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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스는 진짜가 많고 아가페는 가짜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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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15-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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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철학이나 문학에는 아가페(ἀγάπη)라는 용어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아가페는 히브리어로 된 구약을 헬라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새로 만든 단어나 다름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스 문학이나 철학에서는 지금 우리가 에로스와 아가페로 구분 하는 사랑을 다 에로스로 표현하였습니다. 학문을 사랑하는 것이나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나 자연이나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다 에로스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 아하바(הבהאמאהבת)는 그리스어의 에로스(ἐρως)와는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반드시 구분을 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에로스와 아가페의 차이를 아주 쉽게 설명하면, 에로스는 자기가 좋아서 하는 것이고 아가페는 싫은데도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아가페 사랑의 이와 같은 특성을 아주 극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로마서 5장 6절에“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라고 하였고, 8절에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하였으며, 10절에는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라고 하였습니다. 6절의 “연약”이란 힘이 없거나 건강상의 약한 것을 의미하지 않고 사랑할 가치가 없는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 세 구절이 강조하는 것은 아가페 사랑의 대상인 우리가 사랑 받을 자격이나 가치가 없고, 전혀 사랑스럽지 않을 뿐 아니라 미움과 증오와 앙갚음의 대상이라는 점입니다.

사랑이 의무요 책임이라는 것은 임마누엘 칸트 같은 철학자도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명령하는 아가페는 의무감이나 책임감 정도가 아니라 미움과 증오와 앙갚음의 대상인 원수를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미운 사람이나 증오의 대상이나 원수는 절대로 사랑스럽지 않습니다. 만약에 어느 날 나의 원수가 사랑스러워 진다면 그 순간부터 그는 나의 원수가 아닙니다. 따라서 기도 응답이나 인격적 많은 수련을 쌓아 원수가 사랑스러워져서 사랑해도 그것은 원수를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원수가 사랑스러워 져서 사랑해도 원수를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원수가 계속 미움과 증오와 앙갚음의 대상일 때 사랑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사랑하라”라고 명령하고 있음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냥 두어도 스스로 좋아서 하는 것은 명령할 필요가 없습니다. 명령이란 자발적으로 하지 않는 것을 강제하는 것입니다. 아가페의 사랑은 사랑스럽거나 사랑할 가치가 있는 사람을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라 미운 사람, 즉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싫은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보기만 해도 밉고 망했으면 속이 시원할 사람이 바로 우리가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 하나님께서 아가페 사랑을 명령한 것은 바로 그 사랑의 대상이 원수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사랑스러운 사람을 사랑하면 안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스러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명령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사랑스럽거나 사랑할 가치가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사랑을 에로스라고 합니다. 에로스의 특징은 마음이 끌려서 자발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에로스의 사랑은 의무나 책임감 같은 것까지도 자발적으로 하기 때문에 명령할 필요가 없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에로스는 자기가 좋아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가짜가 거의 없습니다. 아가페는 하나님의 사랑이기 때문에 거룩하고 윤리적이며 이타적인 반면에 에로스는 철저하게 이기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에로스가 아무리 고상해도 자기만족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하지 않습니다. 에로스의 사랑도 희생적인 면이 있지만 그 희생마저도 결국 내면적 자기만족이 있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가페는 물질이나 정신적 보상이나 내면적 만족이나 심지어 자기의 생명까지도 희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기적인 에로스의 사랑은 진짜가 많고 거룩하고 이타적인 아가페는 가짜가 많습니다. 에로스는 자기가 좋아서 하기 때문에 거의가 진짜입니다. 에로스는 좋으면 사랑하고 좋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거의 가짜가 없습니다. 물론 사랑하지 않으면서 재물이나 스펙이 탐이 나서 가짜 에로스를 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런 것은 그리 흔한 것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에로스는 진짜입니다.

반면에 아가페는 가짜가 많습니다. 사실 아가페는 모든 은사의 동기와 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어떤 은사라도 아가페를 지향하지 않거나 실현하지 않는다면 무가치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아가페는 은사뿐 아니라 믿음까지도 진위를 가려내는 시금석입니다. 이렇게 중요한 아가페에 가짜가 많다는 사실은 우리가 매우 심각하게 고려하고 경계를 삼아야 할 일입니다. 왜냐하면 아가페에 가짜가 많다는 것은 곧 가짜 믿음이 많다는 것이고 가짜 은사가 많다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러한 사실을 심각하게 우려하시며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 18:8) 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진짜 믿음이 희소(稀少)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아가페의 희소는 곧 믿음의 희소이기에 내가 거기에 들 수 있을지 몹시 나를 두렵게 합니다.

