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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지와 함께 사는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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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2013-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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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에 “가라지를 뽑지 말고 그냥 두라 하신 뜻”이란 제목의 신앙덕담을 썼었는데 어느 분이 몇 가지 문제를 제기하는 질문의 댓글을 올렸습니다. 나는 그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나의 글에 대한 인터넷 댓글에 대답하지 않는 나름대로의 원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의 첫째는 내가 그 댓글들에 일일이 대답할 자신도 실력도 부족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나의 글에 반대하는 견해는 내가 수용하면 되기 때문이고, 셋째는 어떤 댓글이 제기하는 문제는 이미 본 글에 그 대답이 제시되거나 암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글을 읽을 때는 글의 행간과 생약 부분까지 읽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모든 글은 독자를 배려해야 하지만 특히 짧은 글에서는 모든 것을 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이런 변명에 대해서 반대 댓글을 쓰고 싶으신 분들이 있겠지만 그에 대해서도 나는 대답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나의 태도는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부정적인 면도 있고 긍정적인 면도 있습니다. 혹시라도 나의 이런 태도가 언짢으신 분들은 이것이 나의 한계임을 널리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사도행전 5장에 아나니아 삽비라 사건이 나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영적 시기심으로 작정한 헌금을 드릴 때 성령을 속인 죄로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아나니아 삽비라 같이 사람이 성령을 속이는 경우가 있을 텐데 그들처럼 그 자리에서 죽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심판하신 하나님이 오늘날도 당신의 거룩한 교회를 세워 가시는데 왜 그런 심판을 내리지 않으시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한 가지 유추해 보는 것은 그러한 심판이 교회의 기초를 놓는 단계에서는 교회가 거룩해야 함을 천명함이었으나 오늘날에 그런 즉각적인 심판이 없는 것은 교회의 불완전함을 배려하심 때문이 아닐까 라는 점입니다. 물론 이것도 절대적으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전체적인 가르침을 따라 유추해 본 것일 뿐입니다. 나중에 주님께 여쭤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가라지 비유에서는 마땅히 제거해야 할 것 같은 가라지를 가만 두라고 하셨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심판하신 일이나 가라지를 가만 두라고 하신 것 모두가 주님이 하신 일이니까 우리가 왈가왈부 할 수는 없으나 우리에게는 아나니아 삽비라 사건보다 가라지 비유가 안도감을 줍니다. 그런데 가라지 비유를 잘못 적용하면 그렇잖아도 교회가 심하게 세속화 되어가는 마당에 불법과 거짓을 심화시킬 위험이 있습니다. 실제로 그런 일들이 교회 안에 비일비재합니다. 성 범죄, 속임과 거짓, 배임과 횡령 등이 교회 안에서 묵인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아나니아 삽비라 사건의 본문을 가지고 일벌백계를 강조해야 속이 후련할 것 같습니다. 사실 교회 안에 제대로 된 권징이 사라진 지 오래되었습니다. 징계가 바르게 시행되지 못하는 탓도 있지만 아무도 징계를 회개하는 마음으로 받는 이들이 없습니다. 징계가 사랑의 또 다른 방법의 차원에서 시행되고 그것을 모두가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교회가 세상과 다른 점입니다. 그런데 징계의 시행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교인도 세상보다 못한 수준입니다. 이러한 상황에 처한 현대 교회에게 가라지 비유가 주는 교훈이 절실합니다.

마태복음 13장에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여러 개의 비유가 나옵니다. 씨가 떨어진 네 가지 밭, 겨자씨, 누룩, 가라지, 밭에 감춰진 보화, 좋은 진주, 그물 비유 등이 나옵니다. 비유는 어떤 현상이나 사물을 직접 설명하지 않고 다른 것에 빗대어서 설명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천국을 세상의 것들에 빗대어 설명한 것입니다. 천국은 절대적인 세계이기 때문에 직접 설명할 수 없고 비유로 설명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라지 비유에서 천국은 좋은 씨를 밭에 뿌린 사람과 같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씨를 뿌리고 모두 잘 때 원수가 와서 가라지를 덧뿌렸다고 합니다. 가라지는 일종의 잡초입니다. 그 결과 밭에는 곡식만이 아니라 가라지도 같이 자라게 되었습니다. 이 같은 사실은 조금이라도 농사를 지어 본 사람이라면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잡초는 뿌리지 않지만 저절로 납니다. 그래서 밭에는 곡식과 잡초가 함께 자라게 됩니다. 이 상황을 종들이 주인에게 보고했습니다. 주인은 원수가 그런 짓을 했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농사 경험으로 잡초는 저절로 난 것입니다. 그러나 가라지 비유에서는 그 가라지 즉 잡초를 원수가 뿌렸다고 하였습니다. 당시의 유대에서 실제로 남의 밭에 몰래 가라지를 뿌리는 일이 자주 있는 일이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가능성이 있는 일이지만 내가 살던 농촌에서는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하였습니다. 따라서 본문의 이 이야기는 비유이기 때문에 실제 상황과는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종은 가라지를 뽑아내는 게 어떻겠냐고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주인은 가라지를 뽑지 말고 가만 두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자란 농촌에서도 실제로 곡식을 다칠까봐 잡초를 뽑지 않고 그냥 두는 경우가 있습니다. 벼가 꽃이 한창 피기 시작하면 추수 때까지 피(잡초)를 뽑으러 논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 역시 벼를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피는 벼보다 키가 커서 그것이 논에 많으면 보기에도 참 흉하지만 그냥 둡니다. 잠언 기자는 잡초가 밭에 가득한 것은 농부의 게으름 때문이라고 하였는데, 피를 벼꽃이 피기 시작하기 전에 미리 뽑으면 될 텐데, 결과적으로 추수 무렵에 논에 피가 많은 것도 결국은 게으름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가라지를 그냥 두라 하신 뜻을 이해하려면 우선 초대 교회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초대 교회 안에 가라지와 같은 이들이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곡식이 아닙니다. 그들은 신앙의 내용과 형태가 다르기도 하고, 교회 공동체에서 많은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였습니다. 이들은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허물었습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이들의 행위는 화나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런 이들을 교회에서 몰아내야 한다는 주장들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들로 인하여 교회가 너무 시끄럽기도 하고 순진하고 어린 신자들이 그들의 거짓 가르침에 미혹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가라지를 뽑아내듯이 문제가 있는 이들을 내쫓는 게 좋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을 내쫓아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이들은 교회의 순결과 어린 신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를 들 것입니다. 바울도 교회 안에 있는 범죄자들을 신중히 다루되 끝까지 불순종하는 이들은 교회에서 내어 쫓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가라지를 가만 두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분파주의를 경계하는 말씀입니다. 분파주의에 대한 경고가 가라지 비유의 핵심입니다. 교회는 성결해야 하고 거룩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분파주의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청교도들이 여러 면에서 경건의 능력을 보였으나 교회 안에서 지나치게 가라지를 제거하려 한 것이 분파주의의 약점이었습니다. 한국교회의 특징 가운데 좋은 점도 많이 있고 약점도 많이 있지만 이 분파주의가 대표적인 약점입니다. 한국에 개신교 교파가 150개가 넘는다는 사실이 이를 증거합니다.

