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을 대적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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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송연ㆍ2011-03-01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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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1부 예배를 마치고 몇몇 연세드신 권사님들을 모시고, 아침 해장국을 먹고 있던 자리에서 였다. 때마침 이른 시간이어서 그런지, 우리 외에는 손님이 없음에도, 한 번 더 주위를 휘휘 둘러보신 권사님 중 한 분께서 조심스럽게 입을 여신다. 듣는 것만으로도 부끄럽고 가슴 아픈 일들이지만, 곪은 상처를 그대로 두면 온 몸이 썩어들어가는 것, 잠시 아프더라고 썩은 부분을 먼저 진단하여 그 부분을 도려내어야 새살이 돋아난다는 마음으로 우리 모두의 치부라고 할 수 있는 내용을 이곳에 옮겨본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역사와 전통이 가장 오래된 교회, 따라서 숫적으로도 가장 큰 교회가 최근 목사 부부의 재정 비리 문제로 인하여 큰 몸살을 앓고 있단다. 사모님과 목사님이 여행을 가면서 지출한 경비를 교회 재정에서 끊어갔다는 것이다. 그 목사님께서는 나이가 60이 넘으신 분으로 이번 사태가 은혜롭게 마무리되지 못하면, 평생을 달려오신 목회사역에 명예로운 은퇴를 기대할 수 없을 것이라며 주석까지 다신다.
어느 교회는, 목사님께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헌금은 모두 자신에게 바쳐진 것인양 착복한다는 것, 특별히 심방 감사 헌금을 드리면 그 헌금은 아예 자신의 주머니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다음 주 주보에 심방 감사헌금을 하신 분의 이름이 올라가는 법은 일체 없다고 한다. “심방 감사 헌금” 헌금이면 어떤 명분이 되었건 모두 주님께 드렸다는 것이고, 개인이 심방을 하느라 수고하였다고 하여, 하나님께 드려진 헌금을 중간에서 가로채는 것은 도적질이란 것이다. 옳은 말씀이다.
또 다른 어느 교회는, 목사님이 새로 부임하시면서, 자신이 부임하기 전, 그 교회에서 피아노를 치던 젊은 자매를 내보내고 사모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피아노를 치면서 (물론 이 사모님은 피아노를 전공하신 분) 피아니스트에게 나가던 사례비를 자신이 받는다고 한다.
다른 권사님 한 분이, 아무런 말도 못하고 그저 묵묵히 식사만 하고 있는 우리 목사님이 답답하다는 듯 거들고 나선다. “목사님, 우리 목사님은 그런 분이 아니어서 말씀인데요, 요즘 교회 목사들이 많이들 그래요, 심방 헌금은 아예 자신의 주머니에 들어가는 것, 그런 것은 뭐 대단하지도 않아요, 어떤 교회 목사님은, 자신의 아파트를 사는데, 입주금을 교회 재정 집사와 짜고 교회 재정에서 끊었다고 해요. 교회 재정 집사는 자신의 말을 잘 듣는 사람을 골라 형식적으로 세워둔 것이지요. 그러다 어느 날, 그 사람과 목사님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게 되자, 그 재정 집사가 밖에 나가서 모두 불게 된 것이고 그렇게 되어, 지금 교회 성도의 과반수 이상이 떠나가고 교회가 문을 닫을 지경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더 기막히는 것은 그런 비리들이 공공연히 행해지는 일들이고, "들키면 문제가 되는 것이지, 들키지만 않으면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김 오동 목사님께서는 "11계명은, 들키지 말라" 는 것이다. 라고 하는 재밌고도 해학적인 글을 게시판에 올려두기도 하셨지만, 이 얼마나 기막히고 황당한 이야기들인가? 듣고 있는 내가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다. 못들은 척 고개를 푹 숙이고 앉아 밥만 먹고 있자니, 문자 그대로,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알 수가 없고 입맛이 쓰디썼다.
교회 지도자들의 기막힌 비리를 들을 때마다 나는 (워메~ 우찌 이런 일이~ㅋㅋㅋ)라며, 농(弄)으로 치부해 버리고 싶고, 진실이 아니라고 강경하게 얼굴 붉혀가며 부인하고도 싶다. 그럼에도 그런 자들이 버젓이 존재한다는 것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현실, 이것이 현대 기독교가 사양길로 접어드는 요인 중 하나가 아닐까, 그렇다면, 이것이야말로 우리(성도)가 힘을 모아 함께 고민하며 함께 풀어나가야 할 중차대한 과제가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된다.
