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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용서와 책임 문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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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2013-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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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드라마 “출생의 비밀”이 기독교를 심하게 왜곡·비하했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이 드라마에서 예가그룹 회장의 부인 조여사(유혜리)는 자기 집에 기도실이 있어 늘 그곳에서 기도하고 성경을 읽는 기독교 신자입니다. 회사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뿐 아니라 무엇이든지 위해서 기도하고 응답을 구합니다. 무슨 일이 잘 안 되면 기도가 부족해서라고 생각하고, 남편이나 아들이 나쁜 짓을 하면 하나님께 벌 받을 거라며 나쁜 짓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지독한 이기주의자로 다른 사람이 자기의 생각에 맞지 않으면 기도로 저주를 하기도 하고, 아이를 낳지 못하는 며느리에게 기도가 부족해서 그렇다고 닦달을 합니다. 뿐만 아니라 남편이나 아들이 죄를 지으면 무슨 벌을 받으려고 그러느냐고 하면서 자신은 더 지능적으로 악한 일을 꾸미고 지시합니다. 겉으로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며느리를 용납하는 것처럼 하고 어려운 조카를 돕는 것처럼 하지만 그 모든 것은 회사의 이익과 자기 집안의 명예를 위한 것입니다.

그녀에게서는 참된 기독교인에게서 나타나야 할 진실과 사람을 위하는 사랑은 일체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녀는 얼음처럼 차가운 냉혈인간입니다. 그러한 그녀가 겉으로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행세하니 기독교를 폄하하는 드라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겉으로 보기에는 모든 것을 신앙적으로 생각하는, 신앙과 삶이 하나인 것처럼 행동하지만 사실은 신앙과 삶을 철저하게 분리하여 처신합니다.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묵상하면서 아무런 갈등도 없이 잔인한 악을 계획하고 지시합니다. 보통 사람들도 어느 정도의 양심이 살아 있어 정의롭지 못한 일을 행할 때는 갈등하며 괴로워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러한 갈등을 더욱 심하게 겪습니다. 어떤 사람도 이러한 갈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무한용서와 책임 문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갈등의 문제이며 딜레마입니다.

이 딜레마를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두왕국론’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는 그 책에서 하나님 나라의 윤리와 세속 나라의 윤리는 다른 방식으로 작동된다고 하였습니다. 뮌처와 칼빈은 그것을 일치시켜 보려고 했습니다. 뮌처는 무력을 통해서라도 억압받는 농민들을 해방시켜야 한다고 생각했고, 칼빈은 제네바에서 신정정치를 실천해보려고 했습니다. 둘 다 나름대로 진정성이 있지만 모두 실패(?)했습니다. 두 왕국을 무리하게 일치시키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 나라를 인간의 평가로 실패했다고 단정하는 것도 문제가 있지만 루터가 두 왕국의 질서와 윤리를 구분하는 것에도 귀를 기울여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영주에게 세속의 방식으로 통치하게 하셨다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그런 세속의 윤리를 교회가 지나치게 참견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그의 이런 주장이 이원론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져서 독일교회가 나치에 협조하게 하는데 기여하는 부작용으로 작동되기도 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나라의 윤리인 무제약적인 용서가 우리의 현실 삶에 무조건 적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루터가 잘 지적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피할 수 없는 질문에 봉착합니다. 만약에 하나님 나라의 질서와 세속의 질서가 완전히 구분된다면, 즉 무제약적인 용서가 세상에서는 불가능하다면 기독교 신앙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죽어서 천당 갈 테니까 세상에서는 적당히 살아도 되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사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여간 편리한 게 아닙니다. 그래서 앞에서 소개한 드라마 출생의 비밀에서처럼 신앙적으로는 독실하고 세상살이에는 영악한 인간으로 살면서도 아무런 갈등도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못합니다. 기독교 언론에서는 그 드라마가 기독교를 폄하했다고 발끈했지만 드라마 속의 그녀는 현실 기독교인의 전형일 수 있습니다.

서울 강남은 부자들이 몰려 사는 곳으로 땅 값이 전국에서 가장 비싸다고 합니다. 그 지역은 기독교인의 비율이 전국에서 최고로 높습니다. 약 40%가 기독교인이라고 합니다. 소망교회, 사랑의 교회를 비롯하여 대형 교회가 그곳에 몰려 있습니다. 그곳에 사는 소위 엘리트 기독교인들이 바로 신앙생활 따로 세상살이 따로를 가장 잘하는 이들이라고 합니다. 기독교인의 윤리와 신앙은 교회라는 특별한 자리에 묶어두고 세상살이는 세속적으로 요령껏 잘하는 이들이 그곳에 많은 모양입니다. 겉으로 드러나기는 세련된 기독교인들 같으나 세속적 방법으로 살면서도 전혀 갈등도 못 느끼고 사랑이나 용서도 이기적으로만 하는 이들이 많은 모양입니다. 그렇다고 강남 외의 지역에 사는 이들이 더 낫다고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모든 인간 사회에는 이런 문제가 없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를 일치시킬 수도 없고, 그렇다고 무조건 용서만 할 수 없다면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는 어떤 것이어야 할까요?

베드로가 주님께 형제의 잘못에 대하여 일곱 번 용서하면 되겠느냐고 물었을 때 주님은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시면서 비유로 들려주신 이야기를 다시 생각해 보아야 되겠습니다. 1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사람이 1백 데나리온을 갚지 못한 친구를 감옥에 넣었습니다. 세상에는 이런 속 뒤집히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납니다. 이 사람이 친구를 감옥에 넣은 이유는 자기가 1만 달란트를 탕감 받았다는 사실을 망각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자기가 일만 달란트 탕감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면 그런 짓은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언젠가 “타락한 기억력”이라는 신앙덕담을 쓴 적이 있는데, 사람의 기억은 아주 이기적으로 작동합니다. 자기에게 필요한 것만 골라서 기억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받은 은혜는 쉽게 잊어버리고 베푼 은혜는 오래 기억하는데 성경은 그 반대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억력도 타락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기적인 기억력이 우리의 삶을 왜곡합니다. 기독교의 경건은 일종의 기억력으로 작동합니다. 무엇을 기억하는가에 따라서 그 사람의 신앙이 달라집니다. 당연히 우리는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시편을 비롯해서 구약성경에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기억하라는 표현이 자주 나오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말이 좀 막연하기는 합니다. 내가 하나님께 1만 달란트를 탕감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기억이 우리의 의식을 지배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 길이 보일 것입니다. 누가 옆에서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것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사람에게는 성령이 말을 걸 것이며, 그는 말씀과 성령님께 순종하게 될 것입니다.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 마 18:32-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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