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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오피니언

노동의 특권과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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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2016-06-14

본문

노동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특권임과 동시에 책임입니다. 노동의 특권과 책임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존재라는 사실과 관련이 있습니다.

창세기 1장 28절에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세 가지 명령을 하셨습니다. 첫째 충만 하라, 둘째 정복하라, 셋째 다스리라는 명령입니다. 첫째는 결혼 규례이고, 둘째는 노동 규례입니다. 셋째는 첫째와 둘째를 포함하여 안식 규례입니다. 이 세 가지는 하나님의 창조 언약의 3대 원리입니다. 이 창조 언약은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영적이고 문화적인 책임을 담고 있습니다. 문화란 인간의 생각과 판단 그리고 언어와 행동의 누적된 결과를 가리킵니다. 또는 그 누적된 결과물들이 연속된 일정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정형화된 틀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 창조사역의 과정 속에서 각 피조물들의 역할과 기능 및 생존의 원리들을 정해 놓으셨습니다. 이 창조원리 가운데 인간에게 부여하신 책임과 권한은 창조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총체적인 문화 창달의 목표를 지향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창조의 구조적 틀 속에서 주어진 중대한 책임과 더불어 특권을 부여 받았습니다. 우선, 창조질서 가운데서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규례를 준수하며 인간 사회의 아름다운 문화형성을 통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책임을 부여 받았습니다. 다음으로, 인간은 다른 피조물들을 잘 관리 보존함으로써 인간 사회와 아름다운 조화와 균형을 이루며 행복한 삶을 누릴 뿐만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책임을 부여 받았습니다.

창세기의 1차 독자들에게 하나님은 절대 주권자요 통치자였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을 닮은 존재란 1차적으로 다스리는 존재라는 뜻이고 그 다음은 인격적인 존재라는 뜻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릴 존재로 창조 되었고 그 사실은 “다스리라.”는 창조명령에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창 1:28). 또한 인격적이라는 말은 책임적인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이라고 하는 것에 오해를 하는 이들이 있는데, 본래 인격적이라는 말에는 그 안에 사람이라는 의미가 전혀 들어 있지 않습니다. 다만 책임적인 존재라는 의미로 인격적이라는 용어를 하나님께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책임지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의미 안에는 책임적인 존재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다스림과 책임은 하나님의 중요한 속성이고 인간은 바로 그러한 하나님을 닮은 존재인 것입니다. 또한 다스리라는 것도 폭력적 지배가 아닌 돌봄의 의미가 강조된 명령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모든 생물을 다스리는 것에서 정의와 평화와 질서와 안녕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으로 인하여 다스리고 책임져야 할 하나님의 명령을 제대로 감당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특권과 책임으로서의 노동은 인간 사회의 매우 복잡한 문제를 발생시키는 원인이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율법으로 노동의 정당한 조건과 보상을 명령하셨습니다.

노동에 대한 율법이 비록 타락한 인간에게 주신 명령이지만 그 말씀은 창조 명령을 순종하라는 것으로서 모든 인류와 특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함을 받은 성도들이 지켜야 할 말씀입니다. 노동의 조건과 보상이 헝클어진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된 현실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은 창조의 명령과 하나님 나라 원리에서 해결책을 찾아야 합니다.

일은 인류에게 주신 하나님의 복입니다.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서 순종하여 살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겠다는 것도 농업이나 목축이라는 통상적인 일을 계속 할 것을 전제로 하신 말씀입니다. 하지만 타락의 영향은 노동과 인간관계를 망쳐놓았기 때문에 율법은 이 영역에서 구속 받은 백성이 지켜야 할 것들을 명한 것입니다.

그 명령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첫째, 노동 조건에 관한 명령입니다. 히브리 종들은 6년 후에 자유를 가질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규정이 출21:1-6절에 있습니다. 그리고 종을 소유한 사람이 그 종을 다룰 때도 분명하게 법적 제한을 받았습니다(출 21:20-,26-). 특히 도저히 먹고 살 길이 없어 자발적으로 채권자의 종이 된 사람은 가혹하고 무자비한 조건에서 일하도록 해서는 안 되게 하셨습니다(레 25:39-,43).

둘째, 품삯 지불에 관한 명령입니다. 자기가 일 시킨 품꾼의 품삯은 충분히 그리고 즉시 지불하도록 하셨습니다(레 19:13,신 24:14-).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해 일꾼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것에 대해 책망 하셨습니다. 특히 품삯 지불 문제에 대해 책망 하셨습니다.

