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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존재의 가치와 깊이를 확인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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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2015-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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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에는 파산법이 있습니다. 이 법은 회사나 개인이 빚이 많은데 갚을 능력이 없는 경우 법원에 파산신청을 하여 받아들여지면 채무자의 재산을 정리하여 채권자들에게 공평하게 분배함으로써 나머지 채무를 법적으로 면제 받게 하는 것입니다. 이 법이 악용되기도 하지만 사업에 실패하거나 어쩌다 빚을 많이 진 사람들에게는 참 좋은 법입니다.

고대에는 이런 법이 없어서 빚 때문에 온 가족이 노예가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어떤 사정에 의해 한 번 노예가 되면 자유인이 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노예가 자유인이 되는 길은 누군가 그 노예 값을 지불하고 노예를 사서 자유 하게 해 주면 자유인이 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노예가 스스로의 노력으로 자유인이 되는 것은 불가능 합니다. 왜냐하면 노예는 주인의 소유이기 때문에 노예 값을 벌 수가 없습니다. 노예가 주인의 소유라는 것은 노예가 소유한 모든 것까지도 주인의 소유라는 뜻입니다. 만약에 노예가 길을 가다가 큰 금 덩어리를 하나 주웠는데, 그것을 팔면 노예 값을 지불하고도 남을 만큼 비싼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노예의 것이 아니고 주인의 것입니다. 그래서 한 번 노예 신분이 되면 자유인으로 회복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고 노예에게서 태어나는 자녀들까지 노예로 태어나서 노예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전쟁 포로가 되어서 노예가 되는 것이야 나라가 망해서 그렇게 된 것이니까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빚 때문에 노예가 되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자기 나라에서 자유인으로 살다가 어쩌다 빚을 많이 져서 갚지 못하여 다른 사람의 노예가 되는 것이니까 참으로 기가 막히는 상황입니다.

돈이 없어 가난한 것도 한없이 불행한 것이지만 그래도 노예 제도가 없어진 것이 얼마나 다행스럽고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노예 제도가 폐지되었기 때문에 아무리 빚을 많이 져도 노예가 되지는 않습니다. 요즘 시리아나 리비아에서 많은 난민이 발생하고 그들이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지만 그래도 그들이 노예가 되지는 않습니다. 다 같은 인간인데 누구는 주인이고 누구는 노예가 되어 살게 하는 제도야 말로 인간이 만들어 놓은 제도 중에 가장 나쁜 제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나라에서는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시면서 땅을 팔지 못하게 하시고 면제년을 제정하셔서 모든 빚은 면제년에 모두 탕감하도록 하셨습니다. 면제년은 매 칠 년째 해가 면제년입니다. 그리고 50년이 되는 해는 희년이라고 해서 피치 못할 사정으로 땅을 팔았어도 다 돌려받게 하셨고 남의 종이 된 사람도 자유인으로 회복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인간은 자유인으로 살도록 창조되었고 땅을 경작하여 거기서 나는 것을 사이 좋게 나누어 먹도록 하셨습니다.

현대 민주주의도 자본주의도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질서의 이상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파산법도 창조질서를 이상으로 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믿지 않는 자들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질서를 이해할 리는 없지만 그들도 더듬어서 그 이상을 찾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가며 채득한 지혜가 민주주의, 자본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입니다. 그것들이 완전하지는 않지만 사람들이 나름대로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어 보려고 노력한 결과들입니다.

요즘 ‘힐링’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는 것도 이런 현실을 반영한 것입니다. 무조건 용서하라고 해서 될 일이 아니고 무조건 참으라고 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세상 사람들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런 사회적 병리현상의 피해자들에게 사회적 통념과 종교적 규범으로 과도한 것을 요구하면 그것이 병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유익하도록 하기 위해 세운 제도와 법이 힘 있는 사람에게는 상승의 수단이 되고 힘없는 사람에게는 넘지 못할 장벽이 됩니다. 모두의 안녕을 위해 사회적 약속으로 채택한 법과 제도가 넘지 못할 장벽이 되고 게다가 가치 질서의 혼란으로 내일이 오늘보다 나아지리라는 기대마저 불가능하게 된 사람들에게 찾아오는 것은 우울증이나 공황장애 같은 것뿐입니다. 지표상의 경제나 문화가 나아지는 것을 실제 이익으로 누리는 이들도 있지만 경제성장이나 소위 뜨는 한류의 이익을 전혀 체감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사회적 갈등을 심화시키고 약자를 점점 더 좌절하게 합니다. 방송이나 여러 단체에서 온갖 종류의 힐링 프로그램을 개발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일 뿐 원인이 되는 현실이 달라지지 않는 한 현대 사회가 양산하는 우울증이나 공황장애 같은 질병은 줄어들지도 치료되지도 않을 것입니다.

