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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소명은 자기실현이 아닌 자기 부정으로 나타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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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2014-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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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소명이 은혜다.”라는 제목의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이 글은 그 글에 조금 첨가하는 것입니다. 소명에 대한 일반적인 오해는 소명이 성직자나 특별한 직책에 국한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목사나 선교사의 일은 소명에 해당하고 그 외 다른 직업은 소명과는 상관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오해는 종교개혁을 통해 수정되었습니다. 종교개혁으로 많은 사람들이 성직뿐 아니라 모든 직업이 하나님의 소명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소명에 대한 오해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소명을 일에 대한 업적이나 성과로 평가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에서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핵심을 자기 부정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소명의식의 진정한 모습이 자기 부정이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소명을 상식적으로 이해하거나 자본주의적으로 이해하면 성과나 업적으로 평가하게 되지만 진정한 소명의식은 자기 부정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세속적 가치관과 기독교적 가치관의 근본적인 차이는, 세속적 가치관은 인간의 자기실현을 강조하는데 반해 기독교의 가치관은 자기 부정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기독교의 진정한 소명의식이 자기부정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을 관념적으로만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소명을 받은 자는 구체적 삶에서 자기 부정이 실제적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말로는 자기를 부정한다고 하면서 실제적으로는 자기를 실현하려는데 집착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대형교회 목회자가 선교한다는 명분으로 50만 불을 받아 선교를 위해 쓰지 않아 소송을 당하여 약 160억 원을 배상하라는 법정 판결을 받고 위조한 자료로 법적 대응을 했다가 지난 2일에 징역 2년형을 선고 받고 구속되는 일이 한국에서 있었습니다. 동일하지는 않지만 소명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는 문제는 부지기수입니다. 진정한 소명의식은 자기 부정으로 나타나야 하는데, 공금 유용이나 횡령, 간음이나 성추행, 공문서 위조나, 가짜 학위 논문이나, 위증이나 거짓말 같은 것은 소명의식과는 반대되는, 세상에서도 극단적으로 왜곡된 자기실현의 방법들입니다. 물리적인 업적이나 일의 성과는 거룩한 소명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세계에서 교인이 제일 많이 모이는 교회 목사를 비롯하여 초대형교회 목회자들의 상당수가 자기 부인이 아니라 자기실현을 위해 극단적으로 왜곡된 방법까지도 마다하지 않고 있습니다. 소형교회 목회자들에 대한 것은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알 수 없지만 대동소이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일반 성도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목회자들이 목회를 열정적으로 하여 교인이 늘어나고 큰 예배당을 지어도 거룩한 소명에 역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피를 토하듯 외치는 메시지를 읽으면서도 예배나 선교나 구제나 기도를 통해 악을 저지를 수 있다는 사실을 왜 생각하지 않는지 모를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이 죄를 짓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이나 성직자들이 성직이나 목회나 선한 일을 통하여 범죄 하는 것을 더 역겨워 하시는 것 같습니다. 성경의 진리와 복음을 개념적으로 또는 학문이나 이론적으로 나아가서는 경험으로 깨달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전하거나 가르치거나 설교하는 태도에서 교만하다면 죄를 짓는 것이고 소명에 역행하는 것입니다. 소명의식은 어떤 형태로든지 자기 부정의 겸손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병을 고치고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하고 내게 있는 것으로 구제하고 교회를 부흥시키고 심지어 자기를 희생하는 헌신을 할지라도 교만하면 태산을 옮겨 놓는 업적이라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소명은 참으로 두려운 일입니다. 많이 가진 것을 두려워해야 하고, 많이 아는 것도 두려워해야 하고, 인기도 존경도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 두려움은 구체적으로 자기 부정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 부정은 자기 권리를 축소하고 책임을 확대하는 것으로 구체화 되어야 합니다. 부모의 권리, 지도자의 권리, 당회장의 권리 등 어떤 권리든지 소명의식 앞에 축소되어야 하고 책임은 확대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범죄 한 인간은 소명에 부응하지 않고 소명을 거슬려 권리를 확대하고 책임은 축소하는 방향을 지향합니다. 재산과 명예를 탐하며, 권력을 추구하며, 재물을 쌓으며, 호화롭고 사치한 생활에 도움이 되는 일에 광적인 태도와 왜곡된 집착을 합니다. 소명의식이 희미하게 되면 어떻게 해서든지 가난과 실패와 어려움을 피하려고 머리를 짜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자기를 부정하고 주님을 따를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자기 부정은 우선 자만이나 교만이나 허식을 용납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탐욕이나 욕망이나 방탕이나 나약이나 그 밖에 우리의 이기심으로 말미암는 그 어떤 것도 허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경건을 교묘하게 자기실현의 방편으로 삼지 말아야 합니다. 겸손하기는 한데 겸손하게 행동하는 것으로 남보다 높아지려고 하는 것은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삼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 철학자들이 주장하는, 덕은 덕 자체를 위해서 추구해야 된다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자기 부정을 통해서만 영광을 받으십니다. 사람의 영혼 속에는 무수한 죄악이 숨어 있고, 그것을 발견하고 치료하는 방법은 오직 자기를 부정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소명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에 상응하도록 자신을 실현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초대입니다. 신학적으로는 인간에게 각인된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일과 목회적으로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가는 데 필요한 다양한 요구들에 응답하고 교회의 역동성과 연합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집을 몇 채씩이나 가진 원로 목회자가 있는가 하면 그 옆에 끼니를 걱정하는 목회자가 있어도 그것을 심각하게 생각하는 이들이 별로 없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합니다. 지도자나 피지도자 어느 한 편에서라도 소명의식이 깨어 있다면 이런 부조리가 조금씩이라도 개선되어야 할 텐데 그것을 정상적인 상태인 듯 받아들입니다. 나름대로 소명의식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없겠지만 그 소명이 거룩한 소명이라는 사실을 진실 되게 인식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자기부정의 구체적 실천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결단해야 할 것입니다.

창 18, 19장에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사건이 주는 메시지는 의인 10명이 없어서 소돔 고모라의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곳에 의인 10명만 있었다면 그들은 살았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들을 살리려고 무진 애를 썼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소명이 천하 모든 사람들이 그를 인하여 복을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천하 모든 사람은커녕 소돔과 고모라 사람도 구원하지 못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소명의 일에 실패하였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아브라함이 받은 소명에서 실패를 했는데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나무라거나 책망하시지 않으십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을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소명 순종의 본보기로 제시합니다. 이러한 성경의 가르침은 매우 중대한 사실을 함의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소명이 다른 차원과 각도에서 성취될 것임을 암시합니다. 즉 하나님의 계획은 생물학적 개체인 아브라함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통해 태어나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비록 소명순종의 본이지만 그는 사람을 살리는 일에는 아무런 성과도 이루어 내지 못하였습니다. 바로 여기가 우리의 소명을 바르게 인식하게 하는 지점입니다. 아무런 성과도 이루어내지 못한 소명 순종의 본이 아브라함이라는 사실은 소명에 온전히 순종한 다음에도 우리로 하여금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게 합니다. 칼빈이 그리스도인의 경건 생활의 핵심을 자기부정이라고 했던 것도 이런 맥락에서일 것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 눅 17: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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