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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명이 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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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2014-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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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시대 사람들은‘소명’이라는 말을 특별한 일을 위해 하나님께 부름 받은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선지자, 사사, 제사장, 왕은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은 자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신약 시대에도 사도들에게 이 말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이 소명은 특별한 사역을 하도록 부름 받은 자들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모든 사람을 소명자로 창조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을 받았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성경을 조금만 심층적으로 살펴보면 이 사실을 신 구약이 동일하게 가르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아직 계시가 신약 시대만큼 밝히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소명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성령의 역사로 하나님의 계시가 분명하게 드러난 신약 시대에 오면 소명에 대한 의미도 분명해 집니다. 신약 시대에는 특별히 12 제자들뿐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의 제자이며 하나님께 소명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신자를 그리스도의 군사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오랫동안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중세에는 소명에 대한 이해가 구약보다 못했습니다. 그만큼 성경 계시에 어두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종교 개혁자들이 강조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흔히 ‘소명’이라고 할 때는 그 앞에 ‘거룩한’이라는 형용사를 붙여서 특별한 의미를 강조하였습니다. 그래서 중세에는 소명을 성직에만 해당되는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이런 것도 이원론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직과 일반 직업을 구분하여 성직은 거룩하고 일반 직업은 속되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러나 루터나 칼빈은 모든 사람의 직업을 하나님의 소명이라고 깨닫고 가르쳤습니다. 개혁자들의 ‘만인제사장설’의 의미에는 그런 뜻도 들어 있습니다. 만인의 직업은 하나님께 받은 소명이라는 것입니다. 즉 모든 사람은 자기의 직업을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소명으로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창조명령인 것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우주의 관리자이신데, 그 관리를 위하여 인간들에게 각각의 직업을 주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부름을 받은 모든 사람들의 직업이 거룩하고 신성한 것입니다. 그래서 루터나 칼빈의 종교개혁 운동은 하나님의 왕권이 가정과 교회와 국가의 영역에서 나타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의 직업에서 하나님의 왕권이 실제로 작동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목사가 목회하는 것이나 선교사가 선교의 일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은 자기가 하는 일에서 소명의식을 가지고 일해야 합니다.

이런 주장이 어떤 분들에게는 무리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자기가 하는 일에 보람을 가지고 일 하는 이들도 있지만, 시세 말로 죽지 못해 일하는 이들도 많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는 일이 죽지 못해 하는 일이든 보람을 갖고 하는 일이든 자신이 하는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심을 믿는 소명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현실적으로 모든 직업은 먹고 살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신자는 자신의 일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라는 소명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칼빈은 우주를 하나님의 정원으로 보면서 하나님을 정원사에 비유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동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의식이 그리스도인의 바른 의식입니다. 바울에게는 이런 의식이 분명했습니다. 고후 6:1절에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하나님의 의도를 잘 알아서 순종해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습니다. 청교도 신학자 윌리엄 퍼킨스(William Perkins, 1558-1602)는 소명을“만인의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어떠한 삶 또는 부름”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그에 의하면 소명은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왕의 소명은 백성을 하나님의 뜻대로 잘 다스리는 것이고, 목사의 소명은 말씀과 기도로 성도들을 돌보는 것이고, 모든 사람의 소명은 각자의 직업과 하는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도 사실은 왕의 소명이나 선지자의 소명이나 제사장의 소명이나 일반 백성의 소명이 같은 것입니다. 신약 시대에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하나님의 소명이라면 그 일이 하나님의 뜻을 따른 것이어야 합니다. 어떤 일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인지 알려면, 우선 그 일이 합법적이고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 유익이 되는 일인가를 통해 판단할 수 있습니다. 범죄 집단의 일을 소명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혼자 산에 들어가 세속적인 것을 멀리 하고 사는 것도 소명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 것은 자신에게는 유익이 될지 모르지만 가정과 사회에는 도움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소명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무엇보다, 소명은 일보다는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물질이나 명예나 권력이나 심리적으로나 어떤 형태로든지 이기적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하고 교만이나 자랑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어떤 일을 아무리 능력 있게 잘 한다고 해도 관계 된 사람에게 유익이 되고 덕이 되고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일은 업적으로 평가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소명을 업적으로 평가하시지 않으십니다. 