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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도 못 버리는 자기 집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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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14-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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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6장에 등장하는 부자와 나사로 비유에서, 부자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인생을 즐기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색 옷은 왕이 입는 호화로운 옷이고 고운 베옷은 같은 무게의 금보다 두 배나 비싼 옷이라고 합니다. 어쩌다 새 옷 하나 사 입어도 기분이 좋은데 이런 옷을 입으면 얼마나 좋을지 상상이 잘 안 됩니다. 어쩌다 갈비 한 번 먹으면 부자 된 것 같고, 늘 자장면만 먹다가 탕수육 하나 추가로 시켜 먹으면 중산층 된 것 같은데, 이 부자의 호의호식은 모든 사람이 꿈꾸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마다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좋은 음식이나 좋은 옷의 가치는 단순히 그 자체의 가치만이 아니고 그것이 곧 사회적 가치로 작용하기 때문에 모든 이들이 부러워하고 그것을 누리는 사람은 특권의식을 갖게 마련입니다. 그 부자의 주위에 사는 사람들이 그를 만나면 “사장님, 회장님”라고 하며 굽실댔을 것입니다.

오늘도 대다수 사람들은 이렇게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것들을 누리며 살기를 원합니다. 명품 가방을 매고 고급승용차를 타면 사회적 신분이 상승하는 듯한 효과를 느낄 것입니다. 탈렌트 배용준씨는 삼성 이건희 회장과 같은 7억 원짜리 마이바허를 타면서 심정적으로 사회적 신분의 상승효과를 느꼈을 것입니다. K 목사도 이건희 회장 부인이 탄다는 3-5억 원짜리 벤틀리(Bentley)를 탄다는데, 목사가 심정적으로라도 사회적 신분상승효과를 탐닉했다고 하기는 뭣하고, 어쨌든 어떤 기분일지가 약간은 궁금합니다. 초 고급 승용차는 돈이 있다고 아무나 탈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합니다. 연예인들은 지갑 크기대로 차를 선택할 수 있지만 재계에서는 회장이 타는 차를 사장이 타지 않는 예의가 엄격히 지켜진다고 합니다. 수입 차 브랜드의 한 지점장은 “재벌이라고 해도 차를 마음대로 못 탄다. 보이지 않게 서로 예의를 갖춘다.”고 하였습니다. 당회장이 타는 벤트리를 부목사가 타는 것도 예의가 아닐 것입니다. 돈은 그것을 소유한 사람의 생각과 상관없이 주위의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상하 위계질서를 만듭니다.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은 사람과 초 고급 승용차를 타는 사람은 그것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을 내려다보게 되고, 그것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은 그것을 누리는 사람을 올려다보게 되는 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돈이 만들어 내는 상하 위계질서를 탐닉하는 사람은 철저히 자기 자신에게 집착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부자는 자기 집 대문 앞에 버려진 거지 나사로에게 나쁜 짓 한 일이 없습니다. 불법으로 치부했다는 말도 없습니다. 그러나 부자가 나사로에게 잘못한 것은 없지만 하나님께 잘못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잘못하는 것과 소외 자에게 잘못하는 것이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이 부자는 몰랐습니다. 그 이야기를 누가는 아브라함의 입을 빌어, “나사로가 너 때문에 고난 받은 것은 아니다. 나사로가 너 때문에 고난 받은 것은 아니지만, 나사로가 고난 받을 때 너는 좋은 것으로 호의호식하였다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잘못 생각하면 부자의 잘못이 세상에서 즐겁게 산 것이고, 나사로가 잘한 게 고통스럽게 산 것이라는 뜻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뜻은 아닙니다. 아브라함도 사실은 세상에서 부자로 살았습니다. 성경에서 칭찬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 부자들도 제법 많습니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경제적으로 넉넉하게 살았다는 것, 또는 다른 사람보다 건강하게 살았다는 것이 음부에 떨어질 결정적인 이유는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부자의 문제는 무엇일까요? 그가 특별히 부도덕하거나 파렴치 한 사람이라고 짐작이 갈만한 점이 없습니다. 비난 받는 부자라는 말도 없습니다. 어떻게 부자가 되었는지에 대한 말이 없는 것을 보아 성실하게 사업을 하여 성공했거나 큰 유산을 물려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에 만족했지만 남에게 폭력적이었다거나 무자비했다고 생각할 만한 점도 없습니다. 옛날 유대인들은 부자가 되는 게 하나님의 복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이 사람도 그렇게 생각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도 그를 부러워하였을 것입니다. 그는 모든 사람이 부러워할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재물은 점점 자기 자신에게만 집착하게 한다는 사실을 부자는 감지하지 못하였습니다. 재물의 그 같은 작용 때문에 그는 나사로의 처지를 한 번도 제대로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악의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다만 자기에게 집착하는 사람의 삶은 다른 사람에 대해 무관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가 나사로에게 너그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나사로가 그렇게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사로를 자기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주워 먹는 개 이상으로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미국의 노예해방이 있기 전에 노예주인들 중에는 흑인 노예를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던 못된 주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청교도 후예로서 믿음이 좋고 나름으로 도덕적이고 인격적이었던 사람들이 있었지만 흑인을 영혼이 없는 사람으로 취급하기도 하였습니다. 그것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어떤 여자 주인은 흑인 남자 노예가 있는 데서 아무렇지도 않게 옷을 갈아입었습니다. 노예를 강아지 정도로 취급한 것입니다. 그렇게 안 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였습니다.

