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은 관계 대상에 대한 신뢰의 반응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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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ㆍ2016-05-05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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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참으로 신비로운 것입니다. “믿는다.” 혹은 “믿음이 있다.”고 했을 때, 우리는 믿음이 믿는 사람 개인에게서 솟아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은 사람이 노력과 수양된 인격을 통해서 믿음이 나오는 것이라고 평가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믿음은 노력이나 인격적 수양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지식이나 도덕적 수준과도 상관이 없습니다. 인격적으로 아주 훌륭한 사람은 믿음이 좋고, 배우지 못하고 인격적으로 훌륭하지 못한 사람은 믿음이 좋지 않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혼자 갖는 것이 아니고 대상에 대한 신뢰의 반응이기 때문입니다.
종교적 믿음이나 인간관계의 믿음도 반드시 구체적 대상이 있습니다. 기독교의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입니다. 우리가 이 삼위 하나님을 믿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비롯하여 천지를 창조하신 만물의 창조주이시고,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주님이시고,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도록 인도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무나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을 믿는 것이 아니고 창조의 하나님과 구원의 예수님과 우리를 돕는 성령님과 관계가 있는 사람만 믿습니다.
나는 나의 아내를 믿습니다. 내가 나의 아내를 믿는 믿음은 아내가 인격적으로 훌륭하기 때문이 아니고 나의 아내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내를 믿는 믿음은 남편과 아내라는 관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나의 아내가 아무리 인격이 훌륭해도 나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이 여자를 지금처럼 믿을 수 없습니다. 부부는 아무리 성격과 취미와 스타일이 다르고 성격 차이로 티격태격 싸워도 부부라는 그 관계에서 나오는 기본적인 믿음이 있습니다. 이 믿음이 없으면 부부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믿음이 부부의 관계를 맺게 하는 것이 아니고 부부의 관계가 믿음을 발생시킵니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를 사랑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고슴도치가 들으면 매우 기분 나쁠 이야기입니다. 고슴도치가 못생긴데다가 온 몸에 가시가 돋아나 얼른 보아서 누구를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선입견에서 그런 말이 나온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고슴도치뿐 아니라 모든 동물은 새끼를 사랑합니다. 누가 가르쳐 주는 것도 아닌데 어미는 새끼를 사랑하고 새끼는 어미를 전적으로 믿고 의지합니다. 어미와 새끼의 관계로부터 그런 사랑과 믿음이 나오도록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중에 사람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인지 아닌지 의견이 분분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복음서를 읽어보면 제자들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예수가 그리스도냐 하는 문제에 대해여 관심이 많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 11장 2절을 보면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러 온 세례 요한도 감옥에서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릴까요?”라고 물었습니다. 마 16:13절 이하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으셨고, 제자들의 대답에 의하면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잔 중 한 사람이라고 했다 합니다. 그러고 보면 그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메시야인지 아니신지 매우 궁금해 했습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가셔서 이곳 저곳을 둘러보시다가 솔로몬 행각을 거닐고 계실 때였습니다. 갑자가 예수님 곁으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아마도 이들은 예수님께서 메시야이심을 믿지 않는 이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께서 질문하였습니다.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여기 “마음을 의혹하게 하다.”는 것은 마음을 조이게 하다는 뜻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님께서는 직접 “내가 그리스도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세례 요한의 질문을 받았을 때도 보고 들은 바를 전하라고 하셨고,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을 때도 이를 네가 알게 하신 이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시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궁금했습니다. 자기가 메시야라는 건지 아니라는 건지 매우 궁금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속 시원하게 당신이 메시야인지 아닌지를 분명하게 말하라고 다그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역시 직접 그렇다 혹은 아니다 라고 대답하지 않으시고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 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메시야를 기다리는 유대인들의 마음은 간절하였습니다. 그들은 메시야가 오시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구약은 온통 메시야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왜 메시야를 기다릴까요? 메시야가 와야 모든 문제가 해결 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메시야가 오지 않으면 아무것도 해결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메시야를 보내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메시야 대망 사상은 인간 스스로 구원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메시야 대망 사상 배후에는 인간의 전적 무능과 전적 무지라는 성경적 인간관이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보내시겠다고 하셨고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직 메시야가 오시기만을 학수고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상은 유대인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민족에게 이런 사상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세상을 살아보니까 이대로는 안 된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된 것입니다. 이집트의 바로도, 바벨론의 느브갓네살도, 페르시아의 고레스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도, 로마의 시저도, 소크라테스도, 공자도 인간을 구원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뼈저리게 깨닫게 해 준 것이 인간의 역사입니다. 인간이 교만해서 안 그런 척 하지만 그래도 역사를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인류가 이 땅에 존재 해 온 이래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인간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민족에게나 메시야 대망 론 같은 게 있습니다.
