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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믿음의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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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16-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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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은 종교 개혁의 나라요 걸출한 철학자를 많이 배출한 나라입니다. 신앙적인 면에서나 지성적인 면에서나 상당한 수준에까지 이른 나라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나라가 1, 2차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전쟁을 좋아하는 나라라는 비난을 받게 되었고 그로 인해 국가적으로나 민족적으로 큰 타격을 입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정치적으로 해결하려 한 것이 나치당의 출현입니다. 나치는 처음에 교회와 손을 잡는 제스처를 취했지만 얼마 있지 않아 곧 숨긴 발톱을 드러내어 교회를 회유하고 박해하여 나치 정권을 위한 도구로 전락시켰습니다. 교회는 교회대로 나치에 이용당했고 철학도 철저하게 나치에 이용당했습니다. 그래도 나치에 저항하는 철학자도 있었고, 기독교 신학자도 있었습니다. 정면으로 저항하다가 불이익을 당한 철학자도 있고 정면으로 저항하다가 순교한 신학자도 있습니다. 나치에 저항하였지만 정면으로 저항하지 않고 나치의 교활함과 만행을 피하거나 우회적으로 저항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정면으로 도전하고 저항하다가 순교한 이들도 위대하지만 불 같은 박해를 지혜롭게 피하는 것도 필요하였습니다. 일부러 순교할 필요는 없습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한 때는 적극적으로 순교하려고 했던 때도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박해를 피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부딪쳐 순교자가 된 이들도 많습니다. 그런 것을 바람직한 태도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독일의 철학자 가다머는 나치에 비협조적이라는 이유로 번번이 교수에 임용되지 못하는 불이익을 당하였습니다. 그도 결국에는 나치에 협조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저돌적으로 저항하지 않고 언제나 ‘학자적 방식’으로 저항하였습니다. 논문 제목을 "철학자는 자기 시대 이념에 동의하지 않는다."라고 한다든지, 현실 정치에 대한 의견을 질문 받으면 “나는 최소한 이천 년 이상 된 책들만 읽고 있기 때문에...”라고 논점을 피해갔다고 합니다. 다행스럽게도 나치의 권력자들은 대 철학자의 학자적 비아냥거림을 간파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가르칠 때 많은 비유를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비유가 아니고는 설명이 안 되는 면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들어도 무슨 뜻인지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비유로 말씀하신다고 하셨습니다(마 13:13-14, 막 4:9-12 ). 이것은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시는 주님의 지혜로운 방법입니다. 주님께서는 많은 비유와 은유를 사용하셔서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시곤 하셨습니다. 진리를 위하고 바른 믿음으로 사는 것에 반대하고 핍박하는 자들에게 무조건 저돌적으로 대항하는 것만이 아님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는 다른 성경에 비해 일상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용어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보좌, 생물들, 천사의 음성,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 용, 신화에나 등장하는 괴물 같은 것들이 등장하고 활동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성경을 믿는 우리들은 이러한 상징들에서 하나님의 계시와 생명과 진리의 복음을 발견하지만 성경을 믿지 않는 이들은 당연히 신화적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신 이유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이해시키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이유는 듣고 보아도 깨닫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것은 예수님과 복음을 반대하는 자들에게 빌미를 줄 필요가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요한계시록이 이상한 존재나 광경을 설정하는 것도 초월적 계시의 신비 때문이기도 하지만 기독교를 반대하는 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자들에게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일제에 저항했던 시인 이상화는 그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1926)라는 시에서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들은 조국이고 봄은 자유와 생명입니다. 윤동주는 일제 식민지하의 정신적 고뇌와 아픔을 '참회록(懺悔錄)'이라는 시를 통해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어 있는 것은/ 어느 왕조(王朝)의 유물(遺物)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라고 하였는데, 일제에 저항하는 자신을 그렇게 묘사하였습니다. 병자호란 당시 예조판서로 있던 청음 김상헌(1579~1612)은 청나라로 잡혀가면서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하여라.”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삼각산과 한강수는 조선의 수도 한양을 상징합니다.