이런 것이 예수님 당시나 미국의 노예가 해방되기 전에만 가능했던 이야기가 아닙니다. 누가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통해 오늘 우리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하의 기업주와 노동자는 단순히 돈 때문에 상하 위계질서의 영향을 받게 됩니다. 노예 제도가 있는 것이 아니고 상반의 차별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단순히 돈 때문에 그렇게 됩니다. 돈 때문에 기업주는 노예 주인처럼 되고 노동자는 노예처럼 됩니다. 강제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자연스럽게 그렇게 됩니다. 큰 교회 목사와 선교 비를 지원 받는 선교사는 단지 돈 때문에 상하 위계질서 아래 들어가게 됩니다. 개 교회가 선교사를 직접 돕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고려해야 합니다. 미국의 많은 교회는 개 교회가 선교사를 돕거나 어려운 사람을 돕지 않고 교단이나 교단에 속한 전문 기관을 통해 돕습니다. 이런 시스템이 우연히 정착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한국 교회는 개 교회가 선교 비와 구제비를 집행하기 때문에 큰 교회 목회자와 도움을 받는 사람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상하 위계질서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나빠서가 아니라 돈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렇게 됩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말씀이 자본주의 아래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얼마나 절실한 교훈인지를 사려 깊게 되새겨 보아야 합니다.

수억 원짜리 벤트리를 타면서 북한을 돕는 일에도 누구보다도 많은 돈을 쓰는 목사님 때문에 혼란스럽습니다. 바리새인은 종교적으로 세련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정에서도 결코 남에게 뒤지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교양도 풍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실제로 존경 받을만한 일도 많이 했기 때문에 실제로 많은 존경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세리나 죄인들과 완전히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 집에 들어가셨을 때 죄인의 집에 들어갔다고 수군거렸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자신들이 그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 집중되었습니다. 자신에게 집착하는 것은 이웃과의 단절이고 이웃과의 단절은 하나님과의 단절이며 하나님과의 단절을 성경은 죄라고 합니다.

