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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가 너무 경박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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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2014-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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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은 감사를 천국 방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천국에서는 설교도 전도도 예언도 지식도 필요가 없을 테지만 감사와 찬송은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가 죽어서 가게 될 천국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하고 이미 이 땅에 임한 천국에 대해서도 이야기 합니다. 죽어서 가게 될 천국에 대해서는 우리 중 아무도 경험한 사람이 없기 때문에 잘 알지 못하지만, 이 땅에 임한 천국은 그 나라 백성이라면 누구라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땅에서의 천국 경험을 아무 문제가 없는 평안과 기쁨의 상태로 상상하고 기대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땅에 임한 천국은 세상 나라와 겹쳐 있고 천국 백성이라고 할지라도 한시적으로 세상 나라와 천국의 이중국적(?)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세속에 휘둘릴 때가 많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지배와 세속의 지배가 선을 긋듯이 구분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통치가 교회와 하나님 나라뿐 아니라 세상 나라에까지 미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거룩한 것과 속된 것, 선한 것과 악한 것, 신령한 것과 세속적인 것을 존재론적으로 구분하기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합니다. 신령한 것과 속된 것을 존재론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신앙생활을 편리하게 하는 데는 유용할지 몰라도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를 오해하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모든 것을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선용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나 세상 나라에서나 감사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고 비판 받을 일도 없을 듯싶습니다. 하지만 바리새인 같은 교만한 감사(눅 18:11)나 경박스러운 감사(약 3:11)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리가 없습니다. 천국 백성의 진정한 감사는 철저히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즉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에서의 감사란 내게 유익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도리로서 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감사를 인격적이기 보다는 관념적인 것이나 심리적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기 때문에 감사의 인격적 대상이 없어서 감사가 관념화 될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자본주의적 가치관 아래서는 내가 얻고 누리는 모든 것이 내 수고의 결과이기 때문에 감사는 기껏해야 마음과 정신의 선 순환을 위하는 정도입니다. 불평은 불평을 낳고 감사는 감사를 낳는다는 심리적 작용도 일반은혜에 속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감사가 아닙니다. 관념적이고 심리적인 감사를 성경이 가르치는 감사와 혼동하면 안 됩니다. 교회 강단에서도 분별없이 관념적이고 심리적인 감사가 강조되기 때문에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경박스럽게 변질 되고 있습니다. 어떤 감사든 다 좋은 게 아닙니다.

시편 13편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기쁨과 후대하심에 대한 다윗의 찬송 시입니다. 그런데 그 구원의 기쁨과 후대하심에 대한 찬송이 어떤 과정을 통해 나오고 있는가를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 내가 나의 영혼에 경영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쳐서 자긍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시 13:1-2). 불과 두 절에 “어느 때까지니이까?”라는 표현이 네 번이나 나옵니다. 다윗은 지금 자신이 하나님께 버림 받았다는 느낌을 받고 있습니다. 믿음 없는 사람에게야 그런 느낌도 없겠지만,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뜻만을 따라 살았던 다윗에게는 이 느낌이 견딜 수가 없습니다. 다윗이 며칠이나 몇 주간 정도 기다리고 이런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수년을 기다리며 원수에게 쫓기며 죽을 고비를 수도 없이 넘기면서 기도도 많이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무런 응답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이여 영영히 나를 잊으시나이까?”라고 묻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믿음이 없는 사람은 운명이려니 하고 체념하며 되는대로 살게 되겠지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그런 것이 아님을 다윗은 알기에 더욱 힘들었을 것입니다.

아주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받아 본 경험 있는 사람은 다윗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한 만큼 상처가 클 것입니다. 존경한 만큼 실망과 낙심을 하게 될 것입니다. 무슨 오해가 있다면 어떻게든 오해를 풀고 싶은데 오해가 풀리지 않을 때 그 답답함이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죽음으로 자신의 진정성과 결백을 증명하려고 하기도 합니다.

아파 보면 밤이 긴 것을 압니다. 젊고 건강하면 밤이 짧지만 늙고 병들면 밤이 깁니다. 몸이 병들면 밤이 길게 느껴지고 고난이 닥치면 시간은 천천히 흐릅니다. 어떤 분이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석방되어“하나님의 물레방아는 천천히 돈다.”는 책을 썼습니다. 고난과 아픔이 있는 사람에게는 시간의 수레바퀴가 너무나도 천천히 돕니다. 다윗은 그의 시편 곳곳에서 이런 심경을 토로하고 있습니다(시 6:3, 94:3). 그는 하나님께 큰 은혜를 받은 사람이지만 또한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느낌이 들만큼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라고 하신 것을 보면, 다윗이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의 경험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극한의 고통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 극한의 고통 가운데서 두 가지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그 자신이 사망의 잠을 잘까 걱정이고(3절), 다른 하나는 원수가 승리의 개가를 부르게 될까 두려웠습니다. 사망의 잠이란 불신자처럼 죽을까 걱정하는 것이고, 원수가 개가를 부를까 걱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질까 걱정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극한의 고통 한가운데 있는데 자기를 위하여 걱정하지 않고 하나님을 먼저 생각합니다. 이런 경우 대다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신의 절박함에 집착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이 다윗이라는 인물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인간의 진정한 생명과 행복은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있다는 사실입니다.

인지상정인데, 누구나 아픔이 없으면 좋고, 고난이 없으면 좋습니다. 고난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고백했듯이 죽든지 살든지 그리스도만 존귀하게 되기를 바라는 정신, 그것이 바로 다윗의 정신이요 신학이요 철학이요 신앙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다윗이지만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될 수 있을까요? 나는 이 신앙이 부럽습니다. 다윗은 극한 고난의 한가운데서 기뻐하고 찬송할 수 있었던 이유를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이는 나를 후대(厚待)하심이로다.”(6절). 다윗은 이새의 8명의 아들 중의 막내아들인데, 가족들도 그를 무시했고, 그 자신도 언제나 스스로 자신을 천한 존재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자기에게는 분에 넘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사울이 그를 추격할 때 자신을 “죽은 개나 벼룩”에 비유하였습니다. 그런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에게 가장 인상적이고 잊지 못할 경험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너무나도 후하게 대해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다윗은 좋은 점이 많지만 나쁜 짓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특별히 봐주신 것입니다. 다윗의 고백과 태도로 보아 생각하면 감사하고 감격스럽고 송구스럽고 죄송하고 미안하고 몸 둘 바를 모를 처지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아픔은 아랑곳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우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후대하신 하나님 경험을 잊지 않고 기억하며 하나님께 찬송을 드리는 것입니다. 나를 후대하신 하나님이라는 믿음과 생각에서 위대한 신앙이 나오고 위대한 신학이 나오고 심오한 철학이 나오고 진정 아름다운 시와 예술이 나오는 것입니다. 다윗의 수많은 시편들 가운데 나타나는 수많은 감사가 어느 것 하나 경박스럽지 않고 천금의 무게를 지니고 있음을 우리 함께 기억했으면 합니다.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가로되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오며 내 집은 무엇이관대 나로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 삼하 7: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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