바쳐진 재정을 투명하게 사용하지 않는 것은 주님을 대적하는 것:
주님 창고, 주님의 집, 교회당에 들어온 재물을 바르게 관리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고 목사나 다른 그 누구가 자기 마음대로 사용해도 좋다고 생각하는 이가 있다면, 이는 분명히 교회 재정의 주인이신 주님을 직접 대적하는 악한 행위이다. 물론, 보편적 의미에서는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이지만, 특별한 의미로서 주님의 이름으로 바쳐진 헌금과 연보는 주님의 것으로 구분되어야 한다. “도적질하지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하느냐? ( 롬 2:21)” 선생, 교사, 목사, 장로, 권사, 집사라고 해서 바쳐진 물건을 도적질해도 좋다는 말씀이 성경 66권 그 어느 곳에도 없다. 꼭 십일조를 내지 못하는 사람만이 도적이 아니란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오래 전서부터, 우리 아멘넷에서 뿐 아니라 곳곳에서, 십일조에 대한 의견을 주제로 올리는 순간부터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이견(異見)이 분분하다. 한쪽은 ‘십일조는 율법의 산물이며 신약과는 무관할 뿐 아니라 십일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급하신 적도 없다.’라고 주장하고, 다른 한쪽은 ‘십일조는 반드시 내어야 한다, 아니면 도둑이다’ 라며 말라기 3장의 한 구절을 인용, 은근히 협박성 강조를 함으로써,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이 구속 주이신 예수님을 채 만나기도 전에 포기를 해버리도록 무거운 짐의 걸림돌을 그들의 어깨 위에 올려놓는 목회자, 부흥강사들도 있다. 어떤 목회자는 십일조를 내면 이 땅 위에서 잘먹고 잘사는 복(福)을 받는다고 하여, 십일조가 모든 축복의 바로미터라도 되는 양, 기복사상을 주입시킨다.
물론, 모든 목사님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현대 잘못 된 목사님들이나 부흥강사들이 축복을 빌미로, 말라기서를 들어서 십일조를 강조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십일조 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도적이라고 성도들을 욱박지르기도 한다. 그러나 십일조를 내지 못하는 사람을 모두 도적이라고 욱박지르기 전, 주님께 바쳐진 헌물을 도적질하는 자들이야말로 진짜 강도요, 절도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그런 주장은 주님의 구원하심(영과 육의)의 축복을 흐리게 하는 억지 주장일 뿐, 사실, 이 모두가 다 십일조에 대한 올바른 성서적 견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 필자가 본 성서적 입장이다. (십일조 문제는 지난 번에 다룬 칼럼 글을 참조하기 바란다.) 말씀을 어느 한 구절만 똑 떼거나, 어느 한 문장에만 집착하지 말고 통전적이고도 유기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앞뒤 문맥을 잘 살펴본 다음에야 바른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말라기서를 잘 읽어보면, 처음서부터, 십일조 내지 못하는 일반 성도들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집에 바쳐진 헌물을 도적질하는 제사장, 레위인, 성직자라고 떠받들림 받기를 좋아하나 하나님의 것에 대해서는 경멸이 여기는 레위인들을 향해서 책망하는 주님의 음성이 더 강하고 더욱 격렬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지면 관계로 다 읽을 수는 없지만, 말라기 1: 6절을 보자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 일찐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찐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연이어, 말라기 2장 1절 “ 너희 제사장들아 이제 너희에게 이같이 명령하노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만일 듣지 아니하며 마음에 두지 아니하여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려 너희의 복을 저주하리라 내가 이미 저주하였나니 이는 너희가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이런 사실만 바로 안다면, 십일조는 반드시 내어야 한다, 낼 필요가 없다, 양분론으로 심각하게 대립할 필요가 없고 헌금과 헌물 때문에 성도끼리 다툴 이유가 없다. 또 십일조가 폐기된 율법이냐, 아니냐, 따지는 것을 떠나, 신앙이 어린 성도들, 몰라서, 혹은 너무 어려워서 십일조 헌금을 드리지 못하는 사람을 도적이라 몰아갈 수는 더더욱 없다. 그 사람의 믿음이 아직 그만큼 성장하지 못하여서 그런 것이라고 한다면, 그런 성도를 어찌 도적이라고 윽박지를 수 있다는 말인가? 그보다는 알고 짓는 죄, 하나님의 집에 들어온 헌금을 마음대로 착복하는 것이 신앙이 어려서, 혹은 몰라서 십일조를 드리지 못하는 사람들보다 더 큰 도적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주님의 집에 바쳐진 물질, 내 것이 아닌 것을 내 것인 양, 착복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경멸이 여기는 것이요,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 그 자체이다.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의 예를 잘 읽어 보라. (삼상 2: 12-34) 횡령죄는 세상 국법에서도 엄하게 다스린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럼에도 목회자나 어느 개인이 자신의 뜻대로 재정을 착복하고 있다면, 이 모두가 성도(목회자 포함)의 물질관(觀)이 분명하지 못한 데서 오는 폐단이라고 하겠다.
