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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오피니언

은혜란 노예 해방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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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2015-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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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은 대한민국이 36년 간 일제식민통치를 받다가 해방된 날입니다. 일제식민통치를 경험한 세대는 그것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와는 해방에 대한 느낌과 의식이 다릅니다. 이것은 노예나 식민 지배로부터 독립이나 해방을 경험한 어느 나라 사람에게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이나 미국이나 그 외의 많은 나라들도 해방과 자유를 위해 값비싼 대가를 치렀습니다. 인간의 기본권의 구속으로부터의 해방이나 자유는 너무나 귀한 것이기에 사람들은 그것을 얻기 위해 죽음까지도 기꺼이 지불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구속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의 사람들은 해방이나 자유의 고귀함을 제대로 인식하거나 깨닫지 못합니다. 대부분의 나라와 민족들이 그와 같은 경험을 갖고 있지만 미국의 흑인들에게 그 경험이 남다릅니다.

지난 달 17일에 노스캐롤라이나 찰스톤 임마누엘 교회에서 인종주의자 딜런 스톰 루프(21)가 총을 난사해 흑인 9명이 죽었습니다. CNN의 보도에 의하면 한 목격자는 루프가 총기를 난사할 당시, 희생된 흑인 신자들을 향해 “너희가 우리 여성들을 강간했고, 이제는 나라까지 차지했다. 그러니 이제는 가야(죽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전형적인 백인의 흑인증오 인종범죄입니다. 백인우월주의자나 인종주의자들은 자기들이 흑인들에게 저지른 악랄한 만행에 대해서는 일체의 반성이 없이 오히려 자기들이 흑인들 때문에 피해를 입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루프는 총을 쏘기 전 한 시간가량 희생자들의 그룹에서 같이 성경공부에 참석하다가 범행을 저질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9명의 희생자 가족들이 가슴을 쥐어뜯는 참척의 고통을 참으며 법정에서 공식적으로 가해자를 용서한다고 하였습니다. 루프가 자신의 죄를 뉘우쳤기 때문에 용서한 것이 아닙니다. 뉘우치기를 바라며 용서한다고 하였습니다. 대단한 용서입니다. 온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이 용서에 감동을 했지만 누구보다 오바마 대통령이 감동하였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희생자 장례식에서‘어메이징 그레이스’(3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를 불렀습니다. 그는 그 찬송을 부르기 전 연설에서 한 주간 내내 ‘은혜’에 대해 생각했다고 하였습니다. 그 찬송은 흑인 노예무역에 종사하다가 회개하고 목사가 된 영국인 존 뉴턴이 자기의 지은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작사한 찬송입니다. 그의 배가 심한 풍랑을 만나 위급할 때 그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를, 하나님께서 저를 살려주시면 남은 생에 하나님을 위해 살겠다고 하였는데 하나님께서 그를 살려주셔서 목사가 된 것입니다. 목사가 된 후에도 노예무역에 완전히 손을 뗀 것은 아니고 전보다 노예들에게 너그럽게 대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노예무역이 나쁜 것인 줄 알고 노예무역 금지법을 제정하는데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그의 교회에 출석하던 하원의원인 윌리엄 윌버포스가 은혜를 받고 목사가 되려 하자 뉴턴은 그가 목사가 되지 못하게 만류하면서, 당신에게는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는데 그게 바로 노예무역 금지법을 제정하는 것이라고 하며 그 일을 하도록 도와서 결국 영국 의회가 노예무역 금지법을 제정하게 되었습니다.

뉴턴이 지은 찬송 어메이징 그레이스의 1절 가사가 ‘Amazing grace how sweet the sound. That saved a wretch like me!’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 찬송가에 ‘죄인’이라고 번역한 단어가 영어의 wretch인데, 그 뜻은 불행한 사람, 가여운 사람, 비열한 사람, 비난할 만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 용어는 바울이 롬 7:24절에서 사용한 단어입니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옛날 성경에는 ‘곤고한 사람’이라고 번역 했었습니다. 영어에서는 ‘What a wretched man I am’입니다. 딤전 1:15절에서는 “나는 죄인의 우두머리입니다.”라고 하였는데, 그 뜻도 'I am the worst.'라고 하여, 자기는 가장 비열한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단어는 자기를 최대로 비난하는 용어입니다. 왜 이런 용어를 사용했을까요? 그래야 은혜의 의미가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은혜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이러한 표현을 종종 사용합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할 때도 우리가 얼마나 사랑 받을 가치가 없는 존재인가를 강조합니다. 로마서 5장에서 “우리가 아직 약할 때에”(6절),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8절),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일 때에”(10절)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님을 우리를 위해 죽게 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음을 강조하는 설명입니다. 이런 설명과 강조는 은혜와 사랑의 진가를 드러내어 깨닫게 하려는 것입니다. 