그런데 분파주의를 경계하는데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있습니다. 분파주의를 경계하는 것이 자칫 이단과 거짓과 타협하게 될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 분파를 일으키는 것은 사탄의 책동이기 때문에 막아야 합니다. 하지만 분파주의를 경계하되 성경적 원칙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가 엄히 경계하고 용납하지 말아야 할 원칙을 크게 세 가지로 설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비 성경적은 것, 둘째는 비도덕적인 것, 셋째, 실정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이 외에도 교회의 성결을 해치는 것들이 많이 있을 수 있지만 그런 것들은 가만 두어야 할 가라지 들일 수 있습니다. 교회가 근본적으로 잘못된 신앙은 거부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싸워야 합니다. 초기 기독교도 복음을 지키기 위해서 격렬하게 싸웠습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신앙의 내용은 모두 이런 싸움의 결과입니다. 이런 싸움이 없었다면 기독교는 유대교의 아류로 떨어지거나 로마 신화의 한 종파로 떨어졌을 것입니다. 복음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 싸워야 할 때는 싸우고, 떨어져 나와야 할 때는 떨어져 나오는 것이 진리를 따르는 이들의 바른 태도입니다. 따라서 분파라는 말이나 현상만 놓고 옳다 그르다 하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입장에 있든지 분파적인 태도는 일단 복음의 열정과 순수성에 근거한 것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가라지와 같은 신앙과는 관계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교회가 순수하고 거룩하게 되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바라는 바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높은 이상과 순수를 고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한계에 대해 정직해야 합니다. 이 땅에 완전한 교회는 있을 수 없고 완전한 개인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현실이고 언제나 전제해야 할 사실입니다. 거룩하게 되려고 노력해야 하되 결코 그렇게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개인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거룩해 질 수 없다는 것은 교회도 교인들의 노력으로 거룩해 질 수 없다는 뜻입니다. 신자 개인이 거룩하지 못하면서 교회가 거룩하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무리한 기대입니다. 가라지 비유가 말 하려고 하는 것은 이 세상에 가라지 없는 개인이나 가정이나 교회나 사회는 있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한 때 가라지가 싫어서 산으로 들어가 수도원을 만들었던 역사가 있습니다. 수도원 제도가 생겨나기 훨씬 전에 유대의 에세네파는 세상을 완전히 등지고 자기들끼리 공동체를 형성하고 살았습니다. 요즘도 수도원을 세우는 이들이 있습니다. 아주 신앙을 낭만으로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가라지와 함께 사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이것은 악과 타협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악과 타협은 하지 말아야 하되 악을 직시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가라지를 뽑는 행위는 가라지의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민족이 복음화 되고 국가가 기독교 국가가 되어도 가라지들의 파렴치 한 일들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그리스도인들은 국가의 탈을 쓴 폭력, 지성의 탈을 쓴 거짓, 교회의 탈을 쓴 세속을 꿰뚫어보아야 합니다. 가라지의 악한 준동을 직시하는 것은 신앙의 기본입니다. 물론 그게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폭력과 거짓이 교묘하게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를 내세우는 병원도 가라지 노릇을 하고, 스스로 거룩한 하나님의 교회라는 가라지도 있습니다. 이런 가라지는 우리 힘으로 제거할 수가 없습니다. 추수 때 주님이 모아 불태울 때까지 가라지의 준동을 예의 주시하며 그리스도의 승리에 편승해 힘을 다하여 싸울 뿐입니다.

물살이 센 내를 건널 때는 돌을 등에 지고 건너면 떠내려가지 않고 안전합니다. 디딜방아를 찧을 때 내 몸이 가벼우면 아이를 등에 업고 방아를 찧거나 돌을 이고 찧으면 한결 쉽습니다. 이것이 지혜입니다. 가라지는 나쁜 것이지만 잘 업고(?) 가면 그리스도의 승리에 참여하는 것이 됩니다. 마지막 날에는 알곡들에게 있는 가라지의 악한 속성들까지 완전히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 날을 손꼽아 기다립니다. 이 땅에서 가라지와 함께 사는 동안 그 악한 준동이 우리를 괴롭혀도 그 가라지를 이용해서 우리를 승리하게 하시는 은혜가 모두에게 넘치기를 바랍니다.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 마 13: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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