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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의 단절 통해 하나님께 집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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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2016-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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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일상(日常)’이라는 용어가 가끔 담론의 주제가 되고 있습니다. 일상이란 사전적인 의미로 매일매일 반복되는 별 의미 없는 행위를 뜻합니다. 그러나 별 의미 없는 행위가 경우에 따라 또는 개인에 따라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되기도 하고 그야말로 진부한 일의 반복이 되기도 합니다. 현대인에게 일상은 과잉이 되고 의미는 희소하게 되는 현상이 육체와 정신을 병들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타자에 의해 자기 존재가 규정되도록 방임하여 자기를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것이 실존주의자들의 설명입니다. 일상의 과잉이 일상의 퇴락이라는 것도 비슷한 맥락의 설명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현대인들의 일상의 과잉을 분명히 예견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 규정되고 하나님께 의존적인 존재입니다. 성경은 인간이 자기 스스로가 자기의 중심이 되어 자기를 실현하려 하는 것을 죄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현대인의 일상의 과잉은 죄가 심화된 현상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관계 가운데서 하나님께 집중하여 사는 것보다 일상에 매몰되어 살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나님께서 6일 동안 만물을 만드신 후 이레 되는 날 쉬시면서 안식일로 규정하시고 사람들로 하여금 지키게 하셨습니다. 안식일에는 아무 노동도 하지 못하도록 엄히 금하셨습니다. 안식일 규정은 인간이 일상과의 단절을 통해 하나님께 집중하게 하신 것입니다. 일상의 과잉 가운데서 하나님께 집중하기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믿지 않는 불신자라도 일주일 중 하루를 쉬는 것이 좋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검증된 일입니다. 나는 어릴 때 고된 농사일 하지 않는 주일이 그렇게 좋았습니다. 지금에 와서 안식일은 단순히 쉬기 때문에 좋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배워가고 있습니다. 안식일은 단순히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집중하도록 하기 위해서 제정하신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입니다. 일상의 것들로부터 단절하고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이 예배이고 신앙이며 복입니다. 그렇다고 일상의 모든 것은 의미 없는 것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일상과의 단절을 통해 하나님께 집중하게 하신 것은 영원하지 못하고 지나가는 상대적인 것들에 집중하다가 낭패를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요즘 교회들이 예배 회복, 열린 예배 등에 관심이 많습니다. 문제의 본질과 방향은 잘 잡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예배가 무엇인지 깊이 있는 연구와 묵상이 뒤따르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와 인간의 타락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뜻을 풍성하게 잘 이해하지 못한 이론과 주장들이 대부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일상과의 단절을 통해 하나님께 집중하게 하신 안식일 가운데 들어 있는 예배와 신앙생활에 대한 교훈을 풀어내어 예배에 적용하거나 삶으로 살아내지 못하고 어떤 이들은 예배를 율법적으로 이해하고 어떤 이들은 예배를 세속화시키기도 합니다.

일상과의 단절은 누구나 결국 맞이하게 될 일입니다. 개인적인 죽음과 종말이 바로 그 단절입니다. 죽음은 이 세상의 모든 것들과의 단절입니다. 단절이란 말 그대로 끝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관계하고 소유하고 누리던 모든 것은 죽음으로서 끝이 납니다.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나 부부관계나 친구 관계나 지위와 계급이나 피부색이나 소위 스펙 같은 것도 모두 끝납니다. 모든 것이 끝나고 새로운 차원의 하나님 나라에서 살게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나 가족을 잃은 이들을 위로하기 위해 목사님들이 장례식 설교에서 천국에서 마치 이산가족이 만나듯이 다시 만나게 될 것처럼 설교하지만 사실은 천국에서의 만남은 그런 만남이 아닙니다. 나의 아내와 나의 아이들을 내 아내와 나의 아들딸로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천국에서의 만남을 기껏 이산가족 상봉 수준의 감격과 기쁨으로 생각하지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 나라에서는 이 땅에서의 성이나 관계나 희로애락과는 비교할 수 없는 차원의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 집중하게 하신 것은 그 나라를 바라보게 하신 것입니다. 그 나라를 바라보는 우리는 이 세상의 것들과의 단절을 아쉬워하거나 슬퍼할 필요가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어떤 의미에서 세상 것과의 단절의 연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상의 일, 즉 세상 것과의 단절을 가장 실감나게 가르쳐 주는 것이 죽음입니다. 누구나 세상 것들과 서서히 단절을 연습하다가 마지막 죽음에서 완전하게 단절하게 됩니다. 평소에 단절 연습을 잘 하면 마지막 단절 때 낭패감에 실망하지 않게 됩니다. 단절 연습을 잘 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더 나은 나라에 들어가면서도 낭패감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잘 죽는 것이 아닙니다. 잠언 기자가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낫다고 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 주신 교훈입니다.

우리는 초상집이나 중환자실에 가서야 죽음에 관해 잠시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사 중 죽음과 관련 없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죽음과 관련되어 있지만 아무도 늘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정상적인 삶의 자세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죽음에 대해 관심을 갖는 이들이 하나 둘 늘어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동안 죽음을 언젠가 누구라도 맞닥뜨릴 문제로 취급해 왔습니다. 그러나 죽음이란 미래에 맞닥뜨릴 어떤 문제가 아니라 모든 이들의 일상과 맞닿아 있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사랑해야 할 아내와 남편과 자녀와 부모는 살아 있을 동안에만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죽게 되면 더 이상 내 아내, 내 남편, 내 자녀, 내 부모가 아닙니다. 죽은 자를 위한 살아 있는 자들의 일은 죽은 자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고 살아 있는 자신들에게 필요해서 하는 것뿐입니다.

