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식적 정직과 인격적 정직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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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16-08-08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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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솝의 우화 중 늑대와 양치기소년의 이야기에서 양치기 소년이 심심풀이로 "늑대가 나타났다!"라고 거짓말로 소리를 치자 마을 사람들은 소년을 구하려고 몽둥이를 들고 달려왔으나 거짓말이었습니다. 소년은 마을사람들과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해놓고 그 약속을 지키지 않고 계속 거짓말을 합니다. 그러다 어느 날 정말로 늑대가 나타났을 때 소년은 겁에 질려 소리쳤지만 사람들은 그 소년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 결국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도 그 소년이 늑대에게 물려 부상을 당했거나 죽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자기는 간신히 도망을 쳤으나 마을의 양들이 늑대에게 물려 죽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 결과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그 소년이 동네 양을 치고 있었고 거짓말 때문에 동네 양들이 물려 죽었다면 자기의 거짓말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재산에 손해를 입혔을 것입니다. 둘째는 진짜 늑대가 나타나서 소년을 해쳤다면 거짓말 때문에 자기 자신이 참변을 당한 것입니다. 결국 거짓말은 남에게 손해를 입히고 자신도 손해를 입게 된다는 교훈입니다. 거짓말은 재미로 하든지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하든지 결국은 다른 사람과 자기가 손해를 본다는 것입니다. 거짓말을 해서 덕을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거짓말을 하면 모든 사람이 손해를 보게 된다는 교훈입니다.
한국인은 아주 우수한 민족입니다. 부지런하고 근면하고 성실해서 세계 어디를 가나 열심히 일하여 성공해서 잘 삽니다. 교육열도 높아서 아마도 대학을 졸업한 인력은 세계에서 인구를 비례해서 생각한다면 가장 많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인터넷 사용인구도 가장 많고 기술도 다른 여러 나라에 비해 상당히 앞서 있습니다. “강소 기업이 힘이다.”라는 프로를 보면 여러 분야에서 뛰어난 중소기업도 많습니다. 사회적 인프라도 한국처럼 잘 돼 있는 나라가 많지 않다고 합니다. 동남아 여러 나라 젊은이들은 한국에 가서 사는 게 꿈이라고 합니다.
대한민국이 전쟁의 폐허에서 이렇게 눈부신 발전을 하는 동안 어려움도 많았지만 넘지 못할 산은 없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온갖 어려움을 다 극복하고 험한 산을 다 넘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뭐든지 못할 게 없는 민족 같습니다.
그런데 한국인들이 정말 잘 못하는 약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거짓말 하지 않고 정직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직하게 되는 것이 넘어야 할 산이라면 한국인은 아마도 앞으로 100년이 지나도 그 산은 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물론 이것은 대한민국 민족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인류의 보편적 문제입니다. 다만 한국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아주 심하다는 것이 심각한 문제입니다.
일찍이 도산 안창호 선생은 말하기를 “죽더라도 거짓이 없으라. 농담으로라도 거짓말을 말아라. 꿈에라도 성실을 잃었거든 통회하라.”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거짓이여! 너는 내 나라를 죽인 원수로구나..., 내 평생에 죽어도 다시는 거짓말을 아니 하리라.”하였습니다. 민족주의자 인창호는 조선은 일본에게 망한 것이 아니라 거짓 때문에 망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민족을 사랑하는 분이 거짓말 때문에 민족이 망하는 것을 눈으로 지켜보면서 거짓에 원한이 사무쳐 그렇게 말했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의 외적 조건은 선진국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세계에서 자살률이 제일 높습니다. 자살률은 북유럽 선진국에서 높습니다. 그런데 선진국에서 자살률이 높은 것은 대한민국의 상황과 다릅니다. 선진국 형 자살은 가난이나 소외 때문이 아니라 지나친 사회보장이 삶의 의욕을 상실하게 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많은 자살은 실직과 가난과 갑질에 의한 소외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한국의 높은 자살률은 대한민국이 살기 어렵고 떠나고 싶은 나라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돈과 권력이 있는 일부 사람들이야 그렇지 않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제로 유럽의 난민 같은 물질적 궁핍과 정신적 소외감을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대로 간다면 머지않아 많은 도시 난민이 발생할 것이라고 우려하는 이도 있습니다. 지금은 그들을 무숙자라고 부르지만 도시가 무숙자를 감당하지 못할 정도가 되면 그야말로 도시 난민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원인이 무엇일까요? 조선 시대나 일제가 지배했던 시대나 지금이나 그 원인은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바로 거짓입니다. 조선 시대에는 신분의 차별이 사람들을 불행하게 했습니다. 사람은 모두가 평등한데 신분에 따라 귀천이 구분되어야 한다고 한 것은 속임수이고 거짓입니다. 일본은 자기들이 조선을 무력으로 점령하여 지배하는 것이 조선에게 이롭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거짓된 일본에게 점령당한 원인을 도산은 조선민족의 거짓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반상의 차별이 천륜을 거스르는 거짓임이 밝혀졌고, 일본의 조선 강제 지배의 정당성 주장도 거짓임이 폭로되었습니다. 지금은 양반이나 일제가 아니라 자본주의가 국민을 속이고 있습니다. 자본주의가 국민을 속인다는 것은, 자본주의는 절대적인 것이 아닌데 사회적 강자들에 의해 절대적인 것처럼 주장되고 관철되고 군림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를테면 자본주의가 절대적이 아니기 때문에 계속해서 비판하고 개선해야 하는데 자본주의 아래서 자본주의를 비판하면 사회주의로 오해를 합니다. 이런 형편은 모든 자본주의 사회의 상황이지만 한국이 유독 심합니다.