아가페에 가짜가 많다는 사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을 뿐 아니라 성경 전체가 경계하고 강조합니다. 성경은 가짜 사랑, 가짜 믿음을 분별하여 경계를 삼을 수 있는 지혜와 방법을 가르칩니다. 에로스와 아가페의 특징을 이해하여 대처하는 것도 지혜입니다. 좋아서 하는 것은 에로스이고 싫은데도 하는 것이 아가페입니다. 절대적이거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내가 좋아서 하는 것은 에로스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에로스는 에로스로서 진짜일 수 있지만 아가페가 아니라는 면에서는 가짜입니다. 아가페를 명령 받고 에로스를 하면서 아가페를 하는 것으로 착각할 수 있습니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삼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에로스도 그 영역에서는 소중하고 귀한 것이지만 그것을 아가페로 오해하거나 착각하게 되면 문제가 심각하게 됩니다. 선행과 정의, 찬양과 기도, 선교와 예배까지도 자기가 좋아서 하는 에로스가 될 수 있습니다. 아가페는 죽기보다 하기 싫은 특징이 있습니다. 구약의 요나는 아가페를 명령 받고 그것을 행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났다고 하나님께 항변하였습니다. 사랑의 대상이 나를 미워하거나 비난하거나 싫어하거나 시기하거나 나아가서는 나를 해롭게 하는 원수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랑을 노골적으로 거부할 수 없어서 말과 혀로만 사랑하게 되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직면하고 있는 위험입니다. 행함과 진실함으로 아가페를 실천하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니까 말과 혀로만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에도 그런 이들이 있었기 때문에 말로 혀로만 사랑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사랑스러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나 자기가 좋아서 하는 봉사는 에로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심지어 기쁘고 신이 나서 하는 신앙생활도 에로스가 아닌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죽기보다 싫은 아가페를 실천하는 데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즐거움과 행복이 있습니다. 이 기쁨과 에로스의 기쁨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둘을 분별하는 것도 성경을 통해 배울 수 있습니다. 에로스는 어떤 형태로든지 보상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고 아가페는 아무런 보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만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사랑인 아가페를 우리가 실천하기란 불가능합니다. 불가능한 아가페를 마치 쉬운 것처럼 말하는 사람은 그 사랑을 잘 모르거나 가짜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랑의 수준과 우리 자신의 수준을 현실적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절망을 하든지 아니면 영적 허세를 부리게 됩니다. 소위 은혜 받았다고 하는 이들 중에 영적 허세를 부리는 이들이 많습니다. 목사님들 중에도 허세를 부리는 분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결코 예수님처럼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왜 우리에게 그 불가능한 사랑을 명령할까요? 성경은 우리가 노력하면 그 사랑을 실천할 수 있기 때문에 명령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안에,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필연적으로 사랑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우리 집 마당에 감나무 한 그루가 있습니다. 가을이 되면 여러 개의 감이 열립니다. 어떤 감은 크고 어떤 것은 작습니다. 어떤 것은 잘 생겼고 어떤 것은 못 생겼습니다. 하지만 잘생겼으나 못 생겼으나 다 감입니다. 배가 아닙니다. 어떤 가지에는 열매가 없습니다. 열매가 없어도 감나무입니다. 잎을 보아서도 알 수 있고 나무에 붙어 있는 것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감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는 감을 맺습니다. 감나무가 포도나 배를 맺을 수는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너무도 당연히 사랑을 열매 맺어야 하는 예수나무이기 때문에 사랑을 명령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고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사랑을 명령합니다. 사랑의 실천을 우리의 능력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를 향해서 명령하고 있습니다. 나의 존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내가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성령님을 통해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십니다. 이로써 우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지만 육체에 거하는 동안 두려움과 의심이 함께 한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하고 무엇보다 아가페를 에로스로 행하는 가짜가 많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눅 18:8 -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 눅 12: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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