어려운 시대에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그리고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적들에게 저돌적으로 대항하고 저항하다가 목숨을 잃는 이들도 많았고 어떤 이들은 상징과 은유를 사용하여 적들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저항하기도 하였습니다.

초대교회가 처한 시대 상황은 로마가 지중해 연안을 지배하고 로마에 의해 기독교가 박해를 받던 상황이었습니다. 로마가 초강대국이 되자 황제들은 자신을 신격화 하여 제국 안에서 황제 숭배를 강요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로마는 “팍스 로마나”라는 평화 정책도 썼지만 그것도 결국은 황제 숭배의 통치 이념에 포함되는 것이었습니다. 로마 식민지 하의 어느 민족이나 종교도 적절한 선에서 황제 숭배를 통한 로마 통치 이념에 타협해야 소위 평화를 보장 받을 수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나라와 종교는 황제 숭배 이념에 적절하게 타협하였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것이 불가능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어떤 형태로든지 다른 신을 숭배하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로마 제국 안에서 황제 숭배에 동의하지 않고 살아남기란 불가능하였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그런 상황에서 살아남았습니다. 직접적으로 황제 숭배를 거부하다가 수많은 성도들이 순교하였지만 그래도 기독교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 편에서의 지혜로운 선택도 포함되는 것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상징적인 용어나 암호를 사용하여 박해자들의 눈을 피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 통치자들은 기독교가 황제 숭배를 거부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습니다. 유대인들이 고발하기도 했고 내부 고발 자들도 나왔습니다. 그렇게 되자 기독교인이라는 신분을 드러내고서는 그 사회에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숨어 살기 위한 땅굴 카타콤이 생겨나게 되었고 요한계시록 같이 상징으로 가득한 성경이 기록되기도 하였습니다.

요즘도 기독교를 상징하는 물고기 모양을 차에 달고 다니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 안에 익투스(ἰχθύς)라는 헬라어가 있습니다. 익투스라는 단어는 물고기라는 뜻입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이 물고기 그림이 기독교임을 알리는 암호였습니다. 물고기를 그린 사람의 뒤를 따라 가면 기독교인들이 숨어 사는 카타콤을 찾아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익투스는 Ιησους (예수), Χριστος (크리스토스), θεου(데우, 하나님의), Υιος(휘오스, 아들), Σωτηρ(소테르, 구원자)라는 단어의 첫 글자를 모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어부 출신이 많은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되기도 하여 물고기 그림이 곧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나의 구원자 이시다는 고백의 암호로 사용되었습니다. 이렇게 숨어서 암호를 사용하여 신앙을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박해가 불 같았던 시기에 요한계시록도 그렇게 암호와 같은 용어를 사용하여 장차 있을 일을 기록하였던 것입니다.

현대에는 반기독교 정서가 점점 팽배해 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이러한 현대 정신과 충돌하지 않고 적당히 타협하며 살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불신자들에게 환영 받는 교회가 되는 것을 구호로 내세우는 교회가 등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현대 정신과 타협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사사건건 저돌적으로 그들과 싸우는 것도 능사가 아닙니다. 어렵고 혼란한 때에는 믿음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는 것은 믿음도 아니고 지혜도 아닙니다. 역사를 지배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오래 참고 기다리는 지혜가 필요하며, 일상을 지배하는 인간의 욕망과 언제나 직면하는 절망이 지배하지 못하는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과 신비를 믿으며 그것이 제공하는 의와 생명의 풍성함을 맛보고 누리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믿음의 지혜입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너희 자녀들아 와서 내 말을 들으라. 내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법을 너희에게 가르치리로다. 생명을 사모하고 연수를 사랑하여 복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구뇨? 네 혀를 악에서 금하며 네 입술을 거짓말에서 금할지어다.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를지어다.” - 시 34:8-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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