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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영과 인간의 경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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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15-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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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치는 곁가지에 집을 짓지 않습니다. 무슨 지조라도 지키려는 것일까요? 까치의 의도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이 신념이고 지조라면 우리는 부끄러워해야 할 것 같습니다.

어릴 때 시골 장터에서 약을 팔던 약장수가 생각납니다. 자물쇠로 단단히 잠가놓은 나무 궤짝 안에 100백년 묶은 구렁이가 들어 있다고 하면서 열심히 약을 팔았습니다. 사람들은 약보다 100년 묶은 구렁이 구경에 관심이 있었지만 좀처럼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기다리다 지친 이들은 구렁이 구경을 포기하고 하나 둘씩 흩어지고, 약장수는 끝내 구렁이를 안 보여주거나 그리 놀랍지 않은 구렁이를 보여주곤 하였습니다. 약장수는 100년 묶은 구렁이를 보여 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100년 묶은 구렁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주 난처하면 4-5년 된 구렁이를 보여주면서 100년 묶은 구렁이라고 소위 뻥을 칩니다. 그 모두가 약을 팔려는 속셈입니다.

까치가 곁가지에 집을 짓지 않는 것이 신념과 지조라면 복음 전파자는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 되신 것 외에는 전하지 않는 신념과 신조가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과 경험과 성공을 메시지화 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명화(名畵)를 소개하는 사람이 열심히 명화를 설명합니다. 아는 것도 많고 말도 잘합니다. 그래서 그는 명화를 소개는 동안 짬짬이 탁월한 유머 감각으로 웃기기도 하고 가수에 버금가는 목소리로 노래도 들려주어 사람들을 즐겁게 합니다. 국내외 정세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많습니다. 경제에 대해서도 일가견이 있습니다. 문화 예술 등 다방면에 상식이 풍부합니다. 그는 순수하면서도 타고난 이야기꾼입니다. 말주변에 서툰 것 같으면서도 이런저런 감동적이고 도전을 주는 이야기로 듣는 이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합니다. 너무 재주가 많아 명화를 소개하지 않고도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고 감동과 도전까지 줍니다. 그런데 그는 내내 그가 소개해야 할 명화를 가리고 서서 사람들을 즐겁게 하고 감동과 도전을 줍니다. 너무 재미있고 감동적이라서 사람들은 명화를 보지 못한 아쉬움도 느끼지 못합니다.

약장수에게는 처음부터 100년 묶은 구렁이가 없기 때문에 보여줄 수 없고, 명화를 소개하는 사람은 온갖 재주가 뛰어나지만 사실 명화를 잘 모르기 때문에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가능한 명화를 가리고 서서 이야기해야 합니다. 누군가 명화에 대해 물으면 곤란하니까 그러지 못 하도록 사람들이 지엽적인 이야기에 몰입하도록 해야 합니다.

어떤 목회자는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잘 부릅니다. 어떤 목회자에게는 목회에 성공(?)한 것이 온통 메시지의 전부입니다. 어떤 목회자는 무욕의 청빈을 보여주어 사람들이 복음을 듣지 못하고 설교자 자신에게 빠지게 합니다. 어떤 목회자는 기도에 올인합니다. 어떤 목사는 신령한 체험을 강조합니다. 이 모든 것들은 좋은 은사들이지만 복음은 아닙니다.

참 신앙은 사도신경에 잘 요약되어 있는 창조주 하나님과 구속 주 예수님과 성령님과 하나님 나라와 교회와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믿고 전하고 관심을 쏟는 것입니다. 각 사람의 은사는 이 복음을 드러내어 증거 하는 데 사용되는 도구입니다. 도구가 복음이 되게 하면 안 됩니다. 이상하게 현대 교회에서는 도구만 극대화 되고 복음은 극소화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모든 은사는 성령께서 사용하시는 것이지만 복음이 극소화 되고 은사만 극대화 되는 것은 성령님의 역사로 볼 수 없습니다. ‘목회 성공’은 성경에 없는 개념이고 현대 목회자들의 인위적인 꿈이고 비전이지 성령님께서 바라시는 바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성령님은 오늘날과 같은 목회 성공에 별 관심이 없으십니다. 현대의 성공한 목회는 주님으로부터 ‘잘 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칭찬과 인정을 받기보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는 책망과 평가를 받게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고 병고치고 귀신을 내어 쫓는 일들이 소위 성공한 교회의 특징들로 나타나고 있지만 복음의 내용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성공과 형통과 축복은 정통 기독교보다 이방종교에 더 가까운 것들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성공은 자본주의나 세상적 가치의 성공이나 축복이 아닙니다. 바울에 의하면 복음이나 하나님 나라 가치관은 우리의 눈에 실패와 좌절로 인식되고 느껴진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복음 증거에 성공과 형통과 축복이 강조되면 다른 복음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아야 합니다.

