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은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가 쓴 책 제목입니다. 깊은 병고와 방랑 가운데서 펴낸 이 책은 1878년 무신론자이며 자유사상가인 볼테르 서거 100주기를 기념 > 지난 오피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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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11-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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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은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가 쓴 책 제목입니다. 깊은 병고와 방랑 가운데서 펴낸 이 책은 1878년 무신론자이며 자유사상가인 볼테르 서거 100주기를 기념하여 헌정된 글로서,‘자유정신을 위한 글’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나는 철학이나 니체를 전혀 알지 못하던 청소년 시기에 『짜라투스트는 이렇게 말하였다』와 함께 이 책일 읽었기 때문에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였지만 이미 읽은 책이라는 생각으로 다시 읽지 않았고 평가와 비판의 글들을 통하여 이야길 할 뿐입니다. 위키 백과는 이 책을 니체의 실증주의 시대의 대표작이라고 하였는데, 기성의 모든 진리관이나 가치관의 배후에는 속물적인 타산이 도사리고 있다고 하여 과장된 절대성의 가면을 벗기고 해방하려고 한 자유로운 진리탐구서라고 하였습니다.

니체는 여기에서 모든 진리나 가치의 관념은 인간이 스스로의 충실과 발전을 위해서 선택한, 유리한 현실해석의 관점에 지나지 않으며, 생을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일종의 실용주의적인 인식론을 전개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진리관은 진리의 객관성을 부정하기 때문에 그 자신의 주장에 대해서도 객관성이나 절대적 진실성을 보장 받을 수 없게 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그는 점점 회의와 니힐의 가운데로 자신을 빠뜨리고 방황하게 하였으며 전통 형이상학과 한 때 그렇게도 심취했던 쇼펜하우어 철학을 부정하고, 각별했던 바그너와 바그너 음악과도 결별하였으며, 모든 전통적 가치의 우상을 제거하려는 자유정신의 세계를 지향하여 그의 존재와 사상과 철학이 감당할 수 없는 허무와 고독 가운데 광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니체는 그의 후대인들에게 반기독교적인 고독과 허무와 가치 무질서의 유산을 남겼습니다. 루터가 “이성은 창녀다”라고 한 말을 400년 후에 니체가 똑 같이 하였습니다. 흔히 “적의 적은 동지다”라고 하지만 니체가 이성을 비판하였다고 하여 행여라도 그를 기독교의 우군으로 오해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루터가 “이성은 창녀다”라고 한 것은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는 이성의 교만을 비판한 것이지만 니체가 그 말을 한 것은 절대자 하나님까지를 부정한 것이었습니다. 마치 포스트모던 사상이 이성의 절대권위를 부정하는 것을 기독교가 마냥 좋아할 일만이 아닌 이유는 적의 적이라고 하여도 동지가 아닌 적이기 때문인 것과 같습니다. 이것을 분별하는 능력이 절실한 것은 니체 이후의 상황이 더욱 다변화 되고 복잡해 졌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니체가 사망한 1900년이 19세기를 마감하고 20세기를 연다는 특별한 상징을 지닌다고 합니다. 니체는 실제로 “사후, 나는 신화가 될 것이다”고 예언을 했는데, 어떤 면에서는 이 말이 사실이 되었습니다. 헤르만 헤세, 앙드레 지드, 프란츠 카프카 등 니체를 선망하는 일련의 작가들이 니체의 사상을 문학으로 형상화하였다고 평가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시초라고 여겨지는 카프카가 니체를 너무나도 존경했다는 사실도 그의 작품과 사상이 니체와 결코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쉽게 추측할 수 있게 합니다.

또한 하이데거와 야스퍼스 등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니체를 실존철학의 시원이라고 주장했고, 프랑스의 포스트 구조주의철학자들도 역시 니체를 위대한 사상가로 평가하며 저마다 계승 의식을 발현했다고 합니다. 후에 한국에서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후속편이라고 할 수 있는『신을 죽인 자의 행로는 쓸쓸했도다』라는 박상륭의 소설이 출간되어 니체에 대한 열광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짐작하게 합니다. 니체가 중요하게 생각한 “권력”과 “힘”과 “귀족주의” 등은 파시즘과 나치에 의해 차용되어 1,2차 세계 대전을 통하여 인류에 대한 만행을 정당화 하는 사상적 우군의 역할에 기여하였습니다.