사회 정치적 차원에서도 나름대로 이런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잘못된 과거사를 바로 잡는 것도 치료의 방법이고, 종교적으로는 민간 신앙에서의 씻김굿 같은 것도 나름의 해결 노력인 셈입니다. 정신의학으로, 또는 상담심리학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어떤 교회들은 특별한 영성 프로그램에 사람들을 참가시켜 치료하려고 합니다. 뜨레스 디아스가 바로 그런 프로그램입니다. 가치질서가 붕괴되어 다른 사람의 즐거움이 나에게 고통이 되는 것이 사회적 원인이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또는 심리적으로 또는 영성 개발 프로그램 같은 치료는 임시방편일 뿐입니다. 이런 방법과 노력들이 다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심리적이고 정신적인 치료도 필요합니다. 사회과학적인 진단과 힐링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런 방법은 근본적인 해결 방법이 못됩니다. 일시적으로 문제를 해결했다고 해도 원인이 남아 있기 때문에 문제는 계속 반복하여 일어날 것이고 그러면 또 치료를 해야 합니다. 암을 거의 100% 치료해도 암을 일으키는 원인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다시 재발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이런 문제들은 사람이 현실적으로 피할 수 없는 문제이고 감당할 수 없는 문제이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어도 현실이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병리적 현실을 바꾸는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존재의 가치와 깊이를 확인하므로 극복할 수 없는 태산 같은 문제를 아주 작아지게 합니다. 바울은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라고 문제를 작게 보고 대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믿는 이들이 자기 존재의 가치와 깊이를 확인할 수 있도록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일만 달란트는 갚을 수 없는 액수를 상징합니다. 그 종은 그 빚을 탕감 받아 자기는 물론 온 가족이 노예가 될 위기를 면했습니다. 그 은혜의 크기는 숫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간사하여 그 감격과 기쁨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 은혜의 의미도 제대로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자기는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 받고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친구를 감옥에 보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그는 친구를 용서하지 않아서 다시 감옥으로 보내졌지만, 실제 임금이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끝까지 일만 달란트 빚진 자 의식으로 살도록 특별 조치를 취해 놓으셨습니다. 우리를 예수님과 끈으로 묶어 놓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의 비밀입니다. 우리의 손발과 의지와 감정과 생각과 영혼까지 예수님과 한데 묶어 놓아서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마치 형사가 범인을 지키기 위해 수갑의 한쪽은 자기 손목에 다른 한 쪽은 범인의 손목에 채우는 것처럼 우리가 일체 독자적으로 행동하지 못하도록 해 놓으셨습니다. 우리의 본성은 어떻게든 예수님과 한데 묶여 있는 속박에서 풀려나기를 바랍니다. 기회만 있으면 그 끈을 풀고 예수님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자유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예수님으로부터 풀려나서 자유 하지는 못해도 자기 마음대로 예수님을 끌고 다니려고 합니다. 이 욕망은 바울에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욕망은 성령의 생각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내가 예수님을 끌고 다니지 못하게 하고 내가 예수님께 끌려 다니도록 돕습니다. 바울에게는 그런 인식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자신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갚을 수 없는 빚을 탕감 받은 기쁨과 감격으로 살아야 하는데 자발적으로 그렇게 살지 않으니까 강제적으로 그렇게 살도록 예수님과 우리를 한데 묶어 놓으셨습니다. 우리 안에는 날마다 갈등이 일어납니다. 우리 안에서 날마다 성령의 생각과 육신의 생각이 싸웁니다. 그래서 때로는 힘들고 고통스럽고 좌절하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이상합니다. 언제나 성령의 생각이 이기십니다. 내 생각대로 되면 곧 망할 텐데 성령께서 나를 주도하시고 타이르시고 격려하시고 책망하시면서 결국에는 이기게 하십니다. 그래서 돌아보면 사는 게 늘 은혜입니다. 겪게 되는 모든 일이 기적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 갈 2: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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