이솝 우화 중에 사자와 당나귀와 여우의 협동 사냥 이야기가 있는데, 그 우화를 패러디 해 보았습니다. 제목은 “사자와 여우”입니다. 사자와 여우가 함께 힘을 합쳐 사냥을 하기로 합의를 했습니다. 사자의 강력한 힘과 여우의 꾀를 활용하면 사냥의 시너지효과를 거둘 것이라는 계산에서 서로 합의를 한 것입니다. 예상은 적중하여 사냥은 쉽게 성공하여 서로의 몫을 분배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사자가 말하기를 “사냥한 것은 내가 나눈다.”고 하였습니다. 여우는 불만이 있었지만 아무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자는 사냥한 것을 세 몫으로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엄한 투로 말했습니다. “첫 번째 몫은 내 꺼다. 왜냐하면 나는 동물의 왕이니까” 그리곤 말을 이어갔습니다. “두 번째 몫도 내 꺼다. 왜냐하면 내가 아니면 사냥 자체가 불가능하니까.” 사자는 거침없이 계속해서 여우에게 말했습니다. "이 세 번째 몫도 내 꺼다. 그 이유는 이걸 내가 갖지 않으면, 넌 어쩌면 나한테 잡아 먹힐지도 모르기 때문이다.”마지막으로 사자가 여우에게 말했습니다. “계산은 끝났다. 무슨 할 말이 있느냐?”여우는 억울하고 분했지만 살기 위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물을 머금고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자본주의 아래서 힘 있는 자는 언제나 이 사자와 같은 논리로 자기의 주장을 관철시킵니다. 사자의 주장 근거는 사실입니다. 그가 동물의 왕인 것도 사실이고, 사냥의 기여도에서도 여우에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지대하고, 사자가 자기 욕심을 채우지 못한다면 여우를 잡아먹을지도 모른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자의 주장과 논리가 다 사실에 근거했다고 하더라도 그 사실이 곧 정직은 아닙니다. 사실과 합법이 정직으로 정당화 되는 일이 많습니다. 자기의 주장과 행동이 사실에 근거하고 법에 어긋나지 않았으니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곧 형식적으로 자신이 정직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인격적 정직은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뿐 아니라 덕을 끼치는 것입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 롬 13:10 -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 결과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그 소년이 동네 양을 치고 있었고 거짓말 때문에 동네 양들이 물려 죽었다면 자기의 거짓말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재산에 손해를 입혔을 것입니다. 둘째는 진짜 늑대가 나타나서 소년을 해쳤다면 거짓말 때문에 자기 자신이 참변을 당한 것입니다. 결국 거짓말은 남에게 손해를 입히고 자신도 손해를 입게 된다는 교훈입니다. 거짓말은 재미로 하든지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하든지 결국은 다른 사람과 자기가 손해를 본다는 것입니다. 거짓말을 해서 덕을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거짓말을 하면 모든 사람이 손해를 보게 된다는 교훈입니다.
한국인은 아주 우수한 민족입니다. 부지런하고 근면하고 성실해서 세계 어디를 가나 열심히 일하여 성공해서 잘 삽니다. 교육열도 높아서 아마도 대학을 졸업한 인력은 세계에서 인구를 비례해서 생각한다면 가장 많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인터넷 사용인구도 가장 많고 기술도 다른 여러 나라에 비해 상당히 앞서 있습니다. “강소 기업이 힘이다.”라는 프로를 보면 여러 분야에서 뛰어난 중소기업도 많습니다. 사회적 인프라도 한국처럼 잘 돼 있는 나라가 많지 않다고 합니다. 동남아 여러 나라 젊은이들은 한국에 가서 사는 게 꿈이라고 합니다.
대한민국이 전쟁의 폐허에서 이렇게 눈부신 발전을 하는 동안 어려움도 많았지만 넘지 못할 산은 없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온갖 어려움을 다 극복하고 험한 산을 다 넘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뭐든지 못할 게 없는 민족 같습니다.
그런데 한국인들이 정말 잘 못하는 약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거짓말 하지 않고 정직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직하게 되는 것이 넘어야 할 산이라면 한국인은 아마도 앞으로 100년이 지나도 그 산은 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물론 이것은 대한민국 민족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인류의 보편적 문제입니다. 다만 한국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아주 심하다는 것이 심각한 문제입니다.
