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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명은 자유의 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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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2015-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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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민복의 ‘시’라는 제목의 시 중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습니다. “아무리 하찮게 산 사람의 생과 견주어보아도 시는 삶의 사족에 불과하네.”어떤 한 줄의 시는 한 권의 소설보다 많은 내용을 담아내기도 합니다. 한 줄 시에 천 년의 세월을 담아 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아무리 탁월하고 심오한 시도 삶과 견줄 수 없다는 시인의 인식과 깨달음이 경이롭습니다. 윤동주는 그의 ‘쉽게 씌여진 시’라는 제목의 시에서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윤동주의 이 마음을 설교하는 자신과 견주어보며 인식 능력의 열등감을 느낍니다.

삶을 영어로 life라고 합니다. 생명도 life라고 합니다. 삶은 생명입니다. 생명은 그 자체로 고귀한 것입니다. 삶과 생명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둘이 하나입니다. 삶이 생명임을 알게 되는 것은 대단한 내공입니다. 생명의 형식이 삶인 것을 알고 사는 것과 그렇지 못하고 사는 것은 많은 차이가 납니다. 어떤 생명은 더 고귀하고 어떤 생명은 덜 고귀하지 않다면 모든 사람의 삶은 고귀하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삶에서 위대한 업적을 쌓고 대단한 것을 성취해야 고귀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각자 다양한 기준과 가치에 따라 삶을 평가합니다. 현대인들은 스펙과 업적으로 삶을 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다분히 자본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려가 되는 것은 교회가 이러한 가치판단을 기독교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삶과 생명이 하나라는 것은 생물학적 생명보다 영적 생명에서 더 명약관화(明若觀火)합니다. 하나님을 지향하는 것이 살아 있는 것이고 하나님을 지향하지 않는 것은 죽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지향하지 않는 것을 성경은 죄를 지향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죄를 지향하는, 즉 죄에 대하여 사는 것은 죽은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대하여 사는 것을 성경은 ‘소명’의 삶이라고 합니다. 우리는‘소명’을 책임과 부담으로 느끼는 경우가 많습니다. 소명을 책임과 부담으로 느끼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소명은 자유에로의 소명입니다. 기독교인의 삶은 고행이 아닙니다. 피나는 노력을 통해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소명이란 어떤 능력으로 업적을 쌓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와 자유에로의 소명의 길이 마치 고행의 길과 같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자유에로의 소명이라면 모든 책임과 부담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합니다. 하지만 바울도 이 부담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였습니다. 고전 9:16에서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복음의 은혜와 자유를 그렇게 강조한 바울도 복음 안에서의 자유와 소명을 논리적으로 설명하지는 못하였습니다. 다만 그는 복음 안에서의 자유와 소명을 그의 삶으로 담아내려 하였습니다. 복음 안에서의 자유와 소명은 논리적 설명이나 이해로서가 아니라 삶으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삶이 귀중한 것입니다. 그 삶이 곧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의 소중하게 생각하는 규범적인 모든 것들이 책임과 부담으로 느껴지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인간이 책임적인 존재로 지음 받았다는 사실에서도 이러한 설명이 합당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책임으로 행하는 모든 것이 업적이나 공로가 될 수 없는 것은 은혜가 소명에 선행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먼저 율법을 주시고 그 율법을 잘 지켜서 자녀로 삼으신 것이 아니고 먼저 자녀로 삼으신 후에 율법을 주시며, 너희가 나의 자녀이기 때문에 이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자녀는 자유 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또한 모든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자유”의 개념 안에서 “종”의 개념을 풀어내고 소화하는 것이 영적 생명입니다. 인간의 이성은 이것을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낭패감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충분히 그것을 믿고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영혼은 이성이나 지성과 다릅니다. 영혼은 어떤 사건을 파악하고 분석하고 인식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역할까지를 해 냅니다. 논리와 합리와 인식과 지식과 역사로 설명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서도 영혼은 자유롭습니다. 영혼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영적 생명의 심연의 신비입니다. 인간이 온갖 고난과 갈등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우러러 볼 수 있는 것도 영혼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는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라고 하여 자신과 영혼을 구분하는 것 같지만, 사람의 영혼은 그 사람과 다른 존재가 아닙니다. 이것이 또한 신비입니다.

바울은 전 생애를 복음을 전하며 살았습니다. 삶의 의미도 목적도 복음 전도에 두었습니다. 복음 증거를 위해서라면 감수하지 못할 일이 없었습니다. 복음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참고 양보하였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위해서라면 그 누구와도 싸웠습니다. 그는 복음을 위해 살았고 복음을 위해 죽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복음 전도는 숨 쉬는 일이나 밥 먹는 것과 마찬가지로 절대적인 것이었습니다. 숨 쉬지 않고 살 수 없고 밥 먹지 않고 살 수 없듯이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복음 전도가 그의 정체성이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만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따라서 그는 당연히 자기 삶에서 다른 것들을 상대화 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상대적인 것으로 자신의 존재 근거가 훼손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결혼할 수 있었지만 독신으로 살아갈 수 있었고, 사람 취급 못 받아도 감수 할 수 있었고, 반대로 복음을 위한다면 베드로나 야고보나 천사라도 비판할 수도 있었습니다. 복음을 위해서라면 어떤 사람과도 화해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고 용납하지 못할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바울의 소명의 삶을 자세히 살펴보면 복음 전도 자체가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고 그 소명은 복음 안에서의 자유를 누리는 형식이었습니다. 그것을 굳이 논리적으로 설명하자면 소명이 자유를 지향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그 사실을 복음에 ‘참여함’이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고전 9:23(cf.고전 9: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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