오늘 날도 우리가 정직하게 역사와 현실을 관찰한다면 메시야 대망 론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미국의 대선 예비 선거를 지켜보면서도, 한국의 총선 소식을 전해 들으면서도, 정치와 경제와 환경 문제를 생각해도 문제가 해결 국면으로 가기보다는 점점 더 어려워져 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몇 해 전만해도 전문가들이 미래를 예측할 수 있었는데 요즘은 전문가들조차도 내일을 예측할 수 없다고 합니다. 정치 전문가가 내일의 정치를 예측할 수 없고, 경제 전문가도 내일의 경제를 예측할 수 없다고 합니다. 과학자도 과학의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고 합니다. 과학이 고도로 발전하여 인공위성이 태양계를 벗어나는 데까지 날아가고, 인간의 DNA까지 읽어내고, 인간을 대체할 로봇이 등장할 것입니다.
최근 IT(정보기술), BT(생명공학기술), NT(나노 기술)로 대표되는 미래형 첨단 기술 등에서 한 개 이상의 기술이 중첩되는 융합기술을 기술의 융합(Convergence)이라고 합니다. 각 분야의 첨단 기술들의 융합은 현재의 과학기술의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여 궁극적으로 신 산업 창출을 통한 고소득 달성과 산업 및 연구시스템의 융합을 촉발하는 시발점으로 크게 주목 받고 있습니다. 기술의 융합과 복합화(Complex)는 21세기를 열어가는 키워드로서 물리, 화학, 생물, 전자공학, 기계공학, 재료공학 등의 단위기술의 발달이 기술발전을 주도했던 상황에서 기술 간의 융합을 통한 새로운 패러다임 변화는 창의적인 과학기술, 인간과 사회를 위한 과학기술을 진흥해나가는 형태로 진화해 나간다는 것입니다.
기술의 융합화는 개별 기술의 단순한 개량뿐만 아니라 새로운 돌파 형 기술 개발을 가능하게 하고 기술혁신을 가속화시킬 것입니다. 그러나 융합기술들은 기술적 발현 형태 및 전개 양상에 따라 10년 또는 20년 뒤 인류가 기대하는 것처럼 ‘건강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게 될 수도 있겠지만, 반면에 소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기형의 몬스터가 출현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나는 융합기술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낼지 상상하기도 싫습니다. 인간의 교만은 자신들의 과오를 절대 인정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역사가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명명백백하게 보여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괴상한 메시야 사상에 빠져 있습니다. IT, BT, NT의 융합 기술이 인간의 질병 문제, 식량 문제, 환경 문제를 획기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융합 기술이 긍정적으로 발전한다고 해도 인간의 이기심과 증오심과 미움과 시기심을 치료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칼에 찔러 피를 흘리는 로봇이 등장하고, 인간의 두뇌를 해킹하는 기술, 다른 사람의 몸을 도용하는 기술이 일반화 될 때 인간의 존엄성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 때는 지금보다 훨씬 더 내일을 예측할 수 없게 될 것이고 그로 인해 사람들은 더욱 불안해하게 될 것이고 더 불행하게 될 것입니다.
지식과 과학 기술이 발전할수록 정의는 더욱 무시되고 힘과 폭력이 지배하게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융합 기술이 고도로 발전하게 되면 우리의 영혼이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될까요? 인류의 역사는 전쟁과 질병과 고난으로 점철되었습니다. 유대인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한민국의 역사도 미국의 역사도 예외가 아닙니다. 다른 나라와 싸우고 민족끼리 싸우고 호족들끼리 싸우고 가문끼리 싸우고 가족끼리 싸우고 부부가 싸우고 성도들끼리 싸웁니다. 그것이 인간의 역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는 인간은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는 불안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한 불안이 인간으로 하여금 종교적이 되게 합니다. 초월자가 나타나서 모든 문제를 해결 해 주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도 메시야 사상도 일반적으로 설명하면 그런 것입니다.
