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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에 생각하는 환경의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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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07-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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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 잔디밭에 지천인 달래는 봄보다 빨리 왔습니다. 목화밭 사이를 헤집고 드문드문 난 달래를 찾아 캐던 옛날을 더듬으면 감지덕지일 텐데 지천인 달래는 소 닭 보듯 하고 굳이 조갯살 넣고 끓인 향 짙고 맛있는 냉이 된장국을 욕심내는 것은 무슨 심보인지 알 수 없습니다. 달래 쫑쫑 썰어 넣고 고춧가루 깨소금 듬뿍 넣은 양념간장 만들어 따끈한 밤에 비벼 먹으면 봄은 행복합니다.

지겹도록 추웠던 지난겨울의 끝자락, 때늦은 고국의 폭설 소식이 싣고 온 찬바람이 봄볕에 섞여 봄맞이를 시샘함인지 창밖으로 바라본 따뜻한 색깔에 속아 문을 열면 군불을 집혔지만 아직 데워지지 않은 아랫목처럼 찬 기운에 놀라 몸이 움츠려 듭니다. 오는 봄 시샘하는 찬 기운을 거역하듯 발기하는 창가 라일락 꽃 봉오리의 역설을 들으며 봄이 오는 길목에서 소망하나 있다면, 내년에도 봄이 어김없이 제 때에 와 주기를 바라는 것인데, 이는 어쩌면 바보 같고 어쩌면 예언자의 육감 같은 느낌 때문입니다.

환경의 위기가 지구마을을 웅성이게 하고 있습니다. 교토 협약에 가입했다가 탈퇴한 오만한 미국도 뒤늦게 생태계와 지구환경의 위기에 화들짝 놀랜 듯 서둘러 조치를 취하는 것을 보아 환경 문제가 강 건너 불구경이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가난한 나라 강 하류 삼각주 기름진 땅에 삶의 터전을 잡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괴롭히던 이상폭우로 인한 강의 범람이 그런 것으로부터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곳에 예고 없이 들이닥치고, 미국 남부에서는 낯설지 않은 토네이도지만 그것이 일본에 출몰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대기권 안에 이산화탄소가 증가하여 대기권의 온실효과는 극대화 되어 북극과 남극의 얼음을 녹여 해수면을 상승시켜 바닷가 저지대가 침수되고, 높아진 해수의 온도는 예측을 불허하는 폭우와 폭설의 원인이 되어 강우량의 기록을 통한 기후의 예측을 무용지물이 되게 하고 있습니다. 100년에 한 번 올까 말까한 초강력 태풍이 한해에 몇 차례씩이나 불어 닥쳐 그 통계를 감안하고 지은 건물과 해안 시설물의 안전에 적신호가 켜졌습니다. 진보적인 신학계에서는 10계명에다가 "자연을 파괴하지 말라"는 제11 계명이 새로이 첨가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아담이 처음 죄를 범했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던지신 물음은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였습니다. 원죄라고 하는 최초의 범죄는 에덴동산 한가운데 있는 한 나무의 실과를 따먹은 것이었습니다. 이 원죄는 하나님에 대한 범죄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에 대한 범죄 행위는 하나님께 직접적으로 가 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물의 하나인 “선악과”를 매개로 하여 행해졌다는 사실에도 한번쯤 주목해 볼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범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하였고 그것은 곧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파괴하여 살인의 결과를 낳았습니다. 최초의 살인자 가인에게 하나님이 던지신 물음은 “가인아,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타락한 인류에게 던지시는 두 번째 물음입니다. 하나님을 거역한 인간의 범죄는 주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가하는 해악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는 물음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수직적 관계를 문제 삼는 물음이며 “가인아,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는 물음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수평적 윤리적 관계를 문제 삼는 물음입니다. 지금까지 기독교는 이 두 물음만을 비중 있게 다루었습니다. 하지만 20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인류는 이제 또 하나의 새로운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과거에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위기입니다. 인간의 욕망은 끝없는 편리를 추구하여 무모하게 자연을 개발하고 자원을 낭비하며 생태계의 질서를 파괴한 결과 스스로의 생존에 위험을 초래하였습니다. 자원의 낭비와 환경의 오염은 인간이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범죄행위임을 알아야 합니다.

부활이 주는 메시지는 죄에 대하여는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죽어서 확인하고 누리게 될 부활이 아니라 지금 이 땅에서 확인하고 누리는 새 생명의 복을 말합니다. 이 복이 바로 하나님께 대하여 사는 것인데, 하나님께 대하여 사는 것이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하에서 보장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는 자연과 다른 사람과의 잘못된 관계로 인하여 치명적인 손상을 입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 시대의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서 이 시대의 인류를 향하여 던지시는 세 번째 물음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물음은 “인간아, 자연은 어디 있느냐?”는 물음일 듯싶습니다. 우리들의 선조가 그랬던 것처럼 “내가 자연을 지키는 자입니까?”라고 뻔뻔스럽게 반문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연을 파괴하는 행위는 인간에 대한 인간의 착취 행위의 연장선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는 자연을 지켜야 하고 보존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생태계의 파괴와 환경의 오염이 발생시키는 가공할 폐해는 낭비와 사치와 무절제가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가하는 죄이며 나아가 살인이라는 사실을 일깨우는 심각한 메시지가 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는 좀 불편하게 살고, 좀 덜 깨끗하게 살아 에너지를 줄이고 합성 세제를 덜 쓰는 것도 이웃에 대한 사랑이 되고 하나님께 대하여 사는 것이 된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깨달았으면 합니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 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롬 8:19-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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