헌금과 연보의 차이:
연보도 헌금도 마음을 담아 정성껏 하나님께 바치는 물질이란 점에서는 같다. 성질로는, 헌금은 바치는 성질을 말하고, 연보는 자기를 위해서 심는 성질, 즉 가난한 이웃을 돕기 위하여 드려진다는 뜻이 더 강하다. 우리가 중심을 기우려 바치면 바친 만큼 심어져서 풍성한 결실을 주사 우리로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려는 것이 연보제도 곧 헌금제도이나, 헌금은 하나님 앞에 드릴 때 자기의 중심을 기울여 하나님께 바친다는 뜻이 더 크게 담겨져 있다고 보면 틀림이 없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연보궤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눅21:1),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 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눅21:4)
헌금이나 연보를 드리는 자의 자세:
1) 미리 준비하는 마음이어야 한다.
”이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케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고후9:5)”
2) 기쁜 마음으로 풍성히 해야 한다.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고후8:2)””이 직무로 증거를 삼아 너희의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과 저희와 모든 사람을 섬기는 너희의 후한 연보를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고후9:13)”
3) 감사가 넘치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고전16:2)” ”너희가 모든 일에 부요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저희로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고후9:11)”
헌금이나 연보나 모두 주님께 드리는 마음으로 정성껏 드려야 하지만, 특별히 감사하는 마음,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려야 한다. “이것을 조심함은 우리가 맡은 이 거액의 연보로 인하여 아무도 우리를 훼방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고후8:20)” 헌금이나 헌물, 연보 등, 복을 받으려고 계산 된 마음이나, 도적이 되지않으려고 의무적인 마음으로 드리는 것은 주님께서 받지도 않으신다. 그러나 감사하는 마음, 자원하는 마음으로 주께 드리면 주님은 그것을 의의 열매로 받아주신다.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고후9:10 상반절)”,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고후9:10 하반절)”
유다가 제 갈길로 간 이유:
많은 목사님이,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하고 십자가에 내어준 것 때문에 그는 영원한 저주의 자리에 들어간 것이라고 설교하신다. 그러나 필자가 보는 성경 관점은 조금 다르다.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준 것이 아니다. 십자가는 예수님 스스로 택하신 길이다. 가롯 유다는 평소에 하나님께 바쳐진 재정 훔치기를 두려워하지 않던 도적(요 12:6절 참조)이었기에, 죄(뱀, 사단)가 그를 주장했던 것이다. 그는 죄가 이끄는 대로 이용당했을 뿐이다. 메시야가 지신 그 십자가는 누가 내어준 것도 아니고, 사단과의 싸움에 패배해서가 아니라, 그 십자가를 기꺼이(willingly) 선택하신 것은 그 누구의 힘(force)에 의해서가 아닌, 예수님 당신 자신 스스로의 선택이심을 알아야 한다. (요 10:17-18절 참조)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경에 기록된 대로 십자가를 지셨다. 그러니까, 가롯 유다가 아니어도 어떤 방법이건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신다는 것이다. 그 일을 성취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된 자, 그는 평소에 하나님께 바쳐진 헌금을 훔치는 도적이었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평소에 정직하고 청결한 마음의 소유자에게 사단이 갑자기 들어간 것이 아니라, 평소에도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기를 즐기던 자였고, 그는 예수님을 3년이나 따라 다니며 구원의 길을 배웠지만, 결국 구원의 길을 버리고 욕심을 따라 스스로 멸망의 길을 자초했다는 것은 사뭇 흥미있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행 1: 26절 참조)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 약 1: 15절)하신 말씀이 그에게 응한 것이다! (창 4: 6-7절 참조), 엄밀히 말해서 가롯 유다는 주님의 것을 도적질 하는 그 때부터 이미 죄의 노예가 되어 끌려다녔고 그 결과로 그는 끝까지 죄(사단)에게 패배하고 무릎꿇게 된 것이었다고 보는 것이 더 옳다.
결론적으로,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큰 축복은 죄에서 자유 함을 누리는 것이다. 십자가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혼과 육체가 자유함을 누리게 되는 것, 이보다 더 큰 축복은 없다. 그 다음에 다른 축복은 주님을 믿고 사랑하는 자가 누리는 축복으로서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것이며, 우리가 축복받기 위해서, 조건적 십일조를 내어서도 안 되고 도둑이 되지 않기 위해서 십일조를 의무적이거나 억지로 내어야만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감사함으로 할 수 있는 나의 최선으로 주님께 드려야 한다.
