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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목사 "인간의 존재 방식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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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23-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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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시니어 세대가 터득한 나름의 건전한 인생 철학은 하고 싶은 것 하면서 남에게 피해를 안 주고 건강하게 사는 것입니다. 하고 싶은 것 중에는 먹고 싶은 것 먹고 가고 싶은데 가고 부담 없는 친구와 만나서 잡담을 나누고, 집중할만한 취미 생활 하나쯤 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정리된 인생 후반기의 인생 철학에 100% 만족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삶을 업그레이드할 사유의 역량이 뒷받침되지 않아 의기소침하게 상투적 일상을 사는 이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이 정도만으로도 괜찮게 인생 후반을 사는 것이라고 자부하고 싶은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고 해도 이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가치관으로 사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현실에 문제를 제기해보려고 합니다.

20세기에 풍미(風靡)했던 실존주의는 표면적으로 기독교와 너무 흡사하여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켰고 지금까지도 실존주의 가치관과 기독교 가치관에 혼란을 겪는 이들이 많습니다. 실존주의가 철학이기 때문에 전문적으로 공부하지 않은 이들은 그 개념이 분명하지 않겠지만, 현대인 중에 실존주의에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중에는 철학인 실존주의가 기독교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실존주의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실존주의를 파악하는 것이 필요한 이유는 기독교 신앙이 실존주의로 인하여 상당히 왜곡되기 때문입니다.

실존주의(實存主義:Existentialismg)는 개인의 자유, 책임, 주관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철학적, 문학적 사상입니다. 실존주의에 따르면 인간 개인은 단순히 생각하는 주체가 아니라 행동하고, 느끼며, 살아가는 주체자입니다. 실존주의는 19세기 중엽 덴마크의 철학자 키르케고르에 의하여 주창되었습니다. 실존주의는 유신론적 실존주의와 무신론적 실존주의로 갈라집니다. 유신론적 실존주의 철학자는 야스퍼스, 가브리엘 마르셀 등이고, 무신론적 실존주의 철학자는 하이데거,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보부아르 등입니다. 실존주의가 기독교 신앙에 위협이 되는 것은 유신론적 실존주의도 있기 때문입니다.

실존주의는 인간 이해에 있어서 ‘실존은 본질에 선행(先行)한다.’라고 하여 인간은 주체성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와 같은 실존은 ‘인간’이라고 하는 개념으로 정의되기 이전에 이미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즉, ‘내가 있다.’라고 하는 전제로부터 출발하여 그 ‘나’를 세계와 연결 지음으로써 그 전제를 확인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데카르트가 말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하는 논리를 뒤집어서 어떻게 하면 ‘내가 존재’한다고 하는 사실을 먼저 파악할 수 있는가를 추구합니다. 이러한 실존주의에 영향을 받아서 신학을 한 신학자는 칼 바르트, 에밀 브루너, 루돌프 불트만, 그리고 폴 틸리히 등입니다.

이들 신학자가 실존주의 철학에 영향을 받아 신학을 한 것을 보아 실존주의가 성경의 가르침과 얼마나 비슷한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실존주의는 내가 착한 사람이기 때문에 남을 돕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남을 잘 돕기 때문에 착한 사람이 된다고 합니다. 언뜻 생각하면 맞는 말 같지만, 문제는 그러한 실존주의가 성경의 가르침과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실존주의는 인간의 고유한 본성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실제 행동을 통해 자신을 만들어 가는 존재라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주장은 합리적인 사람들에게 상당한 설득력이 있습니다. 한국에 많은 이들에게 존경받는 100세를 넘긴 실존주의 철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인인데 그의 철학적 에세이는 수많은 사람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기독교인과 일반인들에게까지 큰 영향을 미친 그의 에세이는 전형적인 실존주의 철학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실존주의에 의하면 모든 사물은 무의미한 존재이지만 인간은 그 무의미한 것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존재라는 면에서 다른 사물과 구별된다고 합니다. 이러한 주장은 성경이 가르치는 인간론과 충돌합니다. 성경은 인간의 본질을 하나님에 의해서 규정된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인간이 주체적인 존재인 것도 맞지만 그보다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께 의존적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성경의 윤리적 명령은 인간 존재의 본질, 즉 신분에 따라 주어진 것이지 윤리적 행위가 신분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실존주의자들은 인간의 존재 방식을 불안이라는 정서에서 이해합니다. 그 불안이 인간에게 끓임 없이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움직이게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불안을 죄의 결과가 아닌 불완전한 운명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은 자신의 존재 자체를 문제 삼는 방식으로 존재한다고 설명합니다. 즉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뇌하면서 보다 나은 삶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인간의 존재 방식이라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실현을 목적으로 삼습니다. 이러한 실존주의 논리는 인간 이해를 위한 토대를 성경 계시가 아닌 인간 스스로가 파악한 ‘실존’에 두는 것입니다. 즉 자기 존재의 근거를 자기의 실존에서 찾는 것입니다.

