어떤 중요한 것을 강조하려면 교육을 통해 하면 되고, 강조해야 하는 것이 아무리 중요한 것이라도 “ㅇㅇ주일”과 같은 방법으로 하는 것은 주일을 수단화 하는 부작용을 낳을 수 있습니다.

이 글에서 이야기 하려고 하는 주제는 언약 공동체로서의 가정인데, 서론이 길어졌습니다. 5월을 가정의 달로 정하여 가정의 소중함을 강조하는 것과 “ㅇㅇ주일”라고 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일반적인 날이나 달이나 해에 무엇을 강조하기 위해 이름을 붙이는 것을 문제 삼을 필요까지 없지만 주일에 무슨 다른 이름을 붙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다만 5월이 가정의 달이고 교회와 세상이 다 가정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때에 성경이 가르치는 가정과 가족에 대하여 생각해 보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가정은 하나님께서 제일 처음 만드신 제도입니다. 교회가 하나님께서 처음 만드신 가정, 가족에 대해 배우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세속화 되어도 가정의 중요성은 무시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 백성의 가족을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차원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언약과 관련해서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즉 성경이 가르치는 가족은 단순히 혈연적 공동체가 아니고 언약공동체입니다. 그렇다고 성경이 가족의 혈연적 관계를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족의 혈연적 관계를 무시하는 것도 치명적이지만 언약적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더욱 치명입니다. 가족의 혈연적 관계나 언약적 관계는 상호 깊은 관련성이 있기 때문에 어느 것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천년 로마가 무너지게 되는 원인을 게르만족의 침입, 중앙집권체제의 해체, 기독교의 영향 등과 같은 정치적, 종교적 요인들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제국 쇠망사'라는 그의 저서에서 로마제국이 멸망한 것은 가정의 굴뚝에서 연기가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여 제국의 몰락이 경제적으로 가정이 붕괴됨에서 비롯됐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굴뚝에서 연기가 사라졌다는 것은 가정에서 음식을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고, 음식을 만들지 않는 다는 것은 가족이 한 식탁에 둘러앉는 일이 없어졌다는 것인데, 가정의 독특한 식탁문화야 말로 건전한 가정의 요건이라는 견해가 인상적입니다. 로마에 지배 받던 유대인 가정에서는 온 가족이 반드시 식사는 함께 하는 전통을 지켰고 로마인들은 가족이 함께 식사하는 소중한 전통을 점점 무시하게 되었다는데, 현대인들의 가정에서 음식을 만들고 온 가족이 함께 식사하는 전통이 점점 사라지는 것은 예사롭게 볼 일이 아닌 듯합니다.

당시 로마의 가족들은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조세부담을 과중하게 떠안고 있었고 화폐가치의 하락에 따른 소득감소로 가계의 재정은 피폐화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재정적 부담이 로마의 가정을 피폐하게 한 것이 아니라 여자를 성적인 놀이 대상으로만 여긴 도덕 부재의 쾌락추구가 난잡한 남녀 혼탕과 같은 문화를 만들어 시민의 가정들을 더욱 급속히 붕괴하게 하였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가정의 중요성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을 만큼 어느 사회에서나 인정하는 것이고 국민경제와 정치 사회의 도덕적 불의도 가정과 깊은 관련이 있음은 고금(古今)에서 그 증거를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한국의 전직 대통령들의 부패의 많은 부분은 가족과 관련이 있음을 온 국민들이 보았습니다. 세습이나 재정 비리로 곤욕을 지르고 있는 몇몇 큰 교회 목사님들의 가정에서는 가족의 혈연적 관계와 언약 관계 모두가 무시되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가족의 혈연관계가 언약관계로 승화되지 못한 데서 목회자의 비리와 문제 교인들의 그릇된 집단적 행동이 나오는 것입니다. 세상 정치 지도자나 교회 지도자의 비리도 진리나 객관적 사실에 대한 정직하고 바른 판단에서가 아니라 가족이나 친인척, 나아가서는 세속적 인맥이나 유대관계의 이기심에서 비롯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아합 왕은 이방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이므로 결국 이방 신을 받아들여 하나님의 선지자를 박해하였으며, 이방의 세속적 가치관에 물들어 탐심을 절제하지 못해 가난한 백성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고 음모를 꾸며 그를 살해하였습니다. 왕이 이방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인 것이 원인이 되어 온 나라가 종교적으로 정치적으로 윤리적으로 돌이킬 수 없이 타락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세계 많은 나라와 민족 중에 따로 구별된 삶을 살도록 부름을 받은 민족입니다. 