지금 나와 관계 된 모든 것이 끝나는 그 때를 기대하고 소망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바울은 “... 자 같이...”하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제시하는 항목은 다섯 가지입니다. 첫째,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둘째,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셋째,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넷째,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다섯째,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다섯 가지를 이야기 했지만 이 다섯 가지는 모든 삶을 포괄하는 것입니다. 힘이 있는 자는 없는 자 같이, 학문이 깊은 자는 깊지 않은 자와 같이, 노래 잘 하는 사람은 못하는 사람 같이, 골프 잘 치는 사람은 잘 못 치는 사람 같이, 부자는 가난한 사람 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참 재미없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삶을 누가 좋아하겠으며 그렇게 살라고 하는 설교를 아무도 좋아하지 않을 것입니다. 바울은 참 인기 없는 설교자였을 것 같습니다. 냉소주의자 같기도 합니다. 사는 것이 치열한데 초월한 사람처럼 산다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을 것입니다. 직장에 나가야 하고, 상사의 눈치를 봐야 하고, 모기지도 갚아야 하고, 공과금도 내야하고, 거래처 사람과도 만나서 싫은 이야기도 해야 합니다. 아이들 문제도 신경 써야 하고, 부모님도 돌봐드려야 하고, 남편과 아내와도 마음을 맞추어야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모든 우리의 삶을 무시하고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울이 이야기 하려고 하는 요점은 모든 일상의 일을 받아들이되 거기에 매몰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일상의 일이 아무리 중요해도 거기에 매몰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합니다. 사람은 현실적으로 감당해야 하는 일을 책임져야 할 존재이지만 또한 그 모든 것을 초월하는 것을 지향하는 존재입니다.

일상에 영혼과 믿음을 팔면 안 됩니다. 그런 것에 영혼을 파는 것이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돈이 좀 더 넉넉하여 여유 있게 살지 못하여 불안해하는 것이 바로 일상에 영혼을 팔게 되는 유혹입니다. 아이들이 더 공부를 잘 하지 못하여 불안해하는 것도 그런 것입니다. 자기 뜻대로 안 되면 불안해하고 짜증내고 실망하고 좌절하는 것은 성숙한 신앙인의 태도가 아닙니다. 자살하는 그리스도인이 일상에 영혼과 믿음을 파는 극단적인 예입니다. 세상의 일에 너무 깊이 몰입하면 자살과 같은 극단적인 행동을 하게 됩니다. 사회적 사건 사고들은 대개 그래서 일어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판단이나 좋아하는 것을 기준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와 인간의 타락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패러다임으로 모든 것을 보고 배우고 생각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과거에 집착하고, 좋은 집에 집착하고, 좋은 차에 집착하고, 깨끗한 것에 집착하고, 맛있는 것에 집착하고, 좋은 옷에 집착하고, 좋은 화장품에 집착하고, 건강식품에 집착하고, 운동에 집착하고, 여행에 집착하고, 술에 집착하고, 도박에 집착하고, 아내에게, 남편에게, 부모에게, 자식에게 집착하는 것은 신앙인의 태도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은 지나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이 지나가면 아쉽고 허전하고 슬프겠지만 그런 것의 가치는 거기까지임을 알고 인정해야 삶이 건강하고 신앙이 깊어집니다.

요즘은 사람들이 온갖 좋은 정보들을 카톡으로 지인들에게 보냅니다. 가만히 앉아서 온 세상 사람들이 발견한 비법과 처방과 아이디어와 경험과 간증을 듣고 읽을 수 있습니다. 좋은 아이디어와 비법이 있으면 순식간에 지구촌 곳곳으로 퍼져나갑니다. 그런 것도 잘 활용하면 많은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실제로 그렇게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비법도 아니고 만능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 정도로 생각하고, 활용할 것은 활용하고 나눌 것은 나누되 그런데 집착하거나 빠지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이 세상에는 도깨비 방망이도 없고 요술 램프도 없습니다. 바울은 권면합니다.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처럼, 남편 있는 자들도 남편 없는 자처럼,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처럼 살라고 합니다. 비즈니스를 잘 해서 큰돈을 번 사람도 돈이 없는 것처럼 살라고 합니다. 돈 많이 쌓아 놓고 구두쇠처럼 살라는 뜻이 아니라 손을 펴서 흩어 많은 사람을 구제하고 그래서 쌓아 둘 돈이 없이 살라는 뜻입니다. 아무리 아껴도 돈은 결국 다 없어질 것입니다.

바울은 종말에 완성될 천국을 앞당겨 살라고 한 것입니다. 냉소적으로 살라는 뜻도 아니고, 허무주의자로 살라는 것도 아닙니다. 없어질 것에 집착하지 말고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주님께, 하나님께 집중하여 살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가족 때문에, 재산 때문에, 명예와 인기와 권력 때문에, 좋아하는 것 때문에, 싫어하는 것 때문에 웃고 울지만 그것들은 다 없어질 것입니다. 그것에 매달려 살다가 낭패감에 좌절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모습이 아닙니다. 죄란 자기 자신이나 없어질 것에 마음을 집중하여 사는 것이고 믿음은 하나님께 집중하여 사는 것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 고전 7:2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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