아마 현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 대해 가장 오해하는 것 중의 하나가 이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큰일을 이룬 것으로 소명에 충실했다고 평가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이런 평가는 아마도 자본주의의 영향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큰 산을 옮기는 업적을 이루어도 하나님께는 아무것도 아닐 수가 있습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씀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일보다는 사람에게 잘해야 합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부모는 자녀에게 자녀는 부모에게 직장 상사는 아래 직원에게 아래 사람은 윗사람에게 담임목사는 부목사에게 부목사는 담임목사에게 장로는 목사에게 목사는 장로에게 모든 사람은 서로에게 잘해야 합니다. 일만 잘하고 사람에게 잘 못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평가 기준이고 방법입니다. 일은 잘 하는데 사람을 무시하고 소외시키는 것은 소명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소명에 대하여 자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직업이 힘들면 시골 가서 농사나 지어야지 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직장 생활이 농사보다 힘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평가해서 농사일은 어떤 직업보다도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니까 농사나 지어야지... 라고 함부로 말하면 안 됩니다.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 이유는 농사나 비즈니스나 직장 생활이나 성직자의 일이나 하나님이 보실 때는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이든 하나님이 주신 소명으로 생각하면 어렵다고 쉽게 포기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 일을 하도록 나를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소명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우리가 하는 일이 성직이든 일반 직업이든 어려움이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그 어려움 때문에 소명에 대한 갈등을 하게 됩니다. 이 일이 정말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소명인가 의심하게 됩니다. 다른 일을 하면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 생각이 맞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맞기보다는 소명의 일이 너무 힘들어 인간적으로 하는 갈등인 경우가 많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주는 권면에서 소명 갈등에 대한 위로를 하였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위하여 죽기를 각오했던 것처럼 디모데도 그런 각오로 사역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어려움 때문인지 디모데는 소명에 대해 갈등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하는 소명 갈등에 대한 위로의 말을 통해 그러한 사실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목회의 어려움과 스승인 바울의 투옥 등이 소명에 대한 갈등의 요인이 되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현실 목회자들도 목회가 힘들면 농사나 지을까, 택시 운전이나 할까, 채소 장사나 할까 라고 하기도 합니다. 목회자로서의 소명도 늘 뜨겁고 분명한 게 아닙니다. 처음에는 어떤 어려움도 감당하겠다는 각오로 출발하지만 오랜 시간이 가도 눈에 보이는 열매가 없고 생계마저 힘들게 되면 소명에 대한 갈등을 하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소명의 삶에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눈에 보이고 나타나는 현상 때문에 일희일비 하지 않을 수 있는 근거는 소명 자체가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소명 갈등으로 힘들어 하는 디모데에게 주는 위로의 근거가 바로 소명 자체가 은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의 가시적 업적의 미미함 때문에 부끄러워하고 낙심하고 좌절하며 의기소침해져서 소명 갈등까지 하게 되지만 애당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업적을 기대하시고 부르시지 않으시고 은혜로 부르셨다고 하였습니다. 소명 자체가 은혜이기 때문에 어떤 업적에 집착할 것 없이 힘들고 어렵고 낙심되고 좌절하게 되는 일까지도 은혜로 알고 감사함으로 받는 것이 소명에 대한 합당한 자세입니다.

좋은 결과가 있어도 내가 한 것이 아니고, 비록 좋은 결과가 없다고 해도 성실하게 했다면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이야기를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라고 하였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실패한 목회자 같다는 생각을 떨쳐버리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목회의 어려움이나 스승인 바울이 죄수가 되어 갇힌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할뿐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해서 고난에 참여하라고 합니다. 우리의 본성은 고난이나 어려움을 만나면 피하고 싶어집니다. 이것이 우리가 극복해야 하고 넘어야 할 산이요 벽입니다. 우리의 본성은 고난은 피하고 싶고 영광에는 참여하고 싶어 합니다. 실패는 부끄럽게 생각하고 형통과 성공은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간증을 하는 이들도 온갖 고생을 다 했지만 결론은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의 간증은 복음을 전하다가 옥에 갇혔다는 그것까지도 은혜의 소명에 포함된 것으로 알고 감사하였습니다. 그도 여러 가지 위기 상황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살기도 하였지만 결국은 죄인이 되어 옥에 갇혔고 죽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이 디모데에게 실패와 고난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복음을 위하여 고난에 참여하라고 합니다. 형통과 성공과 부와 출세를 좇아가지 말고 고난을 좇아가라고 합니다. 여기 사용된 ‘참여하라’는 말이 참 인상적입니다. 이 말은 일반적으로 좋은 일에 사용되는 용어입니다. 고난은 ‘당했다’고 하지 참여한다고 하지 않습니다. 