기원전 587년에 바벨론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사로잡혀가서 70여 년 동안 남의 나라에서 지배를 받으며 살았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로마의 지배를 받으며 살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런 정복자들의 폭력적이고 무자비한 지배아래에서 인권과 자유를 유린당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속수무책으로 절망만 하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창조자로 믿었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정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폭력적 정복자들을 그냥 놓아두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언젠가 때가 되면 구원자를 보내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애굽이나 바벨론이나 페르시아나 로마가 아무리 막강해도 메시야가 오시면 그러한 제국을 제압하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메시야가 오셨지만 그 메시야께 당신이 메시야냐고 묻고 메시야이신 예수님께서 그렇다고 하시자 그를 믿은 게 아니라 돌로 쳐 죽이려 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가 아니라 자기들이 기대하는 메시야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메시야를 기다리는 데만 온통 신경을 곤두세웠지 메시야와의 관계에 집중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는 너무도 치명적입니다. 그들은 오신 메시야를 알아보지 못하고 메시야를 죽였습니다. 믿음은 종교적 열정이 아니고 하나님과 메시야이신 예수님에 대한 신뢰의 반응입니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 요 10:26 -
종교적 믿음이나 인간관계의 믿음도 반드시 구체적 대상이 있습니다. 기독교의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입니다. 우리가 이 삼위 하나님을 믿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비롯하여 천지를 창조하신 만물의 창조주이시고,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주님이시고,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도록 인도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무나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을 믿는 것이 아니고 창조의 하나님과 구원의 예수님과 우리를 돕는 성령님과 관계가 있는 사람만 믿습니다.
나는 나의 아내를 믿습니다. 내가 나의 아내를 믿는 믿음은 아내가 인격적으로 훌륭하기 때문이 아니고 나의 아내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내를 믿는 믿음은 남편과 아내라는 관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나의 아내가 아무리 인격이 훌륭해도 나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이 여자를 지금처럼 믿을 수 없습니다. 부부는 아무리 성격과 취미와 스타일이 다르고 성격 차이로 티격태격 싸워도 부부라는 그 관계에서 나오는 기본적인 믿음이 있습니다. 이 믿음이 없으면 부부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믿음이 부부의 관계를 맺게 하는 것이 아니고 부부의 관계가 믿음을 발생시킵니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를 사랑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고슴도치가 들으면 매우 기분 나쁠 이야기입니다. 고슴도치가 못생긴데다가 온 몸에 가시가 돋아나 얼른 보아서 누구를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선입견에서 그런 말이 나온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고슴도치뿐 아니라 모든 동물은 새끼를 사랑합니다. 누가 가르쳐 주는 것도 아닌데 어미는 새끼를 사랑하고 새끼는 어미를 전적으로 믿고 의지합니다. 어미와 새끼의 관계로부터 그런 사랑과 믿음이 나오도록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중에 사람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인지 아닌지 의견이 분분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복음서를 읽어보면 제자들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예수가 그리스도냐 하는 문제에 대해여 관심이 많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 11장 2절을 보면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러 온 세례 요한도 감옥에서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릴까요?”라고 물었습니다. 마 16:13절 이하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으셨고, 제자들의 대답에 의하면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잔 중 한 사람이라고 했다 합니다. 그러고 보면 그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메시야인지 아니신지 매우 궁금해 했습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가셔서 이곳 저곳을 둘러보시다가 솔로몬 행각을 거닐고 계실 때였습니다. 갑자가 예수님 곁으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아마도 이들은 예수님께서 메시야이심을 믿지 않는 이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께서 질문하였습니다.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여기 “마음을 의혹하게 하다.”는 것은 마음을 조이게 하다는 뜻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님께서는 직접 “내가 그리스도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세례 요한의 질문을 받았을 때도 보고 들은 바를 전하라고 하셨고,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을 때도 이를 네가 알게 하신 이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시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궁금했습니다. 자기가 메시야라는 건지 아니라는 건지 매우 궁금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속 시원하게 당신이 메시야인지 아닌지를 분명하게 말하라고 다그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역시 직접 그렇다 혹은 아니다 라고 대답하지 않으시고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 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메시야를 기다리는 유대인들의 마음은 간절하였습니다. 그들은 메시야가 오시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구약은 온통 메시야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왜 메시야를 기다릴까요? 메시야가 와야 모든 문제가 해결 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메시야가 오지 않으면 아무것도 해결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메시야를 보내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메시야 대망 사상은 인간 스스로 구원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메시야 대망 사상 배후에는 인간의 전적 무능과 전적 무지라는 성경적 인간관이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보내시겠다고 하셨고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직 메시야가 오시기만을 학수고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상은 유대인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민족에게 이런 사상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세상을 살아보니까 이대로는 안 된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된 것입니다. 이집트의 바로도, 바벨론의 느브갓네살도, 페르시아의 고레스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도, 로마의 시저도, 소크라테스도, 공자도 인간을 구원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뼈저리게 깨닫게 해 준 것이 인간의 역사입니다. 인간이 교만해서 안 그런 척 하지만 그래도 역사를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인류가 이 땅에 존재 해 온 이래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인간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민족에게나 메시야 대망 론 같은 게 있습니다.