헌금보다는 예수님을 개인의 구세주로 받아드리고 주인으로 믿는 것이 더 우선 순위이다. 헌금을 강조하여 어린 성도들의 영혼에 거치는 돌이나 가시채를 깔지말고 예수님의 고귀한 핏빛 사랑을 전해주도록 해야 한다. 십일조는 커녕 단 한푼의 연보를 바친 적없는 갈보리의 한편 강도는 주님과 함께 낙원에 들어갔다. 이것이 구원의 도(道)다.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이 구원의 도(道), 십자가의 길을 전파하는데 전심전력을 다해야 한다. 그것만이 영혼을 살리는 길이다. 우리 중 누가 쓸데없는 욕심으로 재정을 개인 용도로 착복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야 말로 진짜 강도요, 도적이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 같다.
“그 날에 사람을 세워 곳간을 맡기고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에게 돌릴 것 곧 율법에 정한대로 거제물과 처음 익은 것과 십일조를 모든 성읍 밭에서 거두어 이 곳간에 쌓게 하였노니 이는 유다 사람이 섬기는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을 인하여 즐거워함을 인함이라(느 12: 44)”,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 4: 2)”
별첨:
교회 재정 이렇게 관리하라:
아래는 오래 전, 우리 아멘넷의 기사로 올려진 "시드선교회 직원70만불 횡령"이란 제목하에, 거액의 선교부 재산을 횡령당하여 세상법정에 고소를 해둔 상태라는 안타까운 기사를 읽고 그 아래 남긴 필자의 댓글인데,. 주님의 피로 값주시고 산 교회를 섬기는 모든 분들이 이런 일을 통하여 자기가 섬기고 있는 교회의 재정부 상태는 어떠한가 되돌아 볼 수 있는 계기, 또한 아직도 잘못된 시스텀으로 교회재정을 운영하고 계시는 교회가 있으면, 이런 것을 계기삼아 주님 앞에서 다시 한번 살펴보고 각성하기 바라는 마음, 젊은 사역자님들, 개척교회를 시작하시는 분들에게 행여나 도움을 드릴 수 있을까 하여, 이곳에 퍼다 놓는다.
어떻게 해서, 그런 큰 돈을, 재무 혼자서 관리하게 했는지, 담임(책임자)목사님외 다른 진실한 두 사람을 더 넣어 세 사람이 authorized signers가 되어야 하고, 그 중 두 사람이 싸인을 해야만 돈을 인출할 수 있도록 해 두어야 합니다. 각 교회에서도 이 방법을 사용하면, 교회 재무 집사(혹은 장로)가 단체의 돈을 혼자서 횡령을 할 수 없게 된다.
이것이 미국 내의 business checking account system이다. (아, 물론 목사님이시건 다른 성도님이건 교회 일을 위해서 급하게 작은 돈을 사용해야할 일이 있으면, 자신의 돈을 먼저 쓰고 후에 영수증을 첨부하여 되돌려 받도록 해 두어야 한다. 이것을 reimbursement system이라고 하여, 미국 선교부에서 사용하는 방법이다.)
교회는 물론, nonprofit organization이지만, 법적으로는 상업적 제도를 도입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교회들이 이 방법을 택하면 이런 불상사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물론, 그 두 사람의 관계도 부부를 넣거나, 너무 친한 사람을 넣어서는 안된다. 어느 교회는 개척교회라고 목사 부부가 'co-signers'가 되는 데, 이것도 권장할 일이 못된다. 아니, 목사 부부가 재정부에 함께 'co-signers'가 되어서는 절대 안된다!!
교회는 목사님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며, 목사님을 비롯한 각 직분을 맡은 자들은 주님의 교회를 맡아서 섬기는 종들일 뿐(청지기 의식)이란 것을 알게되면, 사모는 재직의 일원이 될 수 없다는 것도 알수가 있을 것이다.
교회 재정을 개척 당시부터 이런 시스템으로 구축을 해 두면, 설사 그중 한명이 시험이 들어 그 교회를 떠난다고 하여도 다른 사람을 대치해 두면 되고 다른 사람을 찾을 때까지 담임 목사님과 그 남은 사람이 함께 싸인을 해야만 돈을 인출하도록 되니까, 아무런 어려움도 없고, 혹여 삯꾼 목자가 있어, 주님께 드려진 헌물을 자신의 임의대로 사용하는 폐단을 막을 수 있다.
이렇게 잘 짜여진 재정부 시스텀을 성도들이 알게되면, 신뢰감이 생겨 더욱 좋은 교회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된다.