일찍이 도산 안창호 선생은 말하기를 “죽더라도 거짓이 없으라. 농담으로라도 거짓말을 말아라. 꿈에라도 성실을 잃었거든 통회하라.”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거짓이여! 너는 내 나라를 죽인 원수로구나..., 내 평생에 죽어도 다시는 거짓말을 아니 하리라.”하였습니다. 민족주의자 인창호는 조선은 일본에게 망한 것이 아니라 거짓 때문에 망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민족을 사랑하는 분이 거짓말 때문에 민족이 망하는 것을 눈으로 지켜보면서 거짓에 원한이 사무쳐 그렇게 말했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의 외적 조건은 선진국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세계에서 자살률이 제일 높습니다. 자살률은 북유럽 선진국에서 높습니다. 그런데 선진국에서 자살률이 높은 것은 대한민국의 상황과 다릅니다. 선진국 형 자살은 가난이나 소외 때문이 아니라 지나친 사회보장이 삶의 의욕을 상실하게 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많은 자살은 실직과 가난과 갑질에 의한 소외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한국의 높은 자살률은 대한민국이 살기 어렵고 떠나고 싶은 나라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돈과 권력이 있는 일부 사람들이야 그렇지 않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제로 유럽의 난민 같은 물질적 궁핍과 정신적 소외감을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대로 간다면 머지않아 많은 도시 난민이 발생할 것이라고 우려하는 이도 있습니다. 지금은 그들을 무숙자라고 부르지만 도시가 무숙자를 감당하지 못할 정도가 되면 그야말로 도시 난민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원인이 무엇일까요? 조선 시대나 일제가 지배했던 시대나 지금이나 그 원인은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바로 거짓입니다. 조선 시대에는 신분의 차별이 사람들을 불행하게 했습니다. 사람은 모두가 평등한데 신분에 따라 귀천이 구분되어야 한다고 한 것은 속임수이고 거짓입니다. 일본은 자기들이 조선을 무력으로 점령하여 지배하는 것이 조선에게 이롭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거짓된 일본에게 점령당한 원인을 도산은 조선민족의 거짓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반상의 차별이 천륜을 거스르는 거짓임이 밝혀졌고, 일본의 조선 강제 지배의 정당성 주장도 거짓임이 폭로되었습니다. 지금은 양반이나 일제가 아니라 자본주의가 국민을 속이고 있습니다. 자본주의가 국민을 속인다는 것은, 자본주의는 절대적인 것이 아닌데 사회적 강자들에 의해 절대적인 것처럼 주장되고 관철되고 군림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를테면 자본주의가 절대적이 아니기 때문에 계속해서 비판하고 개선해야 하는데 자본주의 아래서 자본주의를 비판하면 사회주의로 오해를 합니다. 이런 형편은 모든 자본주의 사회의 상황이지만 한국이 유독 심합니다.
이솝 우화 중에 사자와 당나귀와 여우의 협동 사냥 이야기가 있는데, 그 우화를 패러디 해 보았습니다. 제목은 “사자와 여우”입니다. 사자와 여우가 함께 힘을 합쳐 사냥을 하기로 합의를 했습니다. 사자의 강력한 힘과 여우의 꾀를 활용하면 사냥의 시너지효과를 거둘 것이라는 계산에서 서로 합의를 한 것입니다. 예상은 적중하여 사냥은 쉽게 성공하여 서로의 몫을 분배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사자가 말하기를 “사냥한 것은 내가 나눈다.”고 하였습니다. 여우는 불만이 있었지만 아무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자는 사냥한 것을 세 몫으로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엄한 투로 말했습니다. “첫 번째 몫은 내 꺼다. 왜냐하면 나는 동물의 왕이니까” 그리곤 말을 이어갔습니다. “두 번째 몫도 내 꺼다. 왜냐하면 내가 아니면 사냥 자체가 불가능하니까.” 사자는 거침없이 계속해서 여우에게 말했습니다. "이 세 번째 몫도 내 꺼다. 그 이유는 이걸 내가 갖지 않으면, 넌 어쩌면 나한테 잡아 먹힐지도 모르기 때문이다.”마지막으로 사자가 여우에게 말했습니다. “계산은 끝났다. 무슨 할 말이 있느냐?”여우는 억울하고 분했지만 살기 위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물을 머금고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자본주의 아래서 힘 있는 자는 언제나 이 사자와 같은 논리로 자기의 주장을 관철시킵니다. 사자의 주장 근거는 사실입니다. 그가 동물의 왕인 것도 사실이고, 사냥의 기여도에서도 여우에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지대하고, 사자가 자기 욕심을 채우지 못한다면 여우를 잡아먹을지도 모른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자의 주장과 논리가 다 사실에 근거했다고 하더라도 그 사실이 곧 정직은 아닙니다. 사실과 합법이 정직으로 정당화 되는 일이 많습니다. 자기의 주장과 행동이 사실에 근거하고 법에 어긋나지 않았으니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곧 형식적으로 자신이 정직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인격적 정직은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뿐 아니라 덕을 끼치는 것입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 롬 13: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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