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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고한 믿음은 주님과의 교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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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15-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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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이나 성경의 내용을 설명할 때 종종 맞닥뜨리는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 그리고 인간의 전적 무능과 책임의 문제가 논리적으로 모순을 일으켜 설명이 어렵고 납득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의 일상은 거의 논리와 합리 그리고 과학적 이해에 의존합니다. 옛날 사람들보다 과학문명이 고도로 발전한 현대에는 사람들이 더욱 더 논리나 합리나 과학에 의존합니다. 현대인의 이러한 경향은 하나님과 진리를 믿는 신앙에 적지 않은 장애로 작용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나 진리까지 논리나 합리적으로 이해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나 진리를 어느 수준까지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이나 진리는 논리보다 크고 차원이 다르기 때문에 논리만 가지고는 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이나 진리가 기본적으로는 논리와 합리성을 초월한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생활 역시 전적으로 논리와 합리성에 의존하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이 실제 삶에서 당면하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라는, 논리적으로 서로 충돌하는 양면을 수용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예수님이 ‘그리스도’요 ‘주’라는 사실은 그가 전 우주의 최고 통치자라는 의미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는 것 때문에 실제 생활에서 엄청난 위험을 감수해야만 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주로 부르는 것은 교회 안에서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실제 삶에서 그렇게 인정하고 살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주’라고 부르는 예수님이 실제로 교회 밖의 세상에서는 ‘주’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교회 밖에서는 로마의 황제가 ‘주’였습니다. 그런데 엄격한 의미에서는 교회 안도 상황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세상 사람들만 예수님의 ‘주’되심을 부인하는 게 아니라 교회 안에서 교인들까지 교리적으로는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고 인정하지만 실제로는 부인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이 생각하기에 주님이 온 우주의 최고 통치자라면 현실에서 일어나지 말아야 할 온갖 불법과 악행이 자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믿음이 흔들렸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불법과 악을 미워하십니다. 그런데 우주의 통치자이신 주님께서 사람들의 불법과 악행을 통제하시지 않는 것처럼 불법과 악이 득세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통치가 불법과 악, 나아가서는 모든 질병과 고통과 두려움과 불행까지도 완벽하게 제압하여 우리를 괴롭히지 못하게 하는 데까지 강력하게 미치기를 기대합니다. 하지만 그런 기대는 현실에서 여지없이 빗나가고 맙니다. 교회 안이나 신자의 가정이나 신자 개인의 삶에 억울한 일과 고통과 염려와 걱정이 그칠 날이 없습니다.

이러한 현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 지금 여기에 현실적으로 완성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구원의 완성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날 때 온전히 이루어집니다. 성경은 곳곳에서 신자들에게 그 날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때 그 날이 되기까지 주님이 비록 온 우주의 ‘주’라도 고통과 분쟁과 문제는 끓임 없이 일어날 것이고 신자들 역시 그러한 문제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할 것입니다. 신자는 주님의 그 날까지 흔들리지 말고 굳게 서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신자가 믿음에서 흔들리지 않고 견고하게 서서 그 날을 기다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 문제는 신앙적으로 결심을 새롭게 하고 각오를 다져도 잘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도 흔들립니다. 성경이 말하는 대로 하나님 나라를 향한 기쁨으로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 같다가 어느 순간에 천 길 만길 나락으로 곤두박질치게 되기도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우리의 영적 현실을 정직하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영적으로 어린 아이이고 철이 없고 무지하고 의지가 약하고 선하고 의롭지 못합니다. 신앙생활 오래 한 이들일수록 이러한 사실을 이론적으로는 인정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정직하게 인정하기를 거부합니다. 성경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적나라하게 발가벗기려 하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거부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의 거품을 제거하고 믿음을 현실화해야 합니다. 성경의 메시지와 가르침을 회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성경의 가르침과 교훈을 피하여 우회로를 찾습니다. 그 중의 하나는 열광적인 신앙의 세계로 빠져들거나 기복주의에 빠져드는 것입니다. 목회자나 교인들이나 젊은 청소년도 예외 없이 그럴 위험이 있습니다. 목회자는 교회 성장에 집착하고, 교인들은 신비한 은사나 은혜나 복이나 성공이나 온갖 프로그램에 몰입합니다. 청소년들은 노래하고 춤추고 열광적으로 기도하고 신비한 체험에 빠집니다. 그 뿐 아닙니다. 선교하는 것으로 영적 삶을 대체하기도 합니다. 그 옛날 바리새인들이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는 일에 집착하고 그것이 영적 생명의 존재 방식인 것으로 확신하였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정상적인 경건의 생활일 수 있지만 종교적인 자기도취에 빠진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종교적인 자기도취의 그러한 행태를 얼마나 신랄하게 지적하셨는지 모릅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처럼 그런 방식들을 통해 자기 식의 구원을 받았다는 나름대로의 느낌과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이라고 하면 누구나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자기의 생각이나 느낌을 믿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종교적 열정과 헌신은 보통 사람들은 따라갈 수 없을 만큼 철저하였지만 예수님께서 보실 때 그것은 그들의 종교적 자기도취에 빠진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바른 믿음에서 흔들리지 않고 주님의 날까지 견고하게 설 수 있는 비결은 주님과의 교제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예배와 기도와 전도와 선교와 성경공부와 찬양과 은사와 선행과 그 외에 온갖 좋은 것이 많지만 이 좋은 모든 것이 주님과의 교제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런 활동들이 다 주님과의 교제가 아니냐고 반문할 이들도 있겠지만 초대교회나 현대 교회에도 주님과의 교제 없이 그런 일에 빠지는 경우가 너무 많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교훈과 책망과 바른 가르침을 성경에 기록해 놓았습니다. 우리가 주님과의 바른 교제 가운데 있으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반대로 주님과 바른 교제 가운데 있지 않으면 모든 것이 악순환을 일으킵니다. 주님과의 교제는 주님을 아는 것만큼 깊어집니다. 주님을 알기 위해서는 주님에 대해 공부해야 합니다. 주님과의 교제는 모든 것을 나 자신에게 맞추지 않고 주님께 맞추게 합니다. 주님을 아는 만큼 주님과의 교제가 깊어집니다. 주님과의 교제를 위해 주님을 배우려는 모든 노력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것이고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 고전 1: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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