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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에 생각하는 고통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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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15-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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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텃밭에도 생명들의 살아남이 한창입니다. 흉물스럽게 마당 이곳저곳 쌓여 있던 눈이 언제 다 녹았는지 모릅니다. 내가 아직은 겨울이라고 생각하고 방 안에 웅크리고 있는 동안 매운바람 속에서 꼼지락거리던 생명들이 슬금슬금 겨울 담을 넘어와 텃밭을 다 점령해 버렸습니다. 햇볕이 유난히 많이 닿는 곳에 모습 드러낸 몇몇 신선초, 참나물, 미나리, 파가 봄의 전령인줄 알았는데 어느새 마당 전체를 장악한 점령군입니다. 이 때쯤 우리네 선조들은 지필묵 준비하여 “立春大吉”이라 써서 붙이고 풍년을 기원했습니다. 좋은 날만 오기를, 행복한 날만 오기를, 건강한 날만 오기를, 딱히 반드시는 아닐지라도 큰 욕심 아닌 그런 날들이 많기를 기원하였습니다. 이런 소시민들이 다 창조주 하나님을 알고 믿게 된다면 인생이 더 행복하고 풍성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배워가면서 하나님 나라의 소시민적 행복과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는 한 사람의 증인입니다.   

나는 내가 봄을 좋아하는 이유를 잘 설명할 수 없습니다. 온갖 것들의 살아남이 좋고 봄의 흙이 좋고 봄의 냄새가 좋습니다. 나는 봄에 흙 마당 쓰는 것을 좋아합니다. 흙을 파고 뒤집고 돌과 사금파리 비닐 조각 같은 것을 골라내면 흙이 좋아하는 것 같아 즐겁습니다. 겨우내 음식 쓰레기 썩힌 거름 파내 섞어주고 깻묵 퇴비사다 올개닉으로 외식까지 시켜주면 흙은 호강이다 싶어 흡족해 하는 것 같아 즐겁습니다. 흙만 좋아하는 게 아니고 흙을 먹고 사는 지렁이 땅강아지들도 덩달아 좋아하는 것이 좋습니다. 나의 눈치를 보며 지렁이 잡아먹는 새들도 반갑습니다. 지렁이 잡아먹는다고 한 번도 싫은 소리 한 적 없지만 남의 것 훔쳐 먹는 것처럼 눈치보고 나의 존재를 두려워하는 새들을 배려하여 숨어서 지켜보는 것의 즐거움도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땅을 좋은 땅으로 가꾸는 것은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인데 푸성귀 지렁이 땅강아지 새들까지 좋아하니 나는 그것들과 함께 즐겁습니다. 담벼락이나 벽돌 틈새를 비집고 자신을 덮고 있는 낙엽 밀어제치고 나오는 생명들이 좋습니다. 신선초 참나물 미나리 파 등은 씨를 뿌리지 않아도 작년 것들이 다시 나온 것들입니다. 연한 신선초 잎 하나 뜯어 먹어보니 작년 그 신선초가 틀림없습니다. 한 뼘도 넘게 자란 파 베어다가 간장에 썰어 넣어 먹어보니 변한 게 하나도 없습니다. 낚시꾼들이 금방 잡은 싱싱한 물고기를 즐기는 것과 텍사스의 목장에서 금방 잡은 신선한 고기를 즐기는 것보다 봄의 푸성귀를 좋아하는 것이 창조질서에 더 어울린다는 어린아이 같은 생각을 해보기도 합니다. 

새싹 중에는 다년생 뿌리에서 돋는 것이 있고 씨앗에서 나온 것도 있습니다. 씨앗은 자신을 희생하여 새 싹을 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희생하는 씨앗으로 당신 자신의 대속의 죽음을 설명하셨고 그 열매로 부활을 설명하셨습니다. 이런 설명으로 우리는 복음의 일부만을 이해할 뿐입니다. 파종과 결실의 비유는 복음을 다 설명한 것이 아닙니다. 씨앗의 생물학적 원리를 뛰어 넘는, 우리가 가늠할 수 없는 비밀의 풍성함이 복음 안에 들어 있습니다. 씨앗의 희생은  고난과 고통입니다. 고난과 고통을 줄여 고통이라고 하겠습니다.