가족을 죽인 원수가 회개하지도 않는데 어떻게 용서할 수 있을까요? 영화 밀양에서는 피해자인 자신이 용서하지도 않았는데 가해자가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다고 하자 피해자는 그런 하나님이라면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나님께 항의를 합니다. 그런데 찰스톤의 피해자 가족들은 가족을 죽인 원수가 회개하지도 않는데 회개하기를 바라며 용서하였습니다. 가족을 죽인 원수라면 회개하고 잘못을 뉘우쳐도 용서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용서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수준을 아시기 때문에 회개하고 잘못을 비는 자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은 회개하고 뉘우쳐서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는 게 아닙니다. 용서할 가치가 없을 때, 지은 죄를 뉘우치지 않을 때, 원수 되었을 때 용서하고 사랑하십니다. 이 번 노스 케롤라이나 찰스톤의 희생자들은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었습니다.

그 동안 몇 번에 걸쳐 흑인이 백인 경찰이 손 총에 맞아 희생되었을 때 수많은 흑인들이 여러 도시 곳곳에서 항의하며 데모를 하였고, 가해 경찰을 처벌하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한 항의와 주장은 너무나 정당한 민주시민의 권리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항의나 주장보다 찰스톤의 피해자 가족들의 용서가 인종주의를 막는데 더 큰 영향력으로 작용할 것입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노예제도는 폐지되었지만 인종 차별은 아직도 존재한다고 하였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국제 인권단체인 워크 프리(Walk Free) 재단에 의하면 대한민국에 현대판 노예가 무려 9만 3,700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전 세계에는 현대판 노예가 3,600만 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현대판 노예 문제에 대한 국가적 대응 등급에서 대한민국은 조사 대상 167개국 중에서 76위라고 합니다. 이 조사 연구에 의하면 2014년보다 2015년에 현대판 노예 인구가 23%나 증가한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물론 노예 인구 증가의 원인은 실제로 수가 늘어났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자료와 분석수단이 향상됐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노예인구가 조사된 것보다는 훨씬 더 많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국의 경우 직업소개소를 통해 외딴 섬으로 팔려가 염전에서 강제노역을 하는 경우가 종종 보도되곤 합니다. 열악한 노동 환경이나 인권 사각지대에서 노예처럼 취급당하며 사는 사람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으로 추측됩니다. 현대판 노예 인구는 인도가 1,428만명으로 가장 많고, 2위가 324만 명인 중국이고, 파키스탄이 205만 명으로 그 뒤를 잇고 있습니다. 인도, 중국, 파키스탄, 우즈베키스탄, 러시아 5개국 노예 인구가 전 세계 노예 인구의 61%를 점하고 있습니다. 현대판 노예 문제에 대한 각국 정부 노력으로는 네덜란드가 1위, 스웨덴이 2위, 미국이 3위이고 북한이 꼴찌입니다. 지금 북한의 노예 인구는 108,000명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군대나 경찰이나 검찰 조직 안에서도 현대판 노예가 있고, 대학에도 현대판 노예가 있습니다. 국정원 직원의 자살, 대기업 간부의 자살, 대형교회 재정 담당 장로의 자살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자살률이 가장 높습니다. 자살은 조울증과 같은 질병이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사회적 병리현상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견디기 힘들면 자살을 할까요? 우리 주변에는 우리가 잘 모르지만 너무나 견디기 어려운 환경에서 죽고 싶은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거친 말 한 마디에 상처를 받아 인생을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

2011년 서울 서초동 소년 법정에서 아주 이상한 판결이 있었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오토바이를 훔쳐 달아난 혐의로 구속된 16세 소녀에게 판사는 불처분 판결을 내렸습니다. 어린 소녀에게 내려질 판결을 기다리는 법정은 조용하였습니다. 재판을 맡은 이귀옥 부장 판사는 피고인 소녀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자리에서 일어나렴.”라고 하였습니다. 피고가 일어서자 “날 따라 힘차게 외쳐보아라”,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멋있게 생겼다.”재판장의 너무 뜻밖의 요구에 피고는 머뭇거리며 따라 했습니다. 그러자 판사는 더 큰 소리로 날 따라 하라고 하며 “나는 이 세상이 두려울 게 없다. 이 세상은 나 혼자가 아니다.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라고 하자 피고는 미처 다 따라 하지 못하고 그만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눈시울이 붉어진 판사는 울고 있는 피고를 재판 석 앞으로 불러 세웠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중요할까? 그건 바로 너야. 이 사실만 잊지 않는다면 지금처럼 힘든 일도 이겨낼 수 있을 거야.”그리고는 두 손을 내 밀어 피고의 손을 꼭 잡으며 “마음 같아서는 꼭 안아주고 싶지만 너와 나 사이에는 법대가 가로막혀 있어 이정도 밖에 할 수 없어 미안하구나.”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 아이는 한 해 전 가을부터 14건의 절도, 폭행 등 범죄를 저질러 한 차례 소년 법정에 섰던 전력이 있어서 무거운 판결이 예상되고 있었는데 의외의 판결에 피고와 피고의 가족과 한국 사회 전체가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이 아이는 한 해 전까지만 해도 반에서 성적이 상위권이었다고 합니다. 장래 간호사가 되겠다는 밝은 학생이었는데, 작년 초 귀가 길에서 남학생 여러 명에게 끌려가 집단 폭행당하여 그 충격으로 병원 치료를 받았고, 그의 홀어머니도 그 충격으로 신체 일부가 마비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학교생활에 정상적으로 적응하지 못하고 겉돌다가 비행 청소년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범행을 저지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이귀옥 판사는 법정에 모인 모든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 소녀는 가해자로 법정에 왔습니다. 이 소녀가 이렇게 삶이 망가진 것을 알면서 누가 그를 가해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 아이의 잘못의 책임이 있다면 여기에 앉아있는 여러분과 우리 자신입니다. 이 소녀가 다시 이 세상에서 긍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잃어버린 자존심을 우리가 다시 찾아주는 것입니다.”뉴욕 시장이었던 라과디아가 판사였을 때 빵을 훔친 노숙자 노인을 재판한 이야기를 생각나게 합니다.

