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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가 튜닝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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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2014-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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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기로 연주를 하는 사람들은 연주하기 직전에 반드시 튜닝을 합니다. 개인연주에서나 유명한 오케스트라나 마찬가지입니다. 유명한 오케스트라 단원 쯤 되면 악기에 대해 잘 알고, 연습도 많이 할 것이고, 연주를 위해 리허설까지 하고 무대에 서지만 역시 연주 직전에 또 튜닝을 합니다. 아마도 악기가 예민하기 때문에 약간의 움직임에도 현이 틀어질 수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어떤 분은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튜닝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삶의 방향은 하나님께 맞추어져야 하는데 현실에서 그게 자꾸 뒤틀어집니다. 예배란 뒤틀어진 현을 튜닝 하는 것이라는 생각, 참 의미심장합니다. 예배의 의미를 악기의 튜닝으로 이해하는 것은 아주 제한적이긴 하지만 나름대로 의미 있는 생각입니다. 우리가 예배드릴 때 뒤틀어진 영적 현을 튜닝 하지만 다음 예배 때는 또 뒤틀어져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또 튜닝을 해야 합니다. 오케스트라의 튜닝은 클라리넷의 소리를 기준으로 튜닝을 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의 현이 뒤틀어진 것은 무슨 소리를 기준으로 튜닝을 해야 할까요?

물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영적 현을 튜닝 합니다. 그러려면 성경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의 현은 예배를 통해 튜닝이 되는 것이 아니라 더 뒤틀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악기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튜닝을 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그런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예배와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지 않고 사람의 뜻만 추구한다면 그런 예배에서는 튜닝이 되는 것이 아니라 더 뒤틀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뒤틀어진 현이 바른 소리를 내지 못하듯이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드러내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의 영적 현의 상태가 어떤지는 우리의 관심이 무엇에 집중되어 있는지를 보아 알 수 있습니다. 같은 하나님을 믿고, 같은 교회를 다니고, 같은 설교를 듣고, 같은 사람들을 만나도 관심은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의 관심은 건물이나 시설이고, 어떤 사람은 모이는 수이고, 어떤 사람은 성가대이고, 어떤 사람은 선교이고, 어떤 사람은 설교이고, 어떤 사람은 병 고치는 것이고, 어떤 사람은 복 받는 것이고, 어떤 사람은 윤리 도덕이고, 어떤 사람은 신령한 은사이고, 어떤 사람은 사회개혁입니다. 사람마다 은사와 취향과 체험과 꿈이 달라도 그것들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지향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깨달은 신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강조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입니다. 개인의 생각이나 철학이나 사상이나 어떤 이론이나 문화도 하나님의 뜻을 기준으로 튜닝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기보다 오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경이 지식에까지 새로워져야 한다고 한 것이 바로 그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과 사건과 역사를 통해 당신 자신과 뜻을 보여주셨지만 사람들은 하나님을 우상화 하고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예수님으로 직접 오셨는데도 알아보지 못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받고 행하시는 능력을 보고도 깨닫지 못하고 믿지 못하였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제사장과 선지자와 왕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도록 특별히 세워진 사람들이었고 그들은 자신들이 그렇게 살 뿐 아니라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가르쳐야 했습니다. 그 중에도 선지자가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대표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선지자는 요즘처럼 신학교 같은 교육기관을 통해서 양성되기도 하였지만 하나님께서 직접 불러 쓰시기도 하였습니다. 오늘날 목회자는 구약 선지자 전통을 이어받은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전하며 가르치도록 특별히 세워진 지도자들까지도 하나님의 뜻을 오해하거나 왜곡하는 경우가 너무 많았습니다. 구약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순종하고 전한 지도자는 소수였고 언제나 다수는 하나님의 뜻을 오해하거나 왜곡하였다는 사실이 우리를 두렵게 합니다.

