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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관계 대상에 대한 신뢰의 반응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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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2016-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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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공화당 대선 경선 후보 도널드 트럼프의 인기에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 합니다. 전문가들 조차 고개를 갸우뚱 하며 반짝 인기일거라고 하였지만 그렇지 않다는 쪽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의 막말은 미국의 정신과 민주주의의 정신, 나아가서 인류 보편 가치를 완전히 짓밟는 망언이지만 인기가 수그러들 줄 모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우째 이런 일이...’라고 하지만 트럼프의 인기는 우리에게 정치와 타락한 인간의 민 낯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치가 얼마나 이기적인 게임인지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알면서도 속는 것이 정치입니다. 서로 속이고 속는 정치 게임에서 그래도 유권자들은 덜 나쁜 편을 선택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믿고 신뢰해서 어떤 후보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나쁜 사람들 중에서 조금이라도 덜 나쁜 후보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유권자가 그렇게 선택하는 것이 유권자 자신도 덜 나쁜 유권자가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의 종주국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의 유권자들이 얼마나 이기적인가를 트럼프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영웅이나 위대한 지도자가 등장하기를 기대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정의나 사랑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유대인들의 메시야 대망 사상도 그들의 민족주의와 이기주의를 극복하지 못하여 오늘의 정치적 수준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의 기대는 인간 지도자 뿐 아니라 과학 기술이나 자본에 대해서도 이기심과 타락한 본성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트럼프가 훌륭한 지도자가 될 수 없듯이 과학이나 자본도 생명과 자유와 평화를 보장하지 못합니다. 정치가 아무리 발전하고 사회보장이 아무리 잘 되어도 인간은 병들고 불행하고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 문제 해결을 접근합니다. 우리가 믿고 기대하는 메시야는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는 메시야가 아니라 생물학적 호흡을 하지 않고 사는 새로운 생명, 즉 부활의 생명을 약속합니다. 부활의 몸에는 바이러스나 세균이 절대 기생하거나 생존할 수 없을 것이고, 혹시 기생한다고 해도 절대로 해를 끼칠 수 없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런 메시야가 자기들의 눈앞에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기껏 정치적 메시야를 기대하며 예수님께 당신이 바로 그렇게 할 수 있는 메시야냐고 물었던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 그리스도인을 향하여 질문합니다. “당신들이 믿는 예수가 메시야 인지, 그렇다면 증거를 대라.”는 것입니다. 신앙 간증을 하는 분들은 나름대로 그러한 요구에 대답을 합니다. 병을 고쳤고, 사업에 성공했고, 기도에 응답을 받은 사실들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그런 간증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정도는 기독교 신앙 없이도 얼마든지 성취할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인간의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당신이 자기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그런 메시야인지를 물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그러한 질문에 즉답을 피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내가 그리스도다.”라고 대답하셨다면 그들의 왜곡된 메시야 사상을 더욱 고착시키게 되는 결과를 낳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 가운데는 당신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이 충분히 드러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과 하나이고, 메시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을 듣고 유대인들은 돌로 예수님을 치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신성모독 죄를 범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결국 유대인들의 그러한 오해와 분노에 의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유대인들에 대하여 히틀러처럼 예수님을 죽인 놈들이라고 정죄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못하는 유대인들로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 정당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볼 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모독한 용서 받을 수 없는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2천년 역사에서 신실한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당할 때 언제나 돌을 들어 치려고 했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진리 논쟁에서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참 신자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일까요? 문제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믿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다면 돌로 치려고 할 리가 없습니다. 믿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실 유대인들이 요구한 것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라는 증거를 대라는 것입니다. 증거는 실체가 확실하지 않을 때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증거는 중요합니다. 증거는 실체를 가리키기 때문에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증거보다 중요한 것은 실체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실체이시고 본질이십니다. 누군가 그랬습니다.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는데 달을 쳐다보지 않고 손가락만 쳐다본다고....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지 않으면 달을 볼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것은 손가락이 아니라 달입니다.

증거가 아무리 중요해도 증거가 가리키는 본질, 실체이신 예수님이 중요합니다. 증거를 많이 본다고 실체를 저절로 아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이 말은 표적 즉 증거를 많이 본다고 본질, 즉 실체를 알고 믿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수없이 많이 보았지만 하나님을 믿지 못하였습니다. 유대인만 그러는 게 아닙니다. 우리도 자연의 신비를 아무리 많이 봐도 마음에 감동이 없고 믿음이 생기지도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직접 대면하면서도 믿을 수 없었습니다. 다 같이 예수님을 보고 그분의 말씀을 들었지만 누구는 믿고 누구는 믿지 못합니다. 바로 여기에 비밀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믿지 못하고 자기들의 눈으로 그리스도를 직접 보고도 믿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그리스도 증거를 믿지 않았습니다. 아니,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 믿지 못했을까요? 예수님께서 그 이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성경에 양과 목자의 비유가 나오는데, 이 비유에서 강조하는 것은, 양은 목자에게 자기의 운명을 맡기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목자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목자와 양의 특별한 관계가 강조하는 것은 전적인 신뢰 관계입니다. 믿음은 이런 관계에서만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못하는 것이 존재론적인 문제가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못하는 것이 그들의 책임이 아닌 것이 되고 맙니다. 상식적으로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내가 노력해서 믿을 수 있는 것이라면 믿지 않는 것이 나의 책임이지만 그렇지 않고 존재론적인 문제 즉 관계의 문제라면 책임이 아니라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래서 칼빈의 이중예정론이 사람들에게 비판을 받습니다. 이중예정론이란 하나님께서 구원할 자와 구원에서 배제될 자를 미리 예정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말이 안 되니까 비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예정은 인간 역사의 어느 과거의 시점에서 결정된 것이 아니고 시간과 논리가 생기기 전에 결정된 일입니다. 그러한 신비를 논리와 시간의 개념 안에서 이해하려고 할 때 자연히 무리가 따르는 것입니다. 유대인을 향하여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내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한 것은 단순히 논리적으로 생각해서 어떤 부류의 사람들을 배제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행위가 신비로울 정도로 심오하고 심층적인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어떤 논리로도 설명할 수 없지만 우리가 일상에서도 경험하는 일입니다. 즉 믿음은 강요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지식이 많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부모 자식 간에도 부부 간에도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은 은총이고 신비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오늘날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는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사명을 고취시키고 있습니다. 그럴 열정과 능력이 없으면 무능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주님의 양인지 아닌지 돌아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양이라는 존재에 대한 인식과 처신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데 온통 모든 관심과 행동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고 나의 목자라는 증거는 밖에 있는 게 아니라 내 안에 있습니다.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고 따라가는 양은 날마다 목자를 생명으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딴 생각하고 엉뚱한 일에 마음을 빼앗겨 목자의 음성을 듣지 못하거나 듣지 않고 딴 길로 가는 일이 없도록 기도하고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믿음은 심리적인 자기 확신이 아니라 목자와의 깊고 밀접한 관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요 10:26,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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