이러한 성경의 가르침을 아무리 강조해도 부자처럼 호화롭게 살고 싶은 사람들의 마음을 돌려 놓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 진리를 설교하는 나 자신이나 설교를 듣는 성도들이나 상황은 마찬가지입니다. 목사인 내가 그 교훈을 가르치고 설교하면서도 생각을 바꾸기가 쉽지 않습니다. 쉽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진정한 회개는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나는 칼빈의 예정론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습니다. 예정되지 않았다면 하나님께로 마음을 돌릴 수가 없습니다.

누가는 그 사실을 음부와 아브라함이 있는 곳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있어서 서로 오갈 수 없다고 설명하였습니다. 그 말을 들은 부자는 나사로를 다시 세상에 보내 자기 형제들로 하여금 자기가 있는 곳에 오지 않도록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아브라함은 너의 형제들에게는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부자는 그들의 말로는 형제들이 마음을 바꾸지 못하니,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서 말하면 들을 거라고 호소합니다. 그 때 아브라함은 매우 중요한 말을 하였습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크고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도 사람의 마음은 잘 바뀌지 않습니다. 지은 죄로 사형선고를 받았다가도 석방이 되면 옛 생활로 되돌아갑니다. 기적이 아니면 우리는 변할 수 없고 바뀌지 않습니다. 말씀으로 안 되는 사람은 기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오셔도 안 됩니다. 하나님이 무능하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은 소망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 부자는 바리새인들을 지목하는 상징인물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신앙적으로 구별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돈을 세속적인 것으로 여기며 멀리하였습니다.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엄격한 규율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이란 구별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들이 돈맛을 알게 되어 돈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는 별명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경건한 사람의 상징처럼 존경 받던 바리새인들이 돈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근본주의와 복음주의는 자유주의를 대항하여 진리를 사수하는데 앞장섰습니다. 근본주의는 지나치리만치 오직 경건에만 마음을 쏟았습니다. 성경 말씀 이외에 모든 것은 세속적이라고 배척하였습니다. 근본주의의 중대한 실수 중의 하나는 반지성적 입장을 취한 것입니다. 복음주의도 반지성적까지는 아니더라도 신학과 인문학을 소홀히 취급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결과 신비주의나 물신주의도 분별하지 못하고 자본주의의 가치를 하나님 나라 가치로 받아들이고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근본주의나 복음주의가 돈의 맛을 보자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기복신앙으로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의 변질의 과정을 현대 근본주의와 복음주의가 그대로 되풀이하였습니다. 반지성적이던 근본주의나 신학과 인문학을 소홀히 복음주의가 늦게 돈 맛을 보고 눈이 뒤집어진 것입니다.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 새는 줄 모른다는 말이 있는데, 지금은 근본주의도 복음주의도 거의 물신주의로 변질되어 세상보다 더 물질에 탐닉하고 있는 지경입니다.

토마스 쿤에 의하면 과학에서도 패러다임이 변하려면 혁명이 일어나야만 가능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신앙에는 이 문제가 더 어렵습니다. 과학은 혁명에 의해 패러다임이 변하지만 신앙은 죽음으로도 변하지 않습니다. 기복적인 복음을 믿는 사람은 세상 법정에서 실형을 선고 받아도 못 고칩니다. 탈세와 배임과 공금유용 죄로 실형을 선고 받고도 그 다음 주일에 강단에 서서 자기를 진주를 품은 조개에 비유하였습니다. 끝까지 자기 방식으로 모든 것을 이해합니다. 그러한 패러다임 안에서는 혀가 타는 고통과 갈증을 물 한 방울로도 해소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자기 자신에게 집착하여 사는 동안은 불행한 부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영적 생명은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삶의 특징은 자기 밖을 향하여 열려 있는 것입니다. 사람을 무시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부자의 모든 생각은 혁명으로도 죽음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무관심 하면서 하나님께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창조하셨고 모든 피조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지대한 관심으로 보살피시며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그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과 관심을 집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그분이 창조하신 것은 분리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향하여, 자연을 향하여, 질서와 공익을 위하여, 존재하는 모든 것을 향하여 관심을 쏟고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 눅 16: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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