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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필벌(信賞必罰)의 원칙을 하나님께 적용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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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10-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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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규모 자연재해가 일어날 때마다 사람들은 각가지 반응을 보입니다. 그러나 이번 아이티 지진에 대한 사람들의 한 가지 공통된 반응은 왜 이런 끔직한 대 자연재해가 최빈국인 아이티에 일어났는가 하는 점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야 지진이 우연히 아이티에 일어난 것으로 생각을 할 것이고, 좀 과학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아이티가 지진대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 할 것입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을 당할 때 사람들은 누구나 ‘왜 하필 나입니까?’라는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911 테러 사건이나, 동남아를 덮쳤던 쓰나미 참사나, 카트리나가 뉴올리언스를 덮쳤을 때 사람들은 저마다 그 사건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내가 아이티 참사 소식을 들었을 때 대뜸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은 아이티의 지진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어떤 재해가 의미가 없어 보일 때입니다. 어떤 일이 원인이나 목적이 분명하면 의미를 찾을 수가 있는 것이고, 원인도 없고 목적도 없다면 그것은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의미가 없다고 하기엔 너무나 엄청난 일인데 도대체 왜 그 일이 일어났는지 원인도 목적도 알 수가 없으면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아이티가 당하고 있는 고통은 어떤 원리나 원칙이나 법칙으로도 설명이 안 됩니다.  천하보다 귀한 수만 명의 생명이 원인도 목적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죽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정신 이상자가 총으로 맨해튼 거리에 지나가는 사람들을 마구 쏘아서 죽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커피를 마시러 나갔다가 죽었고, 어떤 사람은 영화를 보러 나갔다가 죽었고, 어떤 사람은 퇴근길에 죽었고, 어떤 사람은 뉴욕을 방문했다가 죽었습니다. 이럴 때 사람들은 속된 말로 ‘개죽음 당했다’고 합니다. 의미 없는 죽음을 죽었다는 뜻으로 그런 말을 사용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참새 한 마리의 생명까지도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그런 말을 사용할 수 없지만, 수만 명의 아이티인들의 죽음도 그 의미를 알 수 없어 답답합니다.

이번 지진으로 죽거나 장애자가 되거나 피해를 입은 사람들 중에는 나쁜 짓을 한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쁜 짓을 할 능력도 시간도 없고, 당장 나쁜 짓을 할 가능성도 없는 수많은 어린아이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당혹스러운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 누구보다도 삶의 의미를 강조하는 사람들입니다. 아이티인들이 당한 고통과 죽음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없어 답답합니다.

가장 냉소주의적인 철학자라고 할 수 있는 독일의 니체는 고통이 너무 고통스러워 견디기 어려운 이유는 고통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고통에 의미가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담배를 아주 많이 피우던 사람이 폐암에 걸리면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하게 되겠지만, 평생 담배라곤 한 번도 피워보지 않은 사람이 폐암에 걸리면 참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 것이고 그 고통은 더 견디기 어려울 것입니다. 아마도 아이티 사람들 중에는 자기들이 당하는 고통의 의미를 몰라서 더 고통스러운 이들이 많을 것입니다.

이런 재난에 대해서 사람들이 취하게 되는 세 가지 입장과 주장이 있습니다. 첫째는 다른 사람들보다 죄를 많이 지어서 벌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이 공평하지 못하다고 하는 입장이고, 셋째는 이런 불공평하고 무자비한 재난이 일어나는 것을 보아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입니다.

그런데 이상의 세 가지 주장은 모두가 신상필벌(信賞必罰)의 원칙에서 나온 반응들입니다. 신상필벌은 상 줄 사람에게 상을 주고 별 줄 사람에게 벌을 주는 엄격한 원칙입니다. 그 원칙에서 보면 이런 주장을 할 수 있습니다. 이 신상필벌의 원칙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느 사회에서나 소중하게 여기는 원칙입니다. 성경에도 이 신상필벌의 원칙이 상당히 강조되고 있습니다. 성경이 공평하신 하나님에 대하여 말씀할 때는 이 신상필벌의 원칙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도 무엇을 판단할 때 이 원칙이 전제 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소돔성을 멸하시려 할 때 아브라함이 바로 이 신상필벌의 원칙으로 하나님께 어필을 했고(창 18:25), 시편에도 신상필벌의 원칙에 따라 하나님이 어찌 이러실 수 있느냐고 호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구약의 욥기는 욥이 당한 고난에 대하여 욥과 그의 친구들 사이에 이루어진 논쟁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욥은 알 수 없는 재난을 주신 하나님께 항의를 하였습니다. 즉 하나님이 불공평하다고 한 것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이 고난당하는 것을 보아 죄를 지은 것이 틀림없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재난에 대한 세 가지 입장들 중에 욥은 두 번째 입장이고, 욥의 친구들은 첫 번째 입장입니다. 그리고 그 두 입장은 모두 신상필벌의 원칙에 근거한 주장입니다. 욥은 하나님의 책망(욥 40:1-9)을 듣고 무지하고 미천한 중에 너무 많은 말을 한 것을 뉘우치며 손으로 입을 가릴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에서도 신상필벌의 원칙이 강조되고 누구에게나 적용되어야 하지만 문제는 그것을 하나님께 적용하는 것입니다. 그 원칙을 하나님께 적용하게 되면 재난을 당하는 사람은 무조건 죄 때문이라고 정죄하게 되고, 또한 이유를 모르고 재난을 당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불공평하다고 생각하게 되며, 하나님이 불공평하다는 생각은 곧 하나님보다 자기가 옳다는 전형적인 인본주의 생각이기 때문에 그 입장은 곧 세 번째 입장, 즉 하나님이 없다는 주장에까지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아이티가 지진으로 초토화 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는 참사가 일어나자 미국의 크리스천 브로드캐스팅 네트워크(Christian Broadcasting Network, CBN)를 통해 방송선교를 하는 팻 로버트슨(Pat Robertson) 목사와 극우파 라디오 진행자 러시 림보가 아이티 대지진의 원인은 아이티가 프랑스로부터 독립할 때  "악마와 결탁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나빠서라기보다는 신상필벌의 원칙을 하나님께 적용하면 그런 생각과 판단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김홍도 목사가 팻 로버트슨 목사와 비슷한 발언을 하고 있습니다.

욥의 친구들도 나쁜 사람들은 아니지만 신상필벌의 원칙을 하나님께 적용하였기 때문에 욥의 고난은 그가 지은 죄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을 변호한다는 확신에서 그런 주장을 합니다. 독일의 철학자 라이프니츠는 변신론(辯神論)자였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변신론자들은 믿음이 좋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변호하고 나선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수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편을 들고 확신에 차서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사람들은 믿음이 좋은 것으로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 화를 내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욥 42:7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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