고통을 영어로 pain이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라틴어 poena에서 왔는데, 그 뜻은 ‘벌’이라고 합니다. ‘고통’의 의미가 ‘벌’이라는 뜻에서 유래하였다는 것은 성경적으로도 설명이 가능한 것입니다. 인간이 싫어하는 모든 것을 고통이라고 할 때 그것은 죄의 결과입니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통이 ‘벌’이라는 측면은 우리가 자칫 간과하기 쉽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벌 받을 죄가 없는데도 우리가 받을 벌을 대신 받으셨지만, 벌이란 지은 죄의 대가이기 때문에 정당하게 받아야 합니다. 인간은 책임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잘못하여 죄를 짓더라도 반드시 죄의 대가인 벌을 정당하게 받는 것이 그 상황에서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는 최선의 길이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피하시지 않으신 것도 그것이 벌이기 때문입니다. 인본주의는 어떻게든 벌을 피하려고 하지만 그것은 진정 인간을 위하는 것도 아니고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것도 아닙니다. 사회에서나 교회 안에서 죄 지은 자가 받을 벌을 부당하게 면하게 하거나 피하게 하는 것은 그 당사자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 망하게 하는 것이며 그가 속한 공동체 모두에게 해를 끼치는 것입니다. 죄는 지은 자가 정당하게 책임을 지는 것이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것이고 나아가서 죄를 억제하는 효과도 얻을 수 있습니다.  벌을 면하게 하거나 피하게 하는 것은 결국 무질서를 낳게 하여 모두에게 총체적인 해악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고의적 살인자는 사형의 벌을 당당하게 받게 하는 것이 그의 인격을 존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죄의 대가인 벌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받을 벌을 대신하여 철저하게 다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가 대속의 고통이지만 공공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께서 내신 질서이기도 합니다.   

고통의 또 다른 의미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줄이고 공동체의 이익을 위하고 나아가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복음과 하나님 나라를 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환경오염을 줄이기 위해 자원을 아끼는 것은 자신에게는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가난한 이웃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입니다. 자원을 낭비하여 환경이 오염되면 오염된 환경의 가장 심각한 피해를 입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부자들은 좋은 환경 찾아 가면 되지만 오염되고 열악한 지역은 땅값 집값이 떨어져 가난한 자들이 모여들게 되고 가난한 자들이 많이 모이면 환경은 더 나빠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좀 불편하고 고통스러워도 자원을 아껴 써야 합니다. 가능하면 일회용품 사용하지 말고 전기는 한 등이라도 아끼고 수돗물도 아껴 써야 합니다. 그것이 이 시대에 이웃을 사랑하는 구체적 방법입니다. 불특정 다수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감수하는 고통은 고상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런 고상하고 아름다운 가치를 추구하지 않고 본능을 따라 자기 욕망대로 사는 사람은 하급 인간이고 그 수준이 짐승이나 다름없다 하겠습니다. 독일의 철학자 쉘러(M. Scheler)는 모든 고통에는 대속적(redemptive) 요소가 있다고 하였는데 이런 이해도 예수님의 고통에서 배운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고통의 마지막 의미는 미래에 상을 바라고 현재의 고통을 참는 것입니다. 상을 바라고 선을 행하는 것은 좋은 동기가 아니라고 하는 이들도 있지만 성경은 상이라는 인센티브를 기대하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도 더 나은 내일을 위해 고통을 참고 열심히 공부도 하고 일도 합니다. 먹고 싶은 것을 먹지 않고 참는 것도 내일의 건강을 위해서입니다. 성경은 믿음을 더 나은 내일을 바라고 지금의 고통을 참고 경주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의하면 고통을 참으며 믿음의 경주를 하고 있는 자들을 응원하고 격려하는 구름 같이 많은 증인들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기라성 같은 믿음의 선조들인 아벨, 애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를 비롯한 수많은 증인들이 우리를 격려하고 응원을 보내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아마도 우리를 지켜보고 일어섰다 앉았다 하면서 손뼉을 치기도 하고 “힘 내라! 힘!”라고 소리를 치기도 할 것입니다. 그들을 증인이라고 한 것은 우리를 응원하는 이들이라는 뜻입니다. 운동장에서 극도의 고통을 참고 달리는 우리들에게 격려와 응원을 보내는 증인들은 모두 우리보다 더 엄청난 고통을 당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아니라면 당할 필요가 없는 고통을 그들은 당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증인들 가운데 아주 특별한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할 뿐 아니라 바로 우리의 믿음의 주가 되십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우리가 고난과 고통 가운데서 낙심하지 않기 위해 고난과 고통과 부끄러움을 참으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당신을 거역한 우리들의 배신에 대해서도 참으신 주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히 1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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