예루살렘이 함락되기 십여 년 전에 예레미야는 조국의 풍전등화와 같은 운명을 바라보며 애끓는 메시지를 쏟아냈고 안타까움의 눈물을 흘렸지만 그의 메시지를 귀담아 듣는 이들은 없었습니다. 조국은 반드시 망한다는 그의 메시지를 사람들은 싫어하였습니다. 심지어 사람들은 그를 바벨론의 간첩이라고 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때 대부분의 유대의 지도자인 왕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은 아주 낙관적이었습니다. 특히 하나냐 선지자는 철로 뿔을 만들어 가지고, 하나님께서 이런 것으로 바벨론을 박살내시고 유대를 지켜 주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레미야는 그런 선지자들의 말은 거짓말이라고 하였지만 옛날이나 오늘이나 사람들은 참 선지자의 말보다는 거짓 선지자의 메시지를 더 좋아합니다. 이런 경우 예배와 설교는 백성들의 영적 현을 튜닝 하는 것이 아니라 뒤틀어지게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레미야가 왕과 귀족들과 백성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자 열등감에 사로잡혀 늘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부정적인 말만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거짓말로 위로를 삼은 유대 백성은 영적 정신적 공황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결국 바벨론에 의해 망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형편에서도 예레미야의 모든 관심은 하나님의 뜻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단순히 나라가 처한 위기를 슬퍼하고 백성의 슬픔을 아파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지 않는 것을 안타까워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멀리하는 개인이나 민족은 망할 수밖에 없다고 하였습니다. 예레미야는 당시 유대를 위급한 수술이 필요한 환자와 같다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선지자들은 수술이 필요한 환자에게 진통제만 처방하였습니다. 예레미야는 유대의 질병 원인이 우상숭배라고 하였는데, 우상숭배는 단순히 어떤 신상에게 절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이라면 오히려 우리는 안전합니다. 우리는 다른 신을 섬기지도 않고 신상에 절하지도 않고 부적을 지니고 다니지도 않습니다. 점을 치거나 기우제 같은 것을 지내지도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우상숭배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가 경고하는 우상숭배는 이런 것들보다 훨씬 더 근원적입니다. 유대 백성이 섬겼던 우상은 바알인데, 바알은 모든 종교의 일반적인 속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습니다. 바알은 풍요, 다산, 장수 등을 약속하는 신입니다. 이런 약속은 어느 종교에나 있습니다. 구약 유대교에도 신약의 기독교에도 이런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상과 하나님을 실제적으로 혼동하게 됩니다. 실제로 바알이 약속하는 것을 목사가 교회에서 설교해도 분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현대 기독교인들도 하나님의 뜻보다는 잘 사는 것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뜻도 성도가 잘사는 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잘 사는 것 자체가 잘못 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현대는 사상과 정치와 종교를 초월하여 잘 사는 것에 집착합니다. 북한의 김정은이나 미국의 오바마나, 무당이나 목사도 사람들이 잘 살도록 돕는 역할을 자처합니다. 기복신앙을 비판하는 설교에서나 바른 예배를 강조하면서도 결국은 복 받는 비결이 메시지의 핵심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뜻을 떠나 잘 사는 것은 헛된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헛된 것이란 모양은 그럴듯하지만 생명이 없는 허수아비를 뜻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돈과 풍요를 보장하지 않는 하나님은 가짜라고 생각합니다. 잘 살게 하고 복을 주는 하나님이라야 진짜 하나님이라고 믿습니다. 바알로 상징 되는 돈은 예레미야 시대보다 오늘날이 더 극심합니다. 돈으로 안 될 것이 없다는 사상이 팽배해 있습니다. 돈이 이렇게 총체적으로 인간 삶을 지배한 것은 지난 인류 역사에서 찾아보기 힘듭니다. 우상숭배의 핵심은 물질 숭배입니다. 설교와 기도가 온통 받을 복에 집중되어 있는 예배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 아니라 우상에게 드려지는 것이며, 그런 예배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하는 우리의 영적 현이 튜닝 될 수 없습니다.

“저 소리, 가련한 나의 백성, 나의 딸이 울부짖는 저 소리가, 먼 이국땅에서 들려온다. (백성이 울부짖는다.) "이제 주님께서는 시온을 떠나셨단 말인가? 시온에는 왕도 없단 말인가?"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어쩌자고 조각한 신상과 헛된 우상을 남의 나라에서 들여다가, 나를 노하게 하였느냐?" - 렘 8:19 -(새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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