교회의 일일수록, 반드시 성도들 중에서, 적재적소에 적절한 인재를 찾아서 기용하여 일을 맡기되 담임 목사님의 통제하에 행정이 잘 관리되도록 해야한다. 하물며, 이런 큰 단체에서 이렇게 주먹구구식으로 일하다가 이런 황당한 일을 일으켜 세상법정에 고소까지 한다는 것은 심히 부끄러운 일입니다. 죄송하지만, 책임 목사님이 누구신지, 능력부족이란 지탄의 소리를 면치못할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역사와 전통이 가장 오래된 교회, 따라서 숫적으로도 가장 큰 교회가 최근 목사 부부의 재정 비리 문제로 인하여 큰 몸살을 앓고 있단다. 사모님과 목사님이 여행을 가면서 지출한 경비를 교회 재정에서 끊어갔다는 것이다. 그 목사님께서는 나이가 60이 넘으신 분으로 이번 사태가 은혜롭게 마무리되지 못하면, 평생을 달려오신 목회사역에 명예로운 은퇴를 기대할 수 없을 것이라며 주석까지 다신다.
어느 교회는, 목사님께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헌금은 모두 자신에게 바쳐진 것인양 착복한다는 것, 특별히 심방 감사 헌금을 드리면 그 헌금은 아예 자신의 주머니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다음 주 주보에 심방 감사헌금을 하신 분의 이름이 올라가는 법은 일체 없다고 한다. “심방 감사 헌금” 헌금이면 어떤 명분이 되었건 모두 주님께 드렸다는 것이고, 개인이 심방을 하느라 수고하였다고 하여, 하나님께 드려진 헌금을 중간에서 가로채는 것은 도적질이란 것이다. 옳은 말씀이다.
또 다른 어느 교회는, 목사님이 새로 부임하시면서, 자신이 부임하기 전, 그 교회에서 피아노를 치던 젊은 자매를 내보내고 사모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피아노를 치면서 (물론 이 사모님은 피아노를 전공하신 분) 피아니스트에게 나가던 사례비를 자신이 받는다고 한다.
다른 권사님 한 분이, 아무런 말도 못하고 그저 묵묵히 식사만 하고 있는 우리 목사님이 답답하다는 듯 거들고 나선다. “목사님, 우리 목사님은 그런 분이 아니어서 말씀인데요, 요즘 교회 목사들이 많이들 그래요, 심방 헌금은 아예 자신의 주머니에 들어가는 것, 그런 것은 뭐 대단하지도 않아요, 어떤 교회 목사님은, 자신의 아파트를 사는데, 입주금을 교회 재정 집사와 짜고 교회 재정에서 끊었다고 해요. 교회 재정 집사는 자신의 말을 잘 듣는 사람을 골라 형식적으로 세워둔 것이지요. 그러다 어느 날, 그 사람과 목사님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게 되자, 그 재정 집사가 밖에 나가서 모두 불게 된 것이고 그렇게 되어, 지금 교회 성도의 과반수 이상이 떠나가고 교회가 문을 닫을 지경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더 기막히는 것은 그런 비리들이 공공연히 행해지는 일들이고, "들키면 문제가 되는 것이지, 들키지만 않으면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김 오동 목사님께서는 "11계명은, 들키지 말라" 는 것이다. 라고 하는 재밌고도 해학적인 글을 게시판에 올려두기도 하셨지만, 이 얼마나 기막히고 황당한 이야기들인가? 듣고 있는 내가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다. 못들은 척 고개를 푹 숙이고 앉아 밥만 먹고 있자니, 문자 그대로,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알 수가 없고 입맛이 쓰디썼다.
교회 지도자들의 기막힌 비리를 들을 때마다 나는 (워메~ 우찌 이런 일이~ㅋㅋㅋ)라며, 농(弄)으로 치부해 버리고 싶고, 진실이 아니라고 강경하게 얼굴 붉혀가며 부인하고도 싶다. 그럼에도 그런 자들이 버젓이 존재한다는 것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현실, 이것이 현대 기독교가 사양길로 접어드는 요인 중 하나가 아닐까, 그렇다면, 이것이야말로 우리(성도)가 힘을 모아 함께 고민하며 함께 풀어나가야 할 중차대한 과제가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된다.
