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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이 두려운 기성세대로 남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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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08-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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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학기 24학점을 따야 하는 지식 노동의 부담을 안고도 삼양라면 하나로 점심을 때우고 쓴 커피 앞에 놓고 어두침침한 다방에 앉아 어리석게도 정치와는 상관없는 순수한 주제로 열띤 토론을 벌였습니다. 의식도 없으면서 있는 것처럼 열을 올렸던 향방 없는 토론은 끝나고 이네 현실로 돌아와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고민을 했었습니다.

그로부터 30여년이 훌쩍 지나버린 지금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가 되어 있고 그 무엇인가 때문에 개혁이 두려운 기성세대가 되었습니다. 친구와의 모임에도 넥타이를 매고 나가고 얼마씩의 회비를 내고 처자식의 안부를 묻고 나면 이야기의 주제는 자연스레 중년기의 건강문제로 넘어갑니다. 시간이 허락되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하나 둘씩 약속 시간에 쫓기어 자라를 뜨는 우리는 살기 위해 살고 있는 그 이상이 아닌 듯 하여 허전합니다.

순수와 개혁에 대하여 운을 띄우면 관심을 보이는 척 하다가 지금 우리에게 소중한 것은 무엇인가를 물을 만큼 여유가 없다는 듯 너무도 빨리 현실적인 이야기로 돌아와 버리고 맙니다. 가끔은 즐겁게(?) 비평할 주제가 없지 않지만 왜 나는 사소한 일에만 분개하는지 사려 깊지 못한 자신의 의식에 실망하곤 합니다. 6-7불짜리 lunch special을 먹으면서 옹졸하게도 종업원의 불친절에 분개하고, 나라를 구할 큰 일 하러가는 것도 아닌데 speed를 control 하는 앞차를 참지 못해 안달하는 조급함에 늘 자신을 나무라지만 잘 고쳐지지가 않습니다. 한 마디의 말도 다른 사람 앞에서 자기 초상화를 그리는 것이라고 하는데 사소한 일에 분개하는 모습이 나의 초상화만 같아 부끄럽습니다. 오십 중반을 훌쩍 넘어버린 나이에 순수와 개혁의 담론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순수하지 못한 것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수십 년을 함께 산 부부가 서로를 처다 볼 때 가슴이 뛴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심장병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는데 어쩌면 나는 개혁에 대한 소아기적 천착(穿鑿)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도 내가 스스로에게 반항하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내가 선한 사마리아인의 길에 조금은 비켜 지나가고 있다는 자책감 때문입니다. 그래서 옹졸하게도 바위는 걷어차지 못하고 잔돌에만 발길질을 해댑니다. 순수 무욕의 윤리와 도덕을 집단 관계로 옮겨보려는 사람들의 노력은 한 번도 성공한 예가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러면서도 우리는 오늘날 집단이 저지른 잘못을 어떤 개인, 몇몇 개인의 잘못된 판단과 영향력으로 추적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접을 마음은 없습니다. 어떤 바보라도 사과 속에 씨가 있다는 것은 알지만 씨 속에 사과가 있다는 것을 헤아리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현대는 설교자와 청중의 소통을 지나치게 문제 삼는 경향이 있는데 얼마 전에 뉴욕을 다녀간 어떤 설교자는 “들리는 설교”를 강조하였습니다. 자본주의의 소비원리를 설교에 그대로 적용한 느낌입니다. 소비자 중심, 눈높이 등등... 청중이 듣지 않는 설교는 아무리 훌륭해도 소용없다고 하는데, 성경 텍스트가 하는 말을 들을 줄 모르는 설교자의 들리는 설교는 어떤 소용이 있는지 모를 일입니다. 설교자가 전달 방법에 마음을 쓰기 시작하면 성경 텍스트와의 소통에는 마음을 닫기가 쉽고 그렇게 되면 결국 말씀은 사족에 불과 하고 설교자는 성경 자체가 전하려는 말씀보다 자기의 하고 싶은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한국에 있을 때에는 아무도 없는 사거리에서 빨간 신호등에 멈추지 않고 건너가는 경우가 가끔 있었습니다. 이곳 미국에는 아무도 없는 사거리에 빨간 신호등이 있을 리도 만무하지만 한국에는 신도시 개발지역에 아직 사람이 살지 않지만 신호등만 미리 설치되어 작동하고 있는 곳이 많습니다. 그런 신호등을 무시하고 지나치는 운전자들의 버릇은 한가한 사거리에서도 빨간 신호를 무시하는 습관성 우를 범하게 됩니다. 또한 한가한 사거리에서 우선멈춤을 지킬 양으로 서 있노라면 뒤차가 상향등을 번쩍이면서 혼자 잘난 체 하지 말라는 듯이 채근하기 때문에 우선멈춤도 지키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곳 미국에서는 그런 일은 거의 없습니다.

무슨 이유때문인지 나는 가끔 성경 텍스트로부터 메시지를 받아서 전하려고 하지 않고 성경을 빙자하여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흠칫 놀랄 때가 있습니다. 이는 분명히 설교자가 자기의 영역이 아닌-은혜를 끼쳐야 하고, 감동을 시켜야 하고, 역사를 일으켜야 한다는-성령의 영역에 대한 월권적 집착을 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본문으로부터 메시지를 받기 전에 이미 전할 메시지가 있고 그 메시지에 끼워 넣을 적당한 본문을 찾는 버릇은 아무래도 한가한 사거리에서 빨간 신호등을 무시하는 운전자의 위험한 관성(慣性)같은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설교자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본문이 말씀하는 것을 전해야한다는 원칙도 “들리는 설교”가 강조되는 상황에서는 지키기가 쉽지 않습니다. 성경은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어떠한 인간의 때도 묻히지 말아야 한다는 원칙을 지키는 사람이 많아져야 모두가 그 원칙을 지키기가 쉬워질 텐데 현실이 그 반대로 심화되고 나 자신도 어느 정도 거기에 기여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속이 상합니다.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라는 방법으로 역사에서 선포되어 과거로 지나가지만 방법론에 기울어진 설교나 수여에 부응하는 설교는 기독교를 변질시키고 그런 방법론이나 수요에 저항하고 순수를 고집하는 설교는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 되어 역사할 것을 믿지만 늘 현실에서 실망합니다.

돌이켜 보면 나 자신이 진정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묻지 않는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나에게, 나의 가정에, 우리 교회에, 이 사회에 진정 소중한 것이 무엇일까요? 순수한 하나님 말씀보다 나은 지혜가 있으며, 하나님 말씀보다 큰 능력이 있으며, 하나님 말씀보다 나은 소망이 있으며, 하나님 말씀보다 나은 기쁨이 세상에서 있을까요? 먼저 그 말씀으로 깊이 들어갈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기 위하여 성령을 의지하고 말씀을 사랑하며 인문학적 지식을 쌓으려 합니다. 또한 나와 입장이 다른 이들과 대치하기를 그치고 대면하기를 배우려고 합니다. 우리 모두는 진리의 길에서 순수와 개혁을 표방하는 한 외로움을 참아야 합니다. 한 여름의 작열하는 태양에도 모양을 흩뜨리지 않고, 쏟아지는 폭우에도 빛깔을 잃지 않으려면 외로움을 견뎌내야 합니다. 그렇게 발버둥 친다 해도 개혁이 두려운 기성세대로 남을 것 같은 두려움이 있지만.....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고전 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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