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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려가 필요치 않은 사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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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12-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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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에게는 물이 필요하고 사람에게는 격려가 필요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담이 지은 죄 때문에 모든 인간은 본래의 의(original righteousness)를 상실했고 따라서 인간의 모든 성품은 부패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아담을 제외한 모든 사람은 죄를 지어 죄인 되는 것이 아니고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죄인이라는 상황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지은 죄에 대한 벌을 예수님이 대신 받으셨기 때문에 그를 믿는 자는 면책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이 대신 벌을 받은 죄로 다시 사람에게 벌을 내리지는 않으십니다. 단 그 면책 특권은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만 주어집니다. 예수를 믿는 자는 면책을 받았지만 여전히 죄인입니다. 즉 의롭다 함을 받은 죄인입니다. 의롭게 된 것이 자기의 노력이나 수준에 의해서 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거스틴은 말하기를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인간이 있을 뿐인데, 하나는 자기가 죄인임을 인정하는 죄인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가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는 죄인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상식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담이 지은 죄에 대한 벌을 그의 모든 후손이 받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래도 이것은 억울하게 느껴집니다. 바울은 이 상황을 로마서 5장에서 설명합니다. 즉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그 죄가 모든 사람 위에 왕 노릇 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억울하다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하지만 그 다음 설명은 한 사람 예수님의 죽음으로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어 생명에 이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대표의 원리가 아담의 죄책에 적용된 것은 우리로 하여금 억울하다는 생각을 하게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에 적용된 대표의 원리는 앞의 억울하다는 생각을 상쇄시키고도 남습니다. 이론적으로 생각한다 해도 대표의 원리가 범죄와 구속에 균형 있게 적용되었으므로 공평하지 않다거나 인간에게 불리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사실 이 대표의 원리는 현재에도 통용되고 있습니다. 1905년 11월 17일 한국과 일본이 맺은 을사조약(乙巳條約)은 대한제국 정부의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제국 정부의 하야시 곤스케에 의해 체결되었지만 그 효력은 대한민국 모든 국민에게 미치게 되었습니다. 일본의 강압과 이완용과 같은 매국노에 의해 주도되었지만 온 국민이 그 조약의 책임 하에 놓이게 된 것도 대표의 원리입니다. 지금도 FTA의 협정에 서명하는 것은 국가의 대표이지만 그 책임은 모든 국민에게 미칩니다. 어느 나라 국민이나 이런 상황은 피할 수 없습니다.

감사한 것은 아담의 죄책이 그 후손 모두에게 미치게 한 대표의 원리가 인간에게 부당하다는 생각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도 대표의 원리로 우리에게 적용되게 하셨다는 사실이 압도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원리를 고백적으로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라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여전히 두 가지 상황 아래 놓여 있습니다. 아담으로부터 비롯된 모든 죄책은 면제받았고 성령의 인도 아래 의와 선을 추구할 수 있지만 여전히 죄의 지배와 위협 아래 있습니다.

인간의 전적 부패란 불신자는 아무런 착한 일도 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선하고 착한 일을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불신자들도 자기의 양심이나 자존심이나 명예나 공익을 위해 얼마든지 착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의 선이나 착함이 아니라 순전히 자기의 자존심이나 명예나 양심을 따른 도덕적 선이고 착한 일입니다. 착한 일이라는 점에서는 신자나 불신자의 일이 다르지 않으나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일로서의 착한 일이라는 점에서 신자의 착한 행동은 불신자의 착한 행동과 다릅니다. 신자는 자기의 양심이나 명예 때문에 착하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이기 때문에 착하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가 성령의 인도를 따라 착하고 선하게 행동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바울조차도 낙심천만이었습니다. 바울도 선을 행하고 싶었으나 원하지 않게 악을 행하는 자신을 인하여 슬퍼하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상에 의인은 한 사람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별 수 없습니다. 인간의 지식이나 경험으로 깨닫는 판단은 다른 사람을 낙심시키고 좌절시킬 뿐입니다.

바리새인은 당대에는 기도하는 사람이고, 구제하는 사람이고,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이고, 율법의 가르침에 철저한 사람이고, 백성들의 스승이었고 그 지역 사회의 유지였습니다. 하지만 그 인격과 지식과 경험으로 사람을 정죄하고 낙심시켰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위로와 격려와 용서의 눈으로 사람들을 보셨습니다. 모자라는 것을 비난하거나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심지어 실수까지도 덮어 주시고 불문에 붙이셨습니다. 고의적이고 지속적이고 반역적인 죄에 대해서는 용납하지 않으셨으나 실수나 부족 같은 것은 포용하시고 용서하시고 덮어주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모자라는 사람이고 실수가 많은 사람입니다. 용서가 필요하고 격려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폴 틸리히(Paul Johannes Tillich)는 독일의 신학자이자 루터교 목사입니다. 틸리히는 같은 시대에 활동하던 신정통주의 신학자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의 영향을 받았고, 그가 구사하는 현상학적인 용어의 대부분은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따라서 나로서는 그의 신학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지만 20세기가 낳은 최고의 지성이라는 사람들의 평가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도 낙심천만의 순간이 있었고 작은 격려에 용기를 얻었다는 일화가 있어 소개합니다. 독일에서 교수생활을 하다가 기독교사회주의자로 지목받아 나찌 정권에 의해 국외로 추방당한 그는 1933년 라인홀드 니이버 형제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이민 왔습니다. 미국에서 유니온 신학교와 콜롬비아 대학을 거쳐 1955년에는 하바드 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교수했으며 그로 인하여 하바드 대학 내에 한때 종교부흥운동이 일어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처음 유니온 신학교에 와서 가르칠 때 투박한 독일어 악센트 때문에 학생들이 강의를 잘 알아듣지 못하였고 또 학생들이 그 발음 때문에 웃어서 교수직을 포기하려고까지 낙심하였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학생으로부터 엽서로 된 편지 한 장을 받았습니다. 그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선생님, 우리가 웃는 것은 선생님의 발음 때문이지 가르치는 내용 때문이 아닙니다. 그러니 낙심하지 마세요. 용기를 내세요. 선생님,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이 편지를 받고 폴 틸리히가 무릎을 꿇고 펑펑 울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그 학생이 너무 고마워 오랫동안 그 편지를 간직하였습니다. 그 편지를 보낸 학생은 “自我를 잃어버린 現代人”이라는 책으로 유명한 Rollo May입니다. 그는 유명한 심리학 교수가 되었고 후일 폴 틸리히와 서로를 보완하는 스승과 제자로서 또는 친구로서 지내게 되었다고 합니다.

바울도 오네시보로에게 많은 격려를 받았습니다. 우리 중에 격려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약점과 허물은 누구에게나 있고 선을 행하고 싶으나 악의 유혹이 강하기 때문에 늘 실패하고 낙심하는 우리들입니다. 부모님께도 나라님께도 목사님께도 부부 간에도 모두가 서로 돌아보며 사랑과 선행을 격려해야 합니다.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살전 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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