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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비웃는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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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2013-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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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병은 서울대 상대 4학년 1학기까지 마쳤음에도 시인으로 살아갈 내게 대학 졸업장이 무어 필요 하겠냐고 하며, 남들은 돈을 주고라도 사고 싶어 하는 졸업장을 포기하고 학교를 중퇴하였습니다. 1967년 동백림사건에 연루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르는 동안 혹독한 고문을 지독하게 당해 육체가 망가지고 정신까지 황폐해졌습니다. 동백림사건이란 독일 유학생 몇 사람이 베를린에 사는 동포의 주선으로 동베를린 구경을 하고 온 것이 엄청난 간첩단 사건으로 비화된 것이었습니다. 천상병은 베를린 유학을 하고 돌아와 대학 강단에 서 있던 친구 강빈구한테 몇 번 술을 얻어 마셨고, 현지의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에 대해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을 따름이었다고 합니다. 천상병은 동백림사건의 핵심 인물이자 서울상대의 동기동창인 강빈구가 간첩인 것을 알면서도 신고를 하지 않았고, 그가 갖고 온 공작금을 받아썼다는 혐의로 끌려가 세 차례의 전기고문 등 엄청난 고문을 당했습니다. 얼마나 얻어맞았는지 고문자들의 발소리만 들려도 감방 구석으로 책상 밑으로 숨어 들어가 무조건 잘못했다고 빌었다고 합니다. 그는 6개월 동안의 감금과 고문으로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로 석방이 되었는데 고문 후유증으로 성기능의 장애가 생겨 아이를 낳을 수 없게 되었고 평생을 고통과 가난과 더불어 살았지만 유머감각을 잃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의 유머감각은 다른 사람을 박장대소하게 하는 번뜩이는 위트와 능란한 말솜씨가 아니라 언제나 사람들로 하여금 입가에 엷은 웃음을 흘리게 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동백림사건 이전의 천상병은 문학평론가로서 예리한 평필을 휘둘렀지만 출옥 이후 원고료 수입마저 없어지자 주변 사람들에게 일종의 구걸을 하게 되었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손을 내밀며 “천원만” 하고 졸랐고, 사람들은 시인의 처지를 아는지라 별 거부감 없이 그의 손에 돈을 쥐어주곤 했습니다. 전업시인으로 살아가던 신경림에게는 “이백원만” 하고 손을 내밀더니 어느 날 갑자기 “오늘부턴 오백 원 줘” 하며 손을 내밀기에 무슨 이유로 올려 받기로 했냐고 물어보자 천상병은 “요즘 물가가 너무 올랐단 말이야.”라고 했습니다. 통금이 있던 시절, 파출소나 경찰서에 잡혀가면 너무나 엄숙한 얼굴로 일장 연설을 했다는 천상병, ‘요즈음 민생 치안이 엉망이다, 교통경찰이 촌지를 받아먹는 게 보도되는 걸 봤다, 어디 무슨 사건의 범인을 아직도 못 잡고 있지 않느냐, 경찰이 데모 학생을 심하게 때려 피를 철철 흘리더라……. 등 날이 밝아올 때까지 경찰들에게 엄숙한 어조로 꾸지람을 하는 천상병... 작은 키와 꾀죄죄한 외모를 생각하면 한 편 측은지심이 동하기도 하고, 함께 끌려간 친구는 웃음을 참느라 밤을 꼬박 새웠습니다. 1988년 간경화증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었지만 아내 목순옥 여사의 헌신적인 간호로 소생하여 1993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수많은 화제를 남기며 어느 시인보다도 시인다운 삶을 살다 갔습니다.

그는 많은 작품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그의 시의 세계는 무소유 또는 가난의 철학, 소외와 외로움의 정서, 과거적 상상력과 흐름의 시학, 새와 하늘, 자유지향성의 의미, 동심 지향성 또는 천진성의 시학, 신앙시와 기독교적 세계관 등으로 시의 세계가 거의 망라되고 있습니다. 특히 귀천(歸天)이라는 시에는 그의 신앙이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손짓하면/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노라고 말 하리라.”어떤 이들은 천상병의 이 시의 사상적 배경이 불교의 윤회설이라고 하기도 하고 낙천적인 도교의 인생관이 그 배경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그렇게 보는 이들은 기독교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견해이고 그의 시에는 기독교 신앙이 풍부히 녹아 있습니다.

한국 기독교의 풍토에서는 그가 신앙인이었다고 상상하기가 어렵습니다. 주초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의 신앙세계가 한국기독교적이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는 그토록 가난해도 희망을 잃지 않고 밝게 살았습니다. 엄청난 육체적, 정신적 고통이 가해지면 비관주의자가 되었을 법한데, 천상병의 경우는 삶에서나 시에서나 절망과 좌절, 비탄과 자학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행복”이라는 시에서 그는 “막걸리를 좋아하는데/아내가 다 사주니/무슨 불평이 있겠는가./더구나/하나님을 굳게 믿으니/이 우주에서/가장 강력한 분이/나의 빽이시니/무슨 불행이 온단 말인가!”라고 노래하였습니다. 많은 시인들은 대개 어둠을 노래하지만 그는 생명과 희망을 노래합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어두움이고 불안이고 두려움이고 불행이지만 그에게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세상과 역사를 부정적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세상과 역사를 부정적으로 해석하고 묘사하는 것만으로 끝났다면 그들은 단지 허무주의자, 회의론자, 염세주의자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궁극적인 구원을 선포했습니다. 고통이 깊은 곳에서, 절망이 깊은 곳에서 보다 높은 구원을 내다보았습니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주님의 말씀이 가리키고 있듯이 삶의 밑바닥에 나뒹굴어 본 사람만이 그것과 질적으로 전혀 다른 구원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가 왕 노릇 하게 되었습니다. 사망을 멸하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되었습니다.

이 세상에 죽음이 무엇인지 다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죽어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의 이야기를 하지만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은 진짜로 죽은 것이 아닙니다. 생물학적으로는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죽음은 마지막 부활이 아니고는 살아날 수 없는 것입니다. 역사상에 죽었다가 부활로 살아난 사람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을 잘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잘 알지도 못하는 죽음이 죄를 통하여 우리에게 왕 노릇 하기 때문에 우리는 두렵고 불안하고 고통스러우며 불행합니다. 하지만 그 죽음을 하나님께서 멸하셨습니다. 아직도 사망의 세력이 우리를 지배하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가 우리에게 왕 노릇 하기 때문에 죽음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고 살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이 은혜 가운데서 바울은 외쳤습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 고전 15:5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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