참여하는 것은 좋은 일 즐거운 일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디모데에게 고난에 참여하라고 하니 참으로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이 권면은 이 세상의 권면과는 정반대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우리의 본성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고난에 참여하는 것은 성공, 형통, 복, 출세 등과는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소명 자체가 은혜라는 사실은 포도원 품꾼의 비유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거리에서 할 일이 없어서 서성이고 있는 사람에게 누군가 찾아와서 “왜 여기서 이렇게 놀고 있습니까?” “일을 시켜주는 사람이 없어서 놀고 있습니다. 불황이라서 그런가 봅니다.” “그렇다면 우리 포도원에 와서 일하시오.”이 비유가 주는 교훈 중에 하나는 포도원에 가서 일하게 된 것 자체가 복이라는 것입니다. 소명 자체가 복입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일깨우고 격려하는 말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손이 부족해서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니고 어떤 실적을 달성하라고 부르시지도 않았습니다. 일감을 주시고 일을 시켜주시는 것, 즉 소명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이나 디모데를 부르신 것은 천지 창조 전에 하나님의 계획과 은총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작정하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소명은 은총의 부르심입니다. 은혜의 부르심입니다. 소명은 무엇을 요구하심이 아니고 그저 주신 은혜와 복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소명을 따라 살다가 실패하거나 죄인이 되거나 죽거나 하는 것은 일체 개의치 말라는 것입니다. 복은 이미 소명 안에 들어 있고, 은혜도 소명 안에 있고, 형통과 영원한 생명까지도 소명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이 소명에 대한 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요즘 기독교인들이 그렇게도 집착하는 복은 우리가 하나님께 소명을 받을 때 이미 선불로 다 받았습니다. 우리는 소명을 생각할 때 능력이나 업적이나 성과를 상상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소명을 은혜의 차원에서 이야기 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살았고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소명에서 고난과 어려움과 실패 때문에 갈등하고 좌절하는 것은 소명에 대한 올바른 반응이 아닙니다. 소명의 의미를 모르면 두 가지 태도를 보이게 되는데, 하나는 좌절하게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교만하게 됩니다. 우리의 능력, 업적, 지식 같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비하면 티끌과 같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의 모든 자랑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는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우리의 동기와 의지가 아무리 선해도 결과적으로 큰 잘못을 행할 때도 많습니다. 목사가 되고 성경을 읽고 연구해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과 그분에 대해서 점점 모르는 것이 많아집니다. 자신의 직업을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 비해서 자신의 일이나 능력이 얼마나 가치 없는 것인지를 뼈저리게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자기와 자기의 행위와 일의 결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그 자유가 곧 복음 안에서 경험하게 되는 능력입니다. 복음과 하나님 나라 개념에 여기까지만 들어가도 우리가 어떤 태도로 세상을 살아야 할지 방향은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민 사회에서 불법 체류자로 최저 임금도 못 받고 일하는 분들에게 자신이 하는 일을 소명으로 알라고 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냐는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습니다. 노동으로 자기 인생이 혹사당한다고 생각하는 분들에게 소명이라는 말은 어쩌면 사치처럼 들릴지 모릅니다. 그런 분들은 자기의 하는 일이 은혜와는 상관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런 분들에게 뭐라고 위로를 하고 용기를 드려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우리의 생활 여건이 아무리 어려워도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는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의사, 변호사, 교수, 판사, 고위공무원도 비열하게 살 수 있고, 또 자기 인생을 비관하여 자살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최저 생계비만으로 겨우 살아가는 사람도 아주 고상하게 살면서 다른 사람에게 용기를 줄 수도 있습니다. 자살하는 목사도 있고, 길가 좌판에서 장사하여 최저생계비로 살면서 자기보다 더 가난한 사람을 돕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겪는 어려움은 저마다 다릅니다. 교통사고, 일할 수 없는 질병, 조기 은퇴, 파산, 장애아 출산, 이혼 등등 이런 어려움이 언제 어느 때 찾아올지 모릅니다. 실제 직장생활에서도 많은 어려움을 겪습니다.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도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어떤 어려움도 하나님의 은혜를 파기하지는 못합니다. 몸이 아주 건강한 것은 아니지만 걸어 다니고 일도 할 수 있고, 돈이 넉넉한 것은 아니지만 굶지 않고, 추위와 더위를 피할 집이 있고,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살이를 하지 않고 사는 이들이 많습니다. 나에게는 없는 고통과 가난과 소외와 외로움으로 힘들게 살아가는 분들이 우리 주위에도 많습니다.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만큼 어렵게 사는 이들이 많습니다. 같은 시대에 같은 환경에서 살아도 개인에 따라 당하고 겪는 어려움이 다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라면 거룩한 소명을 받았다는 점에서는 누구라도 똑 같습니다. 소명은 우리의 직업에만 해당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 자체가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좀 더 많이 배우고 좀 많이 가졌다고 해도 교만할 수 없고, 남보다 좀 못 배우고 적게 가졌다고 해도 위축될 것도 없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소명의 올바른 의미를 깨닫고 사는 사람과 깨닫지 못하고 사는 사람의 차이뿐입니다. 삶의 어려움 때문에 소명에 대한 갈등을 하는 분들에게 주는 위로와 교훈은 오직 한 가지인데, 그것은 소명 자체가 은혜요 복이라는 사실입니다. 소명의 의미를 깨닫는 데만도 많은 시간이 걸리지만 깨달은 소명대로 사는 데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 모릅니다. 어떻든지 간에 올바른 소명의 삶에는 실패가 있을 수 없고 실패 같아도 실패가 아닙니다. 고난이 많은 사람에게도 소명의식은 필요하고 형통을 누리는 사람에게도 소명의식이 필요합니다. 각자 형편과 믿음의 분량대로 잘 대처하며 살아가되 소명이 은혜라는 사실만을 잊지 않는다면 가시적인 성과가 없다 하여 낙심하거나 실패 같이 보이는 가난과 질병과 어려움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딤후 1: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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