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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오피니언

오해되고 실종된 종말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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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15-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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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재림의 때를 종말이라고 합니다. 기독교 복음에서 종말론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중요합니다. 종말이 없다면 우리가 믿는 모든 것은 헛된 것이고, 또한 그 헛된 것을 믿는 자들은 참으로 불행한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것은 종말, 즉 주님의 재림 신앙의 토대에서 해석되고 이해되고 실행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종말이라는 것이 그렇게 단순하고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특히 현대에는 종말이라는 말 자체가 극단적 종말론 자들에 의해 오해되고 있습니다. 시한부 종말론 자들이 바로 그런 자들입니다. 또 다른 문제는 건전한 복음주의 교회 안에서도 종말론 자체가 실종된 것입니다. 건전한 교회에서 종말론이 사라진 것은 극단적 종말론 자들에 대한 경계심 때문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기술과 자본주의 산업사회가 제공하는 정보와 풍요에 흠뻑 젖어 소비를 즐기느라 종말 같은 것에 아예 관심조차 갖지 않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19세기에 사람들은 진보와 낙관적인 생각에 빠져 있었습니다. 계속하여 과학이 발전한다면 머지않아 이 땅에 파라다이스가 건설될 것이라고 믿었는데, 1,2차 세계 대전은 사람들의 그러한 꿈을 박살내고 말았습니다. 이제 21세기의 사람들은 또 다시 긴장을 잃어버리고 과학 기술과 자본주의 산업사회가 제공하는 정보와 풍요에 젖어 종말 같은 것에는 아예 관심조차 갖지 않습니다. 아마 21세기의 세련된 그리스도인들에게 종말이란 극단적 종말론자 같은 광신자들이나 입에 담는 것쯤으로 생각 할 것입니다. 현대 기독교인들은 종말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르트르와 까뮤는 아예 성경의 종말을 세속화 하고 말았습니다. 즉 성경에서 종말론을 제거해 버렸습니다.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현대교회가 부패했다고 말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타락했을 때 어김없이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21세기 교회도 진정한 의미의 종말을 선포하고 종말의 언어와 내용을 가르쳐야 합니다. 문제는 현대교회가 가지고 있는 종말의 표상 가지고는 사람들을 믿음의 잠에서 깨울 수 없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기껏해야 ‘휴거’나 ‘7년 대환란’이나 ‘666이나’이나‘구름 타고 오실 예수님’에 대한 것 말고는 별로 전할 종말론 메시지가 없습니다. 대부분의 건전한 현대 교회는 물질문명의 풍요에 빠져 종말의 경고를 잊고 있습니다. 이제 교회는 정신을 차리고 종말에 대한 역사적 이해에 눈을 떠야 합니다. 종말은 말 그대로 마지막 사건입니다. 역사의 마지막인 종말에 대하여 가르쳐야 합니다. 종말은 어떻게 올 것인지, 그 목적은 무엇인지, 그 날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 그 날을 어떻게 기다려야 하는지를 배워야 합니다.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은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조차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은 역사를 무의미한 것으로 여기게 합니다. 기껏해야 역사란 자연에 기초한 것으로 생각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역사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미처 생각하지 못하게 합니다. 종말이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고 한 것은 그 안에 중요한 많은 주제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죽음이란 어떤 것인가? 부활은 육체적인가 영혼부활인가? 종말이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가, 역사를 초월하여 일어나는가? 종말이 현재적인가, 미래적인가? 이 많은 주제들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열린 담론이 되어야 합니다.

종말론적 신앙이란 종말론적 존재양식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즉 바른 종말을 믿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종말론적 존재양식은 개인만이 아니라 교회와 사회와 국가 등 전체 세계에도 해당되는 것입니다. 즉 종말론적 존재양식은 인간과 역사와 사회와 모든 문명이 추구해야 할 절대 가치이며 목적입니다. 이런 안목과 연구와 묵상에서 비로소 기독교적 세계관이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말 속담에 ‘개똥에 굴러도 이생이 좋다.’는 말이 있습니다. 기독교가 종말을 믿지만 현실은 이 속담을 믿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그만큼 종말을 관심대상에서 소외시켜왔다는 뜻입니다. 정통 신학에서도 종말론은 교의학 마지막에 부록처럼 취급되어왔습니다. 이렇게 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재림이 지연되므로 인해 교회는 종말을 현재적 의미로 해석하였습니다. 그것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바울도 시간적 종말 보다는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현재적 종말을 강조하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성경적 종말을 오해하는 중요한 흐름으로 발전시켰습니다. 신학적으로는 이것을 종말의 비역사화라고 합니다. 이 방향에서 자유주의자들은 기독교를 일종의 문화로 변질시켰습니다. 이렇게 된 사상적 배경에는 칸트와 리츨 그리고 하르낙과 헤어만이 있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종교성과 윤리, 그리고 역사와 문화에 내재한 하나님과 그 계시에 대해서 주력하였습니다. 그로 인하여 기독교는 역사 진보주의나 낙관주의와 같은 세계이해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들에게 종말은 전혀 의미 있는 주제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낭만주의의 영향 아래서 어떻게 하면 기독교가 이 세상과 조화를 이루느냐 하는 문제에만 집착하게 되었습니다.