절대를 부정하는 상대주의는 모든 절대적 가치조차도 상대화 시키지만, 모든 것을 상대화 시키는 상대주의 자체를 절대화 하는 모순으로 인하여 상대주의가 감당할 수 없는 혼란의 씨를 배태하고 있습니다. 니체는 하나님이나 진리나 도덕이나 모든 인간 이상의 본질은 근본적으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필요와 동경에 불과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철학자들에게 “내가 바라는 것은 주지하다시피, 선악의 너머에 서라 - 도덕적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환상을 짓밟아 버리라는 것이다.... 도덕이란 어떤 특정한 해석,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해 하나의 그릇된 해석에 불과하다.”고 하여 하나님의 권위와 주권에 교만한 발길질을 해댔습니다. 하나님, 진리, 도덕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단지 인간적인 필요와 동경에 불과하다고 하였습니다.

신명기 3장 23절 이하에 모세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애절한 기도가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노예로 고통 속에 살아가고 있는 이스라엘을 구원해 내도록 모세를 보내셨습니다. 가지 않으려는 모세를 하나님께서 설득하여 보내셨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모세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시켜 인도하여 40년 만에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나라 없는 백성, 주권 없는 백성, 광야의 방랑자, 유랑의 40년, 외로운 지도자, 반역하는 백성... 그 험난한 세월을 하나님의 기적적인 인도로 지내왔지만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은 모세의 평생소원이었습니다. 꿈에도 그리던 약속의 땅 가나안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민수기 20장의 가데스에서 므리바 물 사건 때 하나님으로부터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을 들었고, 민수기 27장에 가서 다시 한 번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받습니다. 그러나 후계자 여호수아를 지명하고 난 후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에 불이 붙어 애절하게 간구하였습니다. 가나안 입성이 거절된 원인이 모세에게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모세는 백성 때문에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불이익을 당한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위대하심을 굳게 믿었고 반드시 이루어질 가나안 입성을 눈으로 보고 참여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애절한 간구는 거절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안 된다고 하셨지만,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킬 수도 있다는 나름대로 그가 경험하고 믿고 이해한 하나님을 생각하고 혹시 모를 가능성에 애절하게 매달린 것입니다. 나는 모세의 이러한 모습에 위로를 받습니다. 모세의 이러한 모습은 우리 모두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입니다. 바로에게 행했던 열 가지 재앙과 홍해를 건넌 사건과 광야 40년을 지나오면서 그가 보여주었던 지도력과 능력의 측면에서만 모세를 생각하면 성경이 주는 메시지를 놓칠 수 있습니다. 능력을 행하는 모세가 아니라 애절하게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하지만 응답받지 못하고 오히려 거절당하는 사건에서 진정한 기독교의 메시지를 받습니다.

기독교는 인간이 구하는 것을 제공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인간이 필요로 하는 것과 희망과 동경하는 것을 성취하게 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니체는 이 점을 오해하였습니다. 하나님이나 도덕이나 기독교는 인간 스스로 깨달은 필요와 동경이 아닙니다. 그렇게 이해하는 것은 니체가 존경했던 블란스의 무신론자 볼태르식 이해입니다. 볼테르는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지만 모든 것을 설명하려면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불가피하기 때문에“요청으로서의 하나님”은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볼테르나 니체의 한계입니다. 하나님은 요청으로서의 하나님이 아니고 인간의 필요와 동경으로서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인간의 필요와 요청으로서의 하나님은 성경이 계시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의 만든 하나님입니다.

인간은 절대로 스스로 하나님의 필요를 모릅니다. 또한 기독교의 하나님은 인간이 아무리 애절하게 요청하고 간청해도 인간의 요청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 달라는 바울의 간구도 거절되었고, 할 수만 있다면 십자가를 피하고 싶다는 주님의 간구도 거절되었습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요청일 지라도 그것이 성취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복음이 아니기 때문에 그 요청을 거절하시고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만사형통의 기도응답만이 믿음의 증거라고 믿는 이들이 많은 때에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모세나 바울이나 우리 주 예수님의 애절한 간구를 거절하신 하나님의 뜻을 믿고 헤아려 깨닫는 이들이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구하옵나니 나로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편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 하되 여호와께서 너희의 연고로 내게 진노하사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내게 이르시기를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신 3:2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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