고후 6:8-10절에 의하면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현실적으로 어떤가를 진솔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 뿐 아니라 같은 그리스도인들의 눈에도 속이는 자 같고, 무명한 자 같고, 죽은 자 같고, 징계를 받는 자 같고, 근심하는 자 같고, 가난한 자 같고, 없는 자 같다고 하였습니다. 여기 ‘ㅇㅇ 같다.’는 것은 실제적으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가치관은 세상 사람들의 그것과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다른 것을 비슷한 것이나 동일한 것으로 생각하게 된 것이 문제입니다.

바울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하고, 자기 자신을 전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였습니다(고후 4:5). 옛날이나 오늘이나 사람들은 진리보다는 거짓을 더 좋아하고 따르른 경향이 있고, 목회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보다 자기 자신을 전하려는 욕망에 휘둘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조차 복음 아닌 것에 마음이 쏠리고 감동과 도전을 받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좋은 예입니다. 그들은 참복음보다 다른 영과 다른 복음을 더 잘 용납하였습니다(고후 11:4). 성령은 진리의 영인데 사람들은 진리 아닌 것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이나 자의적으로 말씀하시거나 행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곧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고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요 14:10). 그와 같이 그리스도인이 하는 말은 그 안에 계신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것이고 그가 행하는 것은 곧 성령님께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말씀하시고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가만있어도 성령께서 다 알아서 하시는 것일까요? 성경은 성령님을 진리의 영 또는 예수의 영이라고 합니다. 성령님이 진리의 영이라고 하는 것은 첫째 악령과 구별되고, 둘째 그 활동에서 인간 이성과 협력하시는 질서의 영이라는 사실입니다. 성 삼위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은 인간 이성을 배제하고 일하시지 않으십니다. 성령과 악령은 이런 점에서 확연하게 구별됩니다. 악령은 난폭하고 무질서하고 거짓을 말하고 속이고 위협하고 망하게 하지만 성령님은 침착하고 단정하고 질서를 지키고 무엇보다 사람을 배려합니다. 성령님에 대한 이 같은 계시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령님을 무슨 에너지나 악령이나 신통한 능력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오해입니다.

성령님이 진리의 영이라는 사실이 의미 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진리의 인도를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성령을 진리의 영이라고 한 다음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요 14:17)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고 인간 이성과 협력하시는 분이시고 질서의 하나님이신데, 세상이 그를 받지 못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성령이 무슨 엑스타시나 초연적인 신비한 능력을 행하시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이해를 못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진리를 알지 못하고 진리를 따르지도 않고 받아들이지도 않는다는 뜻입니다. 즉 세상 사람들은 진리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세상이 진리의 영을 알지 못하고 받지 않는다는 것은 곧 그리스도인을 인정하거나 용납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즉 세상은 진리의 영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들의 가치관과 삶의 방식을 따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 사실을 현실적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허세를 부리지 말아야 하고 과장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자!’는 구호는 과대망상일 수가 있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이 힘써야 하는 것은 세상이 자신들을 변화시키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교회가 바로 그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세상에서 불러내어 따로 모아 놓으시고 보호하시는 공동체입니다. 세상에서 불러내신 것은 그들을 보호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의 악한 영이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시고 세상의 가치관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하시기 위해 보호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세상을 변화시키자!” 라고 하는 이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오히려 그들이 이미 세상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빛이 되면 죄를 드러내는 것이지 세상의 죄를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소금의 역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의 맛을 드러내는 것이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안타깝게도 현실적으로 교회는 세상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즉 세상이 그리스도인들을 상당히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그 증거가,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이 그리스도인들의 가치관과 같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을,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자기들과는 전혀 다른 목적과 가치관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목적과 가치관과 추구하는 것이 세상 사람들과 같습니다. 바로 이 사실이 오늘날 교회가 직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진리를 거슬러 행동하면 그들 안에 계신 진리의 성령께서 활동을 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은 우리에 의해서 제재를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고자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형통을 좇고 성공을 좇고 물질을 좇고 명예와 인기와 이 세상에서의 윤택한 삶을 추구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안에 계신 성령께서 진리의 영이심을 깊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령을 자신의 욕망을 채워주시는 착한 귀신 정도로 생각합니다. 이 모두는 진리를 싫어하는 인간의 타락한 경향 때문입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9-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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