그들이 구별된 민족으로 살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특별한 법을 주셨고 지리적으로도 구별된 약속의 땅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별하신 것은 일체 다른 민족들과의 접촉을 피하여 살도록 하심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볼 때 이스라엘은 세계 여러 민족을 위한 이스라엘이었기 때문에 열방 가운데서 살도록 부름 받은 것입니다. 비록 그들의 나라 경계가 팔레스타인에 한정되지만 그 지역은 지정학적으로 이미 고대 문명을 이루고 있던 나일 강 문명과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서로 교차하는 곳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전 역사에서 이 큰 고대의 두 문명의 영향은 밀물과 썰물처럼 팔레스타인 지역에 밀려들었다 빠져나갔다를 반복하였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사회와 가정이 이방의 민족들과 공유했던 문화와 사회의 규범들은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믿음이 그러한 문화적 삶의 영역과 어떻게 연결되고 있으며 또한 어떻게 상호 작용하였는가 하는 점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오늘날은 개인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지만 고대에는 개인보다는 가정이 중요했습니다. 개인의 행동은 개인의 행동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곧 그 가문과 깊이 연결되어 있어서 개인의 선행은 가문의 영예가 되고 개인의 범죄는 가문의 패망이 되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고대 이스라엘은 가치관이나 윤리의식이나 문화적으로 한국과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복음과 문화 사이의 관계에서 성경적으로 대응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 문제는 너무 복잡하기 때문에 단순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 될 수가 있습니다. 경제 문제가 그렇고, 동성결혼 문제도 그렇고, 자살 문제도 그렇고, 이혼 문제도 결코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이러한 제 문제에 대하여 우리는 성경에서 배척과 금지와 허용하의 묵인을 함께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이방 문화가 하나님께 혐오스러운 것으로 금지되었지만 이스라엘은 언제나 그런 것으로부터 깨끗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같은 이스라엘의 상황은 오늘 우리의 상황과 같습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일부다처, 이혼, 노예제도 같은 것은 허용이지 장려사항이 아니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허용이란 더 나쁘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건부 관용일 뿐 언젠가는 극복되고 개혁되어야 할 대상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적극적으로 성경적 가족이라든가 가정에 대한 좋은 모델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사실이 매우 중요한 메시지가 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구원에 대하여 개인적으로도 우리가 바라보고 따를 모델이 없다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많은 목사님들이 “아브라함을 본받자"라는 식으로 메시지를 전하지만, 어떤 사람의 훌륭한 면이나 교훈은 본받을 수 있어도 한 사람의 모든 것을 본받는 것은 위험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온전한 사람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약 공동체로서의 가족에 대해서도 어떤 적합한 모델을 통해서 배우기보다는 비판적 대상들에서 성경적 가족에 대하여 배우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네 어머니의 아들 곧 네 형제나 네 자녀나 네 품의 아내나 너와 생명을 함께 하는 친구가 가만히 너를 꾀어 이르기를 너와 네 조상들이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 곧 네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민족 혹 네게서 가깝든지 네게서 멀든지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에 있는 민족의 신들을 우리가 가서 섬기자 할지라도 너는 그를 따르지 말며 듣지 말며 긍휼히 여기지 말며 애석히 여기지 말며 덮어 숨기지 말고 너는 용서 없이 그를 죽이되 죽일 때에 네가 먼저 그에게 손을 대고 후에 뭇 백성이 손을 대라.” - 신명기 13:6-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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