바쳐진 재정을 투명하게 사용하지 않는 것은 주님을 대적하는 것:
주님 창고, 주님의 집, 교회당에 들어온 재물을 바르게 관리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고 목사나 다른 그 누구가 자기 마음대로 사용해도 좋다고 생각하는 이가 있다면, 이는 분명히 교회 재정의 주인이신 주님을 직접 대적하는 악한 행위이다. 물론, 보편적 의미에서는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이지만, 특별한 의미로서 주님의 이름으로 바쳐진 헌금과 연보는 주님의 것으로 구분되어야 한다. “도적질하지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하느냐? ( 롬 2:21)” 선생, 교사, 목사, 장로, 권사, 집사라고 해서 바쳐진 물건을 도적질해도 좋다는 말씀이 성경 66권 그 어느 곳에도 없다. 꼭 십일조를 내지 못하는 사람만이 도적이 아니란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오래 전서부터, 우리 아멘넷에서 뿐 아니라 곳곳에서, 십일조에 대한 의견을 주제로 올리는 순간부터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이견(異見)이 분분하다. 한쪽은 ‘십일조는 율법의 산물이며 신약과는 무관할 뿐 아니라 십일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급하신 적도 없다.’라고 주장하고, 다른 한쪽은 ‘십일조는 반드시 내어야 한다, 아니면 도둑이다’ 라며 말라기 3장의 한 구절을 인용, 은근히 협박성 강조를 함으로써,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이 구속 주이신 예수님을 채 만나기도 전에 포기를 해버리도록 무거운 짐의 걸림돌을 그들의 어깨 위에 올려놓는 목회자, 부흥강사들도 있다. 어떤 목회자는 십일조를 내면 이 땅 위에서 잘먹고 잘사는 복(福)을 받는다고 하여, 십일조가 모든 축복의 바로미터라도 되는 양, 기복사상을 주입시킨다.
물론, 모든 목사님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현대 잘못 된 목사님들이나 부흥강사들이 축복을 빌미로, 말라기서를 들어서 십일조를 강조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십일조 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도적이라고 성도들을 욱박지르기도 한다. 그러나 십일조를 내지 못하는 사람을 모두 도적이라고 욱박지르기 전, 주님께 바쳐진 헌물을 도적질하는 자들이야말로 진짜 강도요, 절도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그런 주장은 주님의 구원하심(영과 육의)의 축복을 흐리게 하는 억지 주장일 뿐, 사실, 이 모두가 다 십일조에 대한 올바른 성서적 견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 필자가 본 성서적 입장이다. (십일조 문제는 지난 번에 다룬 칼럼 글을 참조하기 바란다.) 말씀을 어느 한 구절만 똑 떼거나, 어느 한 문장에만 집착하지 말고 통전적이고도 유기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앞뒤 문맥을 잘 살펴본 다음에야 바른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말라기서를 잘 읽어보면, 처음서부터, 십일조 내지 못하는 일반 성도들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집에 바쳐진 헌물을 도적질하는 제사장, 레위인, 성직자라고 떠받들림 받기를 좋아하나 하나님의 것에 대해서는 경멸이 여기는 레위인들을 향해서 책망하는 주님의 음성이 더 강하고 더욱 격렬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지면 관계로 다 읽을 수는 없지만, 말라기 1: 6절을 보자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 일찐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찐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연이어, 말라기 2장 1절 “ 너희 제사장들아 이제 너희에게 이같이 명령하노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만일 듣지 아니하며 마음에 두지 아니하여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려 너희의 복을 저주하리라 내가 이미 저주하였나니 이는 너희가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이런 사실만 바로 안다면, 십일조는 반드시 내어야 한다, 낼 필요가 없다, 양분론으로 심각하게 대립할 필요가 없고 헌금과 헌물 때문에 성도끼리 다툴 이유가 없다. 또 십일조가 폐기된 율법이냐, 아니냐, 따지는 것을 떠나, 신앙이 어린 성도들, 몰라서, 혹은 너무 어려워서 십일조 헌금을 드리지 못하는 사람을 도적이라 몰아갈 수는 더더욱 없다. 그 사람의 믿음이 아직 그만큼 성장하지 못하여서 그런 것이라고 한다면, 그런 성도를 어찌 도적이라고 윽박지를 수 있다는 말인가? 그보다는 알고 짓는 죄, 하나님의 집에 들어온 헌금을 마음대로 착복하는 것이 신앙이 어려서, 혹은 몰라서 십일조를 드리지 못하는 사람들보다 더 큰 도적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주님의 집에 바쳐진 물질, 내 것이 아닌 것을 내 것인 양, 착복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경멸이 여기는 것이요,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 그 자체이다.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의 예를 잘 읽어 보라. (삼상 2: 12-34) 횡령죄는 세상 국법에서도 엄하게 다스린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럼에도 목회자나 어느 개인이 자신의 뜻대로 재정을 착복하고 있다면, 이 모두가 성도(목회자 포함)의 물질관(觀)이 분명하지 못한 데서 오는 폐단이라고 하겠다.