오늘 날도 우리가 정직하게 역사와 현실을 관찰한다면 메시야 대망 론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미국의 대선 예비 선거를 지켜보면서도, 한국의 총선 소식을 전해 들으면서도, 정치와 경제와 환경 문제를 생각해도 문제가 해결 국면으로 가기보다는 점점 더 어려워져 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몇 해 전만해도 전문가들이 미래를 예측할 수 있었는데 요즘은 전문가들조차도 내일을 예측할 수 없다고 합니다. 정치 전문가가 내일의 정치를 예측할 수 없고, 경제 전문가도 내일의 경제를 예측할 수 없다고 합니다. 과학자도 과학의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고 합니다. 과학이 고도로 발전하여 인공위성이 태양계를 벗어나는 데까지 날아가고, 인간의 DNA까지 읽어내고, 인간을 대체할 로봇이 등장할 것입니다.
최근 IT(정보기술), BT(생명공학기술), NT(나노 기술)로 대표되는 미래형 첨단 기술 등에서 한 개 이상의 기술이 중첩되는 융합기술을 기술의 융합(Convergence)이라고 합니다. 각 분야의 첨단 기술들의 융합은 현재의 과학기술의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여 궁극적으로 신 산업 창출을 통한 고소득 달성과 산업 및 연구시스템의 융합을 촉발하는 시발점으로 크게 주목 받고 있습니다. 기술의 융합과 복합화(Complex)는 21세기를 열어가는 키워드로서 물리, 화학, 생물, 전자공학, 기계공학, 재료공학 등의 단위기술의 발달이 기술발전을 주도했던 상황에서 기술 간의 융합을 통한 새로운 패러다임 변화는 창의적인 과학기술, 인간과 사회를 위한 과학기술을 진흥해나가는 형태로 진화해 나간다는 것입니다.
기술의 융합화는 개별 기술의 단순한 개량뿐만 아니라 새로운 돌파 형 기술 개발을 가능하게 하고 기술혁신을 가속화시킬 것입니다. 그러나 융합기술들은 기술적 발현 형태 및 전개 양상에 따라 10년 또는 20년 뒤 인류가 기대하는 것처럼 ‘건강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게 될 수도 있겠지만, 반면에 소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기형의 몬스터가 출현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나는 융합기술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낼지 상상하기도 싫습니다. 인간의 교만은 자신들의 과오를 절대 인정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역사가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명명백백하게 보여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괴상한 메시야 사상에 빠져 있습니다. IT, BT, NT의 융합 기술이 인간의 질병 문제, 식량 문제, 환경 문제를 획기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융합 기술이 긍정적으로 발전한다고 해도 인간의 이기심과 증오심과 미움과 시기심을 치료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칼에 찔러 피를 흘리는 로봇이 등장하고, 인간의 두뇌를 해킹하는 기술, 다른 사람의 몸을 도용하는 기술이 일반화 될 때 인간의 존엄성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 때는 지금보다 훨씬 더 내일을 예측할 수 없게 될 것이고 그로 인해 사람들은 더욱 불안해하게 될 것이고 더 불행하게 될 것입니다.
지식과 과학 기술이 발전할수록 정의는 더욱 무시되고 힘과 폭력이 지배하게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융합 기술이 고도로 발전하게 되면 우리의 영혼이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될까요? 인류의 역사는 전쟁과 질병과 고난으로 점철되었습니다. 유대인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한민국의 역사도 미국의 역사도 예외가 아닙니다. 다른 나라와 싸우고 민족끼리 싸우고 호족들끼리 싸우고 가문끼리 싸우고 가족끼리 싸우고 부부가 싸우고 성도들끼리 싸웁니다. 그것이 인간의 역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는 인간은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는 불안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한 불안이 인간으로 하여금 종교적이 되게 합니다. 초월자가 나타나서 모든 문제를 해결 해 주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도 메시야 사상도 일반적으로 설명하면 그런 것입니다.
기원전 587년에 바벨론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사로잡혀가서 70여 년 동안 남의 나라에서 지배를 받으며 살았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로마의 지배를 받으며 살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런 정복자들의 폭력적이고 무자비한 지배아래에서 인권과 자유를 유린당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속수무책으로 절망만 하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창조자로 믿었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정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폭력적 정복자들을 그냥 놓아두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언젠가 때가 되면 구원자를 보내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애굽이나 바벨론이나 페르시아나 로마가 아무리 막강해도 메시야가 오시면 그러한 제국을 제압하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메시야가 오셨지만 그 메시야께 당신이 메시야냐고 묻고 메시야이신 예수님께서 그렇다고 하시자 그를 믿은 게 아니라 돌로 쳐 죽이려 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가 아니라 자기들이 기대하는 메시야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메시야를 기다리는 데만 온통 신경을 곤두세웠지 메시야와의 관계에 집중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는 너무도 치명적입니다. 그들은 오신 메시야를 알아보지 못하고 메시야를 죽였습니다. 믿음은 종교적 열정이 아니고 하나님과 메시야이신 예수님에 대한 신뢰의 반응입니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 요 10: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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