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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척간두(百尺竿頭)가 감사의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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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15-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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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한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의 헌금에 대한 이야기에 서기관들과 부자들이 등장합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서기관들은 과부의 헌금 이야기 전에 소개되었습니다. 이 과부는 소외되고 가난한 약자이고 서기관들은 부와 명예와 권력을 가진 특권층입니다. 서기관은 율법학자들인데 당시 유대는 정치와 종교가 한 맥락에서 취급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지금의 법조인들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서기관들의 태도를 몇 가지로 설명하셨습니다. 첫째 그들은 긴 옷을 입고 다니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좋아했고, 둘째는 회당과 잔치의 윗자리에 앉기를 원했으며, 셋째는 가난한 과부를 등쳐먹고, 넷째는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였습니다. 이들은 오늘날로 말하면 교회, 사회, 정치 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은 법을 만들고 법을 해석하고 법을 집행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지적에 의하면 그들은 법과 법의 정신을 깡그리 무시하는 자들이었고, 무엇보다 그 법의 보호를 받아야 할 약한 자들을 등쳐먹으면서도 길게 기도하는 것을 보아 신앙적으로도 존경 받기를 바라는 자들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자들은 자기들이 누리는 모든 것이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감사를 한다고 해도 그 감사란 그저 형식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감사란 늘 부족함이 없는 상태에서는 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것입니다. 한 번도 굶어보지 않은 사람이 음식을 앞에 놓고 감사한 마음을 갖기란 쉽지 않고, 남보다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지고 권세를 가진 자가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는 것에 감사하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진정한 감사는 적신의 빈곤을 경험한 자나, 자유와 인권을 누려보지 못한 자나, 남들에 비해 배우지 못하고 출신 배경도 변변치 못한 자가 따뜻한 음식을 대접받거나, 사람들에게 인격적인 대접을 받거나, 인정을 받을 때 감격과 함께 우러나는 것입니다. 감사는 구원 받은 자의 마땅한 태도라는 성경의 가르침에서 생각할 때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약대가 바늘귀를 통과하기보다 어렵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부자는 감사하기도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처럼 어렵다는 말씀으로 공명(共鳴)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다 아는 바지만, 성경은 인간의 출발을 적신(赤身)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인간의 적신 출발론을 부정하는 수저계급론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부모의 재산 정도에 따라 금수저, 은수저, 동수저, 흙수저 등으로 나눕니다. 자산 20억원 또는 가구 연 수입 2억 원 이상이면 금수저, 자산 10억 원 또는 가구 연 수입 1억 원 이상일 경우는 은수저, 자산 5억 원 또는 가구 연 수입 5500만 원 이상일 경우 동수저, 자산 5000만원 미만 또는 가구 연 수입 2000만원 미만인 경우는 흙수저라고 합니다. 수저계급론은 인터넷에서 놀이처럼 번지고 있는 것이지만 여기엔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는 한국 사회에 대한 젊은 세대의 반감이 투영되어 있습니다. 인생 출발을 누구에게나 공평한 적신론(赤身論)이 아닌 불공평한 수저계급론으로 반감을 표출하는 세대에게 감사란 불공평을 불평 없이 받아들이라는 이야기로 밖에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칭찬하신 이 가난한 과부는 서기관으로 대표되는 당시 사회 특권층으로부터 가슴에 한이 맺힐 만큼 억울한 일을 당하며 살았습니다. 서기관들은 힘이 없어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는 과부들을 등쳐먹었습니다. 아무도 그의 원한을 풀어주는 사람이 없었고 따뜻한 위로의 말조차 건네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성전에 가서 헌금을 드릴 때도 헌금함을 관리하는 제사장이 헌금 액수를 공개하여 창피하고 부끄러웠을 것입니다. 이 가난한 과부는 자기 재산의 전부를 드렸지만 그것은 한 사람의 한 끼 식사비 밖에 되지 않는 금액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는 것이 일상처럼 된 그녀였지만 자녀들과 마지막 먹고 죽을 음식 값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이 헌금은 의무로 드리는 제물이 아니라 자원하여 드리는 헌금이었습니다. 그러니 형편이 여의치 않으면 드리지 않아도 그만입니다. 이 가난한 과부가 드리는 두 렙돈의 헌금에 관심을 기울일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녀가 드려봤자 얼마 되지도 않는 액수였으니 헌금을 관리하는 제사장도 과부의 두 렙돈 쯤은 무시했을 것입니다. 얼마 되지도 않는 재산을 서기관들에게 강탈당하고 성전에 가서 제사 드릴 때는 부자들과 비교되어 부끄러웠을 것입니다. 이 가난한 과부는 그와 같은 상황에서 자원하는 제물을 드렸습니다. 이 헌금은 그녀의 마지막 헌금입니다. 이 헌금을 드리고 난 후에는 더 드릴 것도 없고 먹고 죽을 빵 한 조각조차도 없습니다. 