셋째, 휴식에 대한 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천지를 창조하시고 이레 되는 날에는 쉬셨습니다. 그래서 창조 이래로 휴식은 하나의 원리와 특권이 되었습니다. 이 특권을 누리는 데는 고용주와 피고용자, 심지어 일하는 짐승에게도 예외가 없습니다. 이 같은 휴식의 원리가 창조 때에 이미 주어졌고(출 20:11), 구속적 사건에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같이 종들과 고용된 자들은 일주일에 하루씩 휴식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절기 때에도 휴식에 동참할 수 있었습니다(신 16:11,14). 농경 사회에서 오랫동안 고된 육체노동에 시달리는 자들에게 이런 정기적 휴식은 매우 귀중한 것입니다. 그런데 솔로몬 때에 이런 명령이 상당히 무시 되었습니다(왕상 12:3-,10-). 그 때의 불순종이 바벨론 포로가 되는 이유 중의 하나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 가 있는 동안에 혹사 당해온 땅으로 하여금 쉬게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모든 안식의 규정들은 일꾼들의 유익과 노동력 밖에 재산이 없는 자들에 대해 깊은 배려와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소홀히 하는 것을 가난한 자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죄와 연관 지어 책망하셨던 것입니다(암 8:5-,사 58:3-14,렘 17:19-27). 그러니까 경제적 착취를 책망하셨는데 그 경제적 착취의 방법이 안식일을 어기는 것이었다는 지적입니다. 안식일 자체만을 어겨도 죄가 되는데 경제적 착취의 탐욕스러운 동기로 안식일을 어겼으니 이중적인 죄를 지은 것입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성경은 일과 고용에 관해 깊은 배려와 세세한 관심을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성경의 관심은 노동 인구 전체에게 해당 됩니다. 근로 조건과 규정, 적절한 휴식과 정당한 품삯 면에서 공정한 대우를 하고, 동정을 베풀어야 한다는 원리는 심지어 짐을 실은 나귀나 곡식 떠는 소와 같은 짐승에게도 확대 적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출 23:4-, 신 25:4,22:1-4). 이런 관심사는 이스라엘의 상황에 해당되는 것이긴 하지만, 노동과 고용이라는 경제적 영역에서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관심사와 행동이 어떠해야 할지에 대해 교훈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고대의 단순한 농경 사회와 현대의 복잡한 산업 경제구조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근로 조건에 대해서만은 옛날이나 오늘이나 그 욕구가 충족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는 변함이 없습니다. 현대의 문제는 일의 과잉이 아니라 일의 부재현상도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기계화 자동화가 이루어지자 많은 노동력이 남아돌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실직의 문제와 여가의 문제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근로 조건도 구약 이스라엘 시대와 별로 나아진 것이 없습니다. 어쩌면 오늘날의 노동자들이 옛날의 종들보다 더 가혹한 조건 아래서 일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구약 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근로 조건과 규정들, 그리고 인권보호의 수준을 현대 산업 사회가 도입을 한다면 곳곳에서 근로자들의 경제생활 국면에 일대 혁명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타락의 영향이 너무 크기 때문에 구속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의식을 가지고 이러한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다면 세상적인 근로 조건과 규정들을 그대로 옳다고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세속적인 근로 조건은 언제나 있는 자에게 유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더구나 성장 제일주의의 경제구조 아래서는 근로자의 복지정책이란 명분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왜냐하면 근로자들의 복지를 먼저 생각하고 경쟁사회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에게는 성장이 제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부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부를 하나님 나라의 능력으로 오해하는 일도 없어야 합니다. 돈이면 안 되는 일이 거의 없는 사회에서 돈이 많은 교회가 빠질 위험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현대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영향력을 세상에 나타내려면 돈이 없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돈이 많은 교회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걸어라.”는 말은 할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하였습니다. 정당한 노동 조건과 보상이 그리스도인 개인과 교회에서부터 창조 명령과 하나님 나라 원리를 따라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게 짓밟히는 수모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모든 생물을 다스리며 돌보고 그들에 대한 책임을 잘 감당하는 것이 곧 하나님 나라의 능력입니다.

“곤궁하고 빈한한 품꾼은 너의 형제든지 네 땅 성문 안에 우거하는 객이든지 그를 학대하지 말며 그 품삯을 당일에 주고 해진 후까지 끌지 말라 이는 그가 빈궁하므로 마음에 품삯을 사모함이라 두렵건대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면 죄가 네게로 돌아갈까 하노라.” - 신 24:14-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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