헌금과 연보의 차이:
연보도 헌금도 마음을 담아 정성껏 하나님께 바치는 물질이란 점에서는 같다. 성질로는, 헌금은 바치는 성질을 말하고, 연보는 자기를 위해서 심는 성질, 즉 가난한 이웃을 돕기 위하여 드려진다는 뜻이 더 강하다. 우리가 중심을 기우려 바치면 바친 만큼 심어져서 풍성한 결실을 주사 우리로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려는 것이 연보제도 곧 헌금제도이나, 헌금은 하나님 앞에 드릴 때 자기의 중심을 기울여 하나님께 바친다는 뜻이 더 크게 담겨져 있다고 보면 틀림이 없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연보궤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눅21:1),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 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눅21:4)
헌금이나 연보를 드리는 자의 자세:
1) 미리 준비하는 마음이어야 한다.
”이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케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고후9:5)”
2) 기쁜 마음으로 풍성히 해야 한다.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고후8:2)””이 직무로 증거를 삼아 너희의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과 저희와 모든 사람을 섬기는 너희의 후한 연보를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고후9:13)”
3) 감사가 넘치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고전16:2)” ”너희가 모든 일에 부요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저희로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고후9:11)”
헌금이나 연보나 모두 주님께 드리는 마음으로 정성껏 드려야 하지만, 특별히 감사하는 마음,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려야 한다. “이것을 조심함은 우리가 맡은 이 거액의 연보로 인하여 아무도 우리를 훼방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고후8:20)” 헌금이나 헌물, 연보 등, 복을 받으려고 계산 된 마음이나, 도적이 되지않으려고 의무적인 마음으로 드리는 것은 주님께서 받지도 않으신다. 그러나 감사하는 마음, 자원하는 마음으로 주께 드리면 주님은 그것을 의의 열매로 받아주신다.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고후9:10 상반절)”,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고후9:10 하반절)”
유다가 제 갈길로 간 이유:
많은 목사님이,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하고 십자가에 내어준 것 때문에 그는 영원한 저주의 자리에 들어간 것이라고 설교하신다. 그러나 필자가 보는 성경 관점은 조금 다르다.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준 것이 아니다. 십자가는 예수님 스스로 택하신 길이다. 가롯 유다는 평소에 하나님께 바쳐진 재정 훔치기를 두려워하지 않던 도적(요 12:6절 참조)이었기에, 죄(뱀, 사단)가 그를 주장했던 것이다. 그는 죄가 이끄는 대로 이용당했을 뿐이다. 메시야가 지신 그 십자가는 누가 내어준 것도 아니고, 사단과의 싸움에 패배해서가 아니라, 그 십자가를 기꺼이(willingly) 선택하신 것은 그 누구의 힘(force)에 의해서가 아닌, 예수님 당신 자신 스스로의 선택이심을 알아야 한다. (요 10:17-18절 참조)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경에 기록된 대로 십자가를 지셨다. 그러니까, 가롯 유다가 아니어도 어떤 방법이건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신다는 것이다. 그 일을 성취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된 자, 그는 평소에 하나님께 바쳐진 헌금을 훔치는 도적이었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평소에 정직하고 청결한 마음의 소유자에게 사단이 갑자기 들어간 것이 아니라, 평소에도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기를 즐기던 자였고, 그는 예수님을 3년이나 따라 다니며 구원의 길을 배웠지만, 결국 구원의 길을 버리고 욕심을 따라 스스로 멸망의 길을 자초했다는 것은 사뭇 흥미있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행 1: 26절 참조)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 약 1: 15절)하신 말씀이 그에게 응한 것이다! (창 4: 6-7절 참조), 엄밀히 말해서 가롯 유다는 주님의 것을 도적질 하는 그 때부터 이미 죄의 노예가 되어 끌려다녔고 그 결과로 그는 끝까지 죄(사단)에게 패배하고 무릎꿇게 된 것이었다고 보는 것이 더 옳다.
결론적으로,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큰 축복은 죄에서 자유 함을 누리는 것이다. 십자가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혼과 육체가 자유함을 누리게 되는 것, 이보다 더 큰 축복은 없다. 그 다음에 다른 축복은 주님을 믿고 사랑하는 자가 누리는 축복으로서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것이며, 우리가 축복받기 위해서, 조건적 십일조를 내어서도 안 되고 도둑이 되지 않기 위해서 십일조를 의무적이거나 억지로 내어야만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감사함으로 할 수 있는 나의 최선으로 주님께 드려야 한다.