그녀가 가진 재산의 전부인 두 렙돈을 드렸는데, 예수님께서 칭찬하신 것으로 보아 이 헌금은 그녀의 삶을 반영한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평소에는 하나님께 아무것도 드리지 않다가 마지막 위기의 순간에 반전의 대박을 기대하고 종자 헌금으로 드린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은 드리는 자의 삶과 일치되어야 한다고 주님께서 가르치셨습니다. 이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은 주님의 이 가르침에 부응한 것이었기 때문에 주님께서 칭찬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녀의 행동은 더욱 위대한 믿음을 증거 한 것입니다. 마지막 끼니를 위한 두 렙돈을 하나님께 바친 그녀의 행동이 그녀의 평소의 삶을 반영한 것이라면 그녀는 언제나 백척간두에서 하나님께 감사 드린 것입니다. 우리가 감사의 조건을 건강이나 재물이나 형통에서 찾는데 반해 그녀는 백척간두에서도 감사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서기관들에게 재물을 강탈당한 그녀가 하나님을 원망하고 믿음을 포기할 법도 한 데 그녀는 오히려 감사했습니다. 욥이 그랬던 것처럼 그녀는 모태에서 벌거벗은 몸으로 왔다가 벌거벗은 몸으로 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녀가 드린 헌금의 액수는 비록 적었지만 이러한 그녀의 태도가 적은 헌금을 많은 금액보다 크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기적이고 능력입니다.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이 가난한 과부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우리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이 가난한 과부처럼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려야 할 순간을 맞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두 렙돈 뿐 아니라 내 목숨까지 하나님 앞에 내 놓아야 할 순간이 옵니다. 죽는 순간에도 쌓아 놓은 것을 두고 가는 것이 억울해서 눈을 제대로 못 감는 이들이 있습니다. 아무리 억울해도 놓고 가야 합니다. 우리가 죽음 후의 문제를 우리의 결심이나 노력으로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실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문제를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깁니다. 그런데 이 가난한 과부는 내일의 문제를 지금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가난한 과부의 이야기를 하시면서 왜 그 앞에 서기관들의 이야기를 하셨고 또 이 과부를 부자들과 대조하셨을까요? 서기관들이나 부자들은 이 가난한 과부처럼 행동할 수 없습니다. 일단 그들은 가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많이 배우고 권력이나 재물이 있는 사람들은 절대로 내일을 하나님께 맡기지 않습니다. 말로는 맡긴다고 할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재물과 권력과 자기 생각을 믿고 행동합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이 가난한 과부처럼 되고 싶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나 자신과 모두에게 다음 질문을 합니다. 서기관과 부자들이 행복할까요, 가난한 과부가 행복할까요? 약간은 당황스러운 질문이 될 것입니다. 아무려면 가난한 과부가 행복할까 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많은 것을 가진 서기관이나 부자가 행복하다고 생각하기도 내키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생각할 때 이 과부의 내일이 걱정이지 정작 이 과부는 아무런 걱정이 없습니다. 걱정할 게 없습니다. 걱정한다고 될 게 없고, 걱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고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겼으니까요. 반면에 서기관들과 부자들은 염려와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아는 것도 많고 가진 것도 많기 때문에 걱정도 태산입니다. 예수님께서 서기관들과 부자들을 이 가난한 과부와 대조시키는 의도가 바로 이것입니다. 서기관들과 부자들은 불행한 자들이고 가난한 과부는 복된 사람입니다. 마 5:3절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했지만 눅 6:20절에는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하였습니다. 가난 자체가 복은 아니지만 가난한 자가 복될 수 있습니다. 절대 가난은 하나님께 대하여 절실하게 하기 때문에 백척간두가 감사의 자리인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어떤 형편이든지 하나님을 향한 진정성과 절박성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공수래공수거, 인생은 누구나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갑니다. 이 사실을 현재라는 시간에 절박한 심정으로 사는 것이 바로 이 가난한 과부의 믿음입니다. 그녀는 생애 마지막 순간을 앞당겨 미리 현실의 삶으로 살아낸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녀에게는 백척간두도 감사의 자리였습니다. 아니, 백척간두가 은혜의 자리 감사의 자리였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현실에서 백척간두로 내 몰리더라도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수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순간에 우리에게 믿음의 날개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처럼, 다윗처럼 여호와만으로 만족하고 부족함이 없다는 고백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원합니다. 오늘이 추수감사절인데 백척간두가 감사의 자리임을 많은 이들이 고백적으로 알게 되었으면 합니다.

“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 막 12:41-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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