종말론이 건전한가를 알아볼 수 있는 시금석은 윤리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역사적 종말 이해의 토대 위에서 하나님 나라 윤리를 설명하고 가르치고 실천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통치를 따르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그 윤리는 경제적 분야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 땅이 있는 동안에 가난한 자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과 돌보심이 하나님 나라 백성들에 의해 이루어져야 합니다. 가난의 이유가 게으름 때문일 수도 있지만 경제적 부정의나 지배 계급의 착취 때문이라면 그것을 개선하기 위한 그리스도인들의 구체적 역할이 각 분야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경제를 비롯하여 정치적 분야에서도 권력자나 소수의 엘리트들에 의해 독점되는 혜택으로 인하여 가난하고 약한 자들이 소외되는 일을 최소화 하도록 돕는 것이 윤리이고 그 윤리가 곧 사랑입니다. 또한 현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발전된 문명과 문화의 혜택을 과거보다 풍성하게 누리지만 어떤 사회나 집단 안에도 반드시 문화적 소외 자가 있게 마련입니다. 인종 갈등, 지역감정, 학벌차이, 소위 수저계급론, 갑을 관계의 갈등 등도 모두 문화적 소외의 현상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문제들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극복되는 증거들이 나타나야 합니다. 21세기의 하나님 나라 윤리는 자연과 환경 문제를 외면해서도 안 됩니다. 사람들은 이 문제를 자연과의 평화관계를 회복하는 차원에서 관심을 갖습니다. 그것을 생태학적 평화라고 합니다. 자연환경을 파괴하는 행위는 진보사관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자연을 단순히 소비와 생산성의 도구로만 이해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 가치관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자연을 돌보는 것이 창조의 명령이고, 인간이 자연을 잘 돌볼 때 자연도 인간에게 보답하게 될 것입니다. 나아가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 윤리는 모든 사람이 삶의 의미를 확보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아무리 이상적 복지사회가 건설된다고 해도 삶의 의미로부터 소외되는 이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삶의 의미로부터의 소외가 환경이나 다른 사람 때문일 수가 있고 그 자신 때문일 수도 있지만 어떤 경우라도 그들이 삶의 의미를 확보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종말은 인간의 모든 선한 행위를 상대화한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의 선행 행위와 정의가 높은 윤리적 가치를 지녔다 해도 종말론적 하나님의 구원행위 앞에서는 불완전합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칼빈이나 바르트도 생각이 같았습니다. 종말론적 지평에서 세상의 문화와 질서는 언제나 상대화되어야 합니다. 종말론적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인간이 발명하고 고안한 가장 높은 가치라도 상대화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여기에 있는 인간의 질서는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넘어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어떠한 경우에도 정치적 이념이나 경제적 이념을 합리화하는 일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종말론적 지평에서 상대화되어야 할 대상은 교회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교회나 그리스도인이 세상에 빛이나 소금의 역할을 하는 것은 선이나 의로운 행위로만이 아니라 정당하고 진실한 회개와 뼈를 깎는 개혁의 결단을 통해서 해야 합니다. 교회는 구원을 베푸는 기관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말론적 구원을 바라보며 자기를 낮추어야 할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종말론은 세상의 모든 질서를 지양하게 하며, 오직 하나님의 종말론적 구원을 지향하게 합니다. 이러한 삶은 이원론적 세계관을 극복하며 동시에 세상의 질서와 이념으로부터 자유 하게 합니다. 종말과 역사는 그리스도인이 이 세계와 그 목표를 이해하는 가장 합당한 개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종말은 역사가 종말론적 방향을 지향하게 하고, 역사는 종말의 내용을 제공해 줍니다.

종말론 안에 우리가 담론으로 삼아야 할 테제가 많지만 아무리 탐구를 해도 알 수 없는 점들도 많습니다. 지구 행성에서 인류의 삶이 끝나는 종말에 지구와 우주의 역사도 끝날 것인지, 인류와 지구를 비롯한 우주의 끝이 함께 올 것인지, 종말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과 인간이 이룩한 문명은 어떻게 될지, 수백 년 후에 인간이 지구 아닌 다른 별에서 지구의 최후를 지켜보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모든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와 섭리가 역사에 드러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창조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뜻과 섭리는 종말에 완성될 것이고, 그 완성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입니다. 요한은 이를 가리켜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새 질서와 지금의 역사와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우리는 인식의 한계를 절감합니다. 우리가 인식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시간과 공간의 전제 위에서 아는 것인데, 정작 우리는 시간이나 공간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아는 것이란 모르는 것을 토대로 한 아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수준에서의 아는 것도 나름의 가치가 있어서 그 지식의 토대 위에서 정치 경제 과학 문화가 발전하여 인간 복지에 기여합니다. 그러나 종말론적 지평에서 바라볼 때 이 모든 것은 잠정적이고 불완전한 것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종말론적 역사 인식과 모든 것이 완성되는 그 종말을 기대하고 바라보는 가치관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종말을 통해 현재를 이해하고 설명하고 행동하는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물질문명의 풍요가 주는 즐거움에 취해 있는 동안 종말론은 실종되고 말았습니다. 12월은 대림절입니다. 교회력에서 대림절은 달력의 1월처럼 절기의 시작입니다. 사람들이 새 해를 맞으면 각오를 새롭게 하는데, 금년 대림절에 교회가 대림절이 시작 절기라는 사실만이라도 좀 생각하고 잃어버린 종말론을 되찾았으면 합니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 -살전 5: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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