실존주의를 잘 설명하는 알버트 카뮈의 “시시포스의 신화”에 의하면 시지포스(Σίσυφος)는 바람의 신인 아이올로스(Aeolus)와 그리스인의 시조인 헬렌(Helen)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시지프스는 올림퍼스 신들의 실수를 잘 일러바쳐 신들의 미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결정적인 것은 제우스가 독수리로 둔갑하여 강신(河神) 아소포스(Asopos)의 딸을 납치한 것을 시시포스가 아소포스에게 알려준 일이었습니다. 제우스는 저승 신 타나토스(Tanatos)에게 명하여 시시포스를 잡아 오라고 하였으나 시시포스는 타나토스를 감옥에 가둬버리고 말았습니다. 결국, 전쟁 신 아레스(Ares)가 나서서 타나토스를 구하고 시시포스는 저승으로 잡혀 오게 되었습니다. 시시포스는 여기서도 꾀를 내어 저승에서 탈출하여 잠시 이승에서 살게 되지만, 결국 하데스에 의해 이끌려 지옥의 형벌을 받게 됩니다. 시시포스가 받는 형벌은 큰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밀어 올리는 것이었는데, 그러고 나면 바위는 다시 땅으로 떨어져서 시시포스는 계속 다시 바위를 꼭대기까지 밀어 올려놓아야만 합니다.

시시포스의 신화는 카뮈가 실존주의를 설명한 유명한 신화입니다. 카뮈는 사회의 부조리를 발견하는 것은 자신이 시시포스의 인생임을 자각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카뮈는 2가지 선택을 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는 자살을 통해 부조리에서 도피하는 방법이고 또 다른 하나는 시시포스의 고귀한 성실을 본받아 노력하는 것 자체에 삶의 의미를 두고 사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카뮈는 철학적 자살에 대한 의미를 정의했으며 2차 세계 대전 이후 세계에 만연한 부조리들에 대한 실존주의적 성찰과 대안을 제시하였습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실존주의의 삶의 방식은 시시포스의 그것과 매우 유사합니다.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밀어 올리는 노력을 끝없이 반복합니다. 카뮈가 시시포스가 바위를 온 힘을 다해 밀어 올리는 노력과 투쟁은 바로 인간의 신들에 대한 간접적 승리이며 고귀한 성실의 결정체라고 하였듯이 우리 현대인들은 하루하루의 일을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 삶의 부조리를 이겨내는 방법이라고 한 셈입니다. 또한, 시시포스가 산에서 내려올 때마다 자신의 비참한 조건에 대하여 생각하고 고통을 인식하여 자아를 지켰던 것처럼 현대인들은 일에만 종속되거나 매몰되지 않고 기타 취미활동인 독서, 음악, 예술, 연애 등을 통해 자아를 잃지 않도록 현명하게 대처하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라고 충고한 것입니다. 무엇보다 삶의 지향성을 단순한 돈과 쾌락에 두지 말고 자기의 존재에 관심을 두고 자아의 성장에 목표를 두고 이기적인 자세를 버리고 타인과 소통하고 교류하는 자세를 추구하라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러한 실존주의의 메시지를 기독교 복음의 메시지와 잘 구별하지 못합니다. 실존주의 인간 존재 형식은 자기실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실존주의 인간 존재 방식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존재 방식과 어떻게 다른지 잘 분간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인간 존재 방식은 하나님의 존재 방식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아무도 부정하지 않지만,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이들은 많습니다.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유신론,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신론, 그 존재를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도 있습니다. 신이 없다는 무신론과 신 존재를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에 대해 우리가 깊은 관심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이들의 신 존재를 증명하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음은 알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 존재를 증명하는 방법에 따라 성경에 계시 된 하나님을 만날 수도 있고 전혀 엉뚱한 하나님을 만나게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자연신학은 이 세계가 아름답고 또한 합리적이며 완전한 질서를 지니고 있어서 이러한 세계를 창조한 현명한 신이 존재해야만 한다고 설명합니다. 우주론적으로 신의 존재를 설명하는 이들은 자연과 인과관계를 계속 추적해 가면 제1 원인인 신을 부인할 수 없게 된다고 합니다. 존재론적 설명은, 인간은 불완전하고 신과 인간은 상호 관련이 있으므로 완전무결한 신이 존재해야만 한다고 합니다. 목적론적 설명은 자연이 어디까지나 목적에 적응한 질서를 지닌 이상, 자연 전체의 설계자로서의 신이 존재해야만 한다고 합니다. 도덕적 설명은 우리에게 그 실행을 강력히 요구하는 도덕 법칙의 원천으로서 신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미학적 설명은 아름다움을 통하여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오직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받아들일 때 성령의 역사로 성경 계시를 통해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로 하나님을 믿게 되어도 하나님의 존재를 설명하는 방식에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론이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삼위일체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 대한 성경의 계시를 서술한 것입니다. 따라서 삼위일체를 논리적으로 증명하려고 하면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최종적이고 가장 확실한 증명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존재와 뜻을 가장 확실하고 최종적으로 계시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완성이지만, 이를 다르게 표현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하나님 존재 방식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고 인간의 존재 방식은 하나님의 존재 방식에서 그 근거와 본과 이상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 1:1,2).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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