헌금보다는 예수님을 개인의 구세주로 받아드리고 주인으로 믿는 것이 더 우선 순위이다. 헌금을 강조하여 어린 성도들의 영혼에 거치는 돌이나 가시채를 깔지말고 예수님의 고귀한 핏빛 사랑을 전해주도록 해야 한다. 십일조는 커녕 단 한푼의 연보를 바친 적없는 갈보리의 한편 강도는 주님과 함께 낙원에 들어갔다. 이것이 구원의 도(道)다.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이 구원의 도(道), 십자가의 길을 전파하는데 전심전력을 다해야 한다. 그것만이 영혼을 살리는 길이다. 우리 중 누가 쓸데없는 욕심으로 재정을 개인 용도로 착복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야 말로 진짜 강도요, 도적이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 같다.
“그 날에 사람을 세워 곳간을 맡기고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에게 돌릴 것 곧 율법에 정한대로 거제물과 처음 익은 것과 십일조를 모든 성읍 밭에서 거두어 이 곳간에 쌓게 하였노니 이는 유다 사람이 섬기는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을 인하여 즐거워함을 인함이라(느 12: 44)”,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 4: 2)”
별첨:
교회 재정 이렇게 관리하라:
아래는 오래 전, 우리 아멘넷의 기사로 올려진 "시드선교회 직원70만불 횡령"이란 제목하에, 거액의 선교부 재산을 횡령당하여 세상법정에 고소를 해둔 상태라는 안타까운 기사를 읽고 그 아래 남긴 필자의 댓글인데,. 주님의 피로 값주시고 산 교회를 섬기는 모든 분들이 이런 일을 통하여 자기가 섬기고 있는 교회의 재정부 상태는 어떠한가 되돌아 볼 수 있는 계기, 또한 아직도 잘못된 시스텀으로 교회재정을 운영하고 계시는 교회가 있으면, 이런 것을 계기삼아 주님 앞에서 다시 한번 살펴보고 각성하기 바라는 마음, 젊은 사역자님들, 개척교회를 시작하시는 분들에게 행여나 도움을 드릴 수 있을까 하여, 이곳에 퍼다 놓는다.
어떻게 해서, 그런 큰 돈을, 재무 혼자서 관리하게 했는지, 담임(책임자)목사님외 다른 진실한 두 사람을 더 넣어 세 사람이 authorized signers가 되어야 하고, 그 중 두 사람이 싸인을 해야만 돈을 인출할 수 있도록 해 두어야 합니다. 각 교회에서도 이 방법을 사용하면, 교회 재무 집사(혹은 장로)가 단체의 돈을 혼자서 횡령을 할 수 없게 된다.
이것이 미국 내의 business checking account system이다. (아, 물론 목사님이시건 다른 성도님이건 교회 일을 위해서 급하게 작은 돈을 사용해야할 일이 있으면, 자신의 돈을 먼저 쓰고 후에 영수증을 첨부하여 되돌려 받도록 해 두어야 한다. 이것을 reimbursement system이라고 하여, 미국 선교부에서 사용하는 방법이다.)
교회는 물론, nonprofit organization이지만, 법적으로는 상업적 제도를 도입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교회들이 이 방법을 택하면 이런 불상사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물론, 그 두 사람의 관계도 부부를 넣거나, 너무 친한 사람을 넣어서는 안된다. 어느 교회는 개척교회라고 목사 부부가 'co-signers'가 되는 데, 이것도 권장할 일이 못된다. 아니, 목사 부부가 재정부에 함께 'co-signers'가 되어서는 절대 안된다!!
교회는 목사님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며, 목사님을 비롯한 각 직분을 맡은 자들은 주님의 교회를 맡아서 섬기는 종들일 뿐(청지기 의식)이란 것을 알게되면, 사모는 재직의 일원이 될 수 없다는 것도 알수가 있을 것이다.
교회 재정을 개척 당시부터 이런 시스템으로 구축을 해 두면, 설사 그중 한명이 시험이 들어 그 교회를 떠난다고 하여도 다른 사람을 대치해 두면 되고 다른 사람을 찾을 때까지 담임 목사님과 그 남은 사람이 함께 싸인을 해야만 돈을 인출하도록 되니까, 아무런 어려움도 없고, 혹여 삯꾼 목자가 있어, 주님께 드려진 헌물을 자신의 임의대로 사용하는 폐단을 막을 수 있다.
이렇게 잘 짜여진 재정부 시스텀을 성도들이 알게되면, 신뢰감이 생겨 더욱 좋은 교회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된다.
교회의 일일수록, 반드시 성도들 중에서, 적재적소에 적절한 인재를 찾아서 기용하여 일을 맡기되 담임 목사님의 통제하에 행정이 잘 관리되도록 해야한다. 하물며, 이런 큰 단체에서 이렇게 주먹구구식으로 일하다가 이런 황당한 일을 일으켜 세상법정에 고소까지 한다는 것은 심히 부끄러운 일입니다. 죄송하지만, 책임 목사님이 누구신지, 능력부족이란 지탄의 소리를 면치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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