세상에는 엉터리 판사도 있고, 엉터리 검사, 경찰, 교수, 의사, 목사도 있고, 엉터리 장로, 권사 집사도 있지만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훌륭한 판사도 있고, 훌륭한 교수도 있고, 훌륭한 의사도 있고, 훌륭한 목사도 있고, 훌륭한 장로 권사 집사도 있습니다. 우리의 따뜻한 말 한 마디가 사람을 살립니다. 말 한 마다가 가정과 사회와 교회와 인류 평화에 기여합니다.

교회 안에도 노예 취급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형교회에서 부교역자들 중에는 담임 목사에게 노예나 다름없는 취급을 받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일들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심지어 가정에서도 노예 취급을 당하는 가족들이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은혜 안에서 행하라고 하였습니다. 은혜 안에서 행하는 사람은 첫째 자랑하지 못합니다. 자랑한다는 것은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물질이나 권력이나 학문이나 선행이나 간증이나 설교라도 자랑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자랑은 교만이고 교만은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은혜를 아는 사람은 선한 일을 합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선한 일이란 세상적 기준의 선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한 일입니다. 세상적 선한 일과 성경이 가르치는 선한 일은 차원이 다릅니다. 세상적 선한 일은 다른 사람을 위하거나 공공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것을 베풀거나 희생하는 것들입니다. 이런 선행도 우리는 많은 노력을 해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적 기준의 선한 일이 하나님의 기준에 의하면 악이 될 수도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특히 기독교인들은 예배와 기도와 선교와 구제와 봉사와 희생까지도 불법이 될 수도 있고 악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선한 목적을 위해서는 불법적 수단까지도 정당화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2차 대전이 끝난 지 십여 년이 지난 어느 날 독일에서 어떤 사람이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하였답니다. ‘신부님, 저는 유대인을 불법으로 숨겨주었습니다.’신부가 말했습니다.‘그것은 나쁜 일이 아닙니다.’‘그런데 저는 그에게 방세를 받고 있습니다.’‘그것도 죄라고는 할 수는 없습니다.’‘감사합니다.’그는 돌아 나오면서 기분이 좋아 혼자 말로 ‘방세를 좀 내려주어야겠군’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다시 신부에게 들어가 ‘아, 한 가지만 더 여쭙겠습니다.’‘말씀해 보세요.’‘그 사람에게 전쟁이 끝났다는 사실을 알려주어야 할까요?’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사실인지 지어낸 이야기인지 모르지만 이 이야기는 우리 모두를 고발하는 이야기입니다.

강대국은 저개발 국가와 불공정 무역협정을 맺고 취한 이익으로 가난한 나라를 지원합니다. 미국의 어떤 교회는 작은 한국교회에게 예배당을 빌려주면서 비싼 랜트비를 받습니다. 그 돈으로 선교도 하고 구제도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적 수혜자로서 아는 사람은 이런 식으로 행하지 않습니다. 고 한경직 목사님은 몸이 병들어 죽게 되었던 경험을 통해 평생 덤으로 산다고 생각하여 무욕의 청빈으로 사셨습니다. 죽을병에서 은혜로 고침 받았다고 하여 다 그렇게 사는 것은 압니다. 그런 경험을 가지고도 불법적으로 수 백 억 원의 돈을 횡령하거나 유용하고 비자금을 조성하는 대형교회 목회자들이 있습니다. 그런 불법적 행위는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의 행위로 보기가 어렵습니다. 아무리 능력 있고 천사의 말을 한다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우리 중 대다수가 일제식민지나 흑인 노예 같은 경험이 없을지라도 바울에 설명에 의하면 모두 죄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을 경험하고 그 은혜 가운데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값진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도 그 행위가 완전하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생각과 행하는 삶의 태도와 모습에서 불법과 변명과 이기심 같은 것이 현저하게 감지되는 것은 이해하거나 용납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에게는 일단 어떤 형태로든 추한 이기적 욕심이나 거짓이 드러나지 말아야 합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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