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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론적 사고는 도덕적 불감증 심화시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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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15-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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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하나님을 선의 절대 기준으로 믿습니다. 하나님을 선의 절대 기준으로 믿는 것은 무엇이 선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하라고 명령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명령하셨기 때문에 선하다고 믿는 것입니다. 인간이 비록 타락하였으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에 나타난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을 알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이성의 기능입니다. 물론 일반은총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도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 아는 것이지만 성령님은 인간 이성의 기능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하십니다. 이성이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을 인식하는 능력이라면 양심은 선과 악을 분별하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도 그의 양심이 율법의 기능을 대신하기 때문에 선악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사탄은 인간 이성과 양심의 기능을 제한하고 억제합니다. 인간은 이성과 양심의 기능을 성령님을 좇아 사용하지 않고 불의로 진리를 막는다고 하였습니다. 불의로 진리는 막는다는 것은 악한 생각과 판단으로 이성과 양심의 정상적인 기능을 억눌러 억제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생각할 때 죄를 짓고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란 없어야 합니다. 선악을 분별하는 도덕의식은 누구에게나 주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의 도덕적 불감증은 무엇 때문일까요?

현실적으로 죄를 지은 정치인들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뉘우치는 경우는 거의 볼 수 없습니다. 법정에서 범죄 사실이 확정되어 실형이 선고되어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야 불의로 진리를 막아, 즉 이성과 양심의 기능을 거슬러 죄를 짓고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선의 절대 기준인 하나님을 부인하게 되면 어떤 죄나 악도 정당화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죄를 짓고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것은 예사롭게 생각할 문제가 아닙니다.

요즘은 기독교인이나 기독교 지도자가 법을 어겨 사회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 일이 다반사가 되었습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기독교인이 사회 법정에 서는 경우는 주로 박해 때문이었습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기독교인은 세상 법정에 서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그 특별한 일이란, 박해 때문이거나 정의를 위해 불의와 싸우는 경우나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법정에라도 당당히 서야 합니다. 그러나 법이나 공공의 질서를 어겨서 법정에 서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교회 내의 분쟁으로 사회 법정에 서는 것은 가능한 피해야 합니다. 바울은 교회 내의 문제로 사회 법정에 가는 일에 대하여“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라고 하여 차라리 손해보고 지는 편을 택하라고 권고합니다. 기독교의 도덕적 기준은 사회법철학보다 상위에 있습니다. 사회법보다 상위에 있는 도덕적 기준을 가지고 있으면서 하위 법인 세상 법에 판결을 받으려고 하는 것은 성경과 하나님의 권위를 현저히 손상시키는 행위입니다.

기독교인이 법이나 공공의 질서를 어기고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증상을 이대로 방치하는 것은 매우 심각하게 우려할 일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도덕적 불감증도 문제이지만 그보다 우리는 기독교인들의 도덕적 불감증을 진단하여 그 원인을 알아내고 처방해야 합니다. 근본적인 1차적 원인이야 타락 때문이지만 타락은 우리가 되돌릴 수 없는 일이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차적인 원인을 규명하고 대처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의 도덕적 불감증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기독교인이라고 하여 죄를 짓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 지도자도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누구나 죄를 지을 수 있으니까 교회 내에서 일어나는 범죄 사건을 엄격히 다루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범죄 사실 자체보다 더 큰 문제는 죄를 범한 자가 죄책을 느끼지 않는 도덕적 불감증입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자기 아버지의 아내를 취한 자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도 없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바울이 더욱 심각하게 지적하고 있는 점은 그 일을 아무도 문제 삼지 않는 도덕적 불감증입니다. 이방인 중에서도 있을 수 없는 나쁜 죄를 모든 교인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한국의 대형 교회들 중에 이런 교회들이 있습니다. 물론 소형교회들 중에도 그런 교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형 교회를 문제 삼는 것은 그 악한 영향이 소형교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에게 미치기 때문입니다. 사회 법정에서 유죄 확정 판결을 받고도 고난 운운하는 도덕적 불감증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고린도 교회의 경우 그들의 도덕적 불감증의 원인은 영지주의 이원론 때문입니다. 영지주의는 1세기 말과 2세기에 걸쳐 초대교회에 심각한 영향과 피해를 끼친 플라톤 철학의 아류입니다. 이 사상은 영은 거룩하고 고상하지만 육체와 물질은 악하다고 생각하는 사상입니다. 이것이 영지주의의 사상적 특징인 영육이원론입니다. 이런 영지주의가 초대교회에 활개를 친 것은 나름대로 매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생각할 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런 분이 보통 인간과 똑같은 육체로 살았다는 것을 그들은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육체는 본능적인 욕구에 따라 움직입니다. 식욕, 성욕, 명예욕 등이 다 본능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이런 본능을 지닌 육체로 살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서 인간으로 사신 것에 대해, 예수님은 인간과 똑같은 육체로 산 것이 아니라 단지 그림자로 살았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가현설이라는 이단설입니다. 오늘날은 이 가현설이 좀 다른 형태로 교회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속이원론입니다. 영혼은 거룩하고 육체는 악하며, 교회는 거룩하고 세상은 악하고, 목회나 선교는 거룩하고 세상 직업은 속되다고 생각하는 것이 다 현대판 가현설의 이원론입니다. 이런 생각들이 바로 현대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변형된 영지주의요 가현설이며 이원론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이원론이 왜 나쁠까요? 이런 사상과 태도는 개인이나 교회의 사회적인 책임을 해제시킵니다. 대한민국에서 일어났던 세월호 사건에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하는 점은 그 사건에 직접적 책임이 있는 관계자들 중 아무도 책임을 통감하는 이가 없었습니다. 특히 구원파 관계자들의 도덕적 불감증은 심각합니다. 그들은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지만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 이유는 이원론적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입니다. 구원파는 현대판 이원론의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아버지의 아내를 취한 자에 대하여 아무런 도덕적 문제의식이 없었던 것처럼 구원파를 비롯하여 이단들은 하나 같이 도덕적 불감증이 심각합니다. 그런데 이단들이 이원론의 영향으로 도덕적 불감증을 나타내는 것이야 어쩔 수 없더라도 대형교회 지도자들이 보이는 도덕적 불감증은 그 원인을 밝히고 바르게 대처해야 합니다. 초대 고린도 교회 안에 영향을 끼친 영지주의나 구원파만이 아니라 현실 교회 안에, 그것도 대형교회 지도자와 수많은 교인들, 나아가서 그가 속한 노회나 교단의 관계자들에게서도 도덕적 불감증의 증세는 심각한 수준입니다. 신약성경을 기록한 성경 저자들과 교부들은 영지주의와 가현설, 그리고 이원론과 격렬하게 싸웠습니다. 그렇게 싸운 결과 그들을 이단으로 단죄하고 정통 교회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지도자들은 현대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이원론적 도덕 불감증을 예리하게 간파하고 대처해야 합니다. 초대 교회가 직면했던 영지주의 이원론에 대한 성령님의 사도들과 성경 저자들을 통한 대처를 파악하지 못하는 설교자는 기껏해야 원색적인 기도 봉사 전도 예배를 강조할 수밖에 없고, 그것은 복음이 아니라 외형적 교회를 유지하기 위한 또 다른 율법을 지키라고 닦달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에게는 새로운 피조물의 증거인 새 생명의 현상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 새 생명의 현상은 하나님께 대하여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사는 새 생명은 도덕적으로도 매우 예민한 특징이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도덕적 불감증은 죄에 대하여 살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죽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이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원수가 크게 비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당신이 낳은 아이가 반드시 죽으리이다.” - 삼하 12:13-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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