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잊어버린 세대1 > 오피니언

본문 바로가기



이곳은 2017년 이후에 올려진 글입니다. 이전에 올려진 오피니언 글은 지난 오피니언 게시판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오피니언

하나님을 잊어버린 세대1

페이지 정보

황상하2023-07-02

본문

황상하최근에 이곳 미국에 사는 한인교포 중에 조국을 방문하는 이들이 부쩍 늘었습니다. 항공료가 많이 올랐는데도 조국을 방문하는 교포들이 많은 것은 그들의 경제적 상황이 옛날보다는 많이 좋아졌기 때문입니다. 뿐만이 아니라 한국의 경제적 상황 역시 좋아졌기 때문이고 지방자치제로 인하여 전 국토가 관광지 수준으로 개발되어 관광대상으로도 만족스럽기 때문일 것입니다. 교포들은 그들이 조국을 떠날 때의 상황과 비교가 되어 발전한 조국의 위상에 깊은 인상을 받습니다. 지금의 한국은 40여 년 전과 비교하면 쉽게 상상이 안 될 정도로 발전하였습니다. 무엇보다 일상의 편의와 발전한 사회보장제도는 이곳 미국에 사는 교포들이 역이민의 동기를 갖기에 충분조건이 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역이민의 수가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대부분 한인교포는 역이민에 고개를 갸웃합니다. 한국 사회에는 서구인이나 합리적 사고를 하는 이들에게 쉽게 이해가 안 되는 아이러니한 사회적 지표와 통계가 있습니다. 경제 성장지표와 사회보장제도와 첨단 편의 시설의 사회적 인프라는 소위 서구 선진국에 버금가고 어떤 분야에서는 능가하기도 하지만 그것을 누리는 만족도는 많은 사람을 의아하게 할 정도로 낮습니다. 경제력을 비롯한 사회적 인프라는 세계에서 상위인데 국민 삶의 만족도는 하위입니다.

똑같이 집을 지어도 집 짓는 것을 기술적인 차원에서만 생각하고 집을 짓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벽돌을 쌓을 때 수직과 수평을 잘 맞추고 벽돌과 벽돌 사이를 시멘트로 잘 연결하는 데만 신경을 쓰면 됩니다. 그런 기술을 배우는 데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건축을 단순히 기술적 차원에서 이해하지 않고 예술적 차원으로 승화시키려는 사람은 평생 연구하고 노력해도 끝이 없습니다. 그 결과 좋은 집을 짓게 되는 것입니다. 단순한 기술자의 눈에는 똑같아 보이는 벽돌도 예술적 차원을 생각하는 사람의 눈에는 미세한 차이가 있을 것이고 그것을 살려서 작품성을 창조하는 것입니다.

인생을 사는 것도 삶을 그저 기술적 차원에서만 생각하여 살면 삶이 별 의미가 없고, 새로운 것을 시도해도 금방 싫증이 나서 불행하게 됩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약점이 두드러집니다. 몇 년 지난 통계이기는 하지만, 한국 사람들은 OECD 110개국 가운데 삶의 만족도가 104위라고 하는 통계가 나온 적이 있고 그러한 경향은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경제력이 세계에서 10위권에 올라 있고 인터넷은 세계에서 가장 앞서가고 드라마 영화 노래 춤 등 한류가 세계인들에게 어필하고 있는데 삶의 만족도는 하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여러 통계가 있습니다. 높은 자살률 이혼율 등이 바로 일상에서 만족하지 못하고 불행하다고 느끼는 증거들입니다. 그 이유는 잘 사는 것을 단순히 기술적이고 물리적이고 감성적인 것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러한 특성은 이곳 미국에 와서 사는 교포들에게도 예외가 아닙니다. 똑같은 밥을 먹어도 맛있게 먹는 사람이 있고 맛없게 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밥을 맛있게 먹는 고전적 비결은 배고플 때 먹는 것입니다. “시장이 반찬이다.”라는 말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밥은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서만 먹는 것이 아닙니다. 먹어서 건강해야 하는데 건강을 위해서는 식사 시간이 규칙적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먹고 마시는 것에 즐거움이 있어야 하고, 나아가서는 먹고 마시는 것으로 건강해야 합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먹고 마시는 것으로 인간관계를 윤택하게 해야 합니다. 먹는 것이 중요하니만큼 먹는 것으로 다른 사람을 배려해야 합니다. 밥을 먹는 행위에 생존과 건강과 이웃 사랑과 즐거움과 예술과 신앙의 차원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바울이 말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서 하라”는 것입니다. 음식을 먹는 행위가 단순히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한 생존의 수단만이 아닙니다. 밥을 먹음으로 생존하고 건강하고 즐겁고 사회를 윤택하게 하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나아가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일상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웃을 사랑하고 나와 온 가족이 보람과 행복을 누리는 은총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한국은 전 국민이 미식가 같고 모든 식당이 맛집 같고 인터넷을 비롯한 사회복지 인프라가 그렇게 잘 되어 있는데도 그 모든 것을 보람과 만족으로 누리지 못한 데는 반드시 이유와 원인이 있을 것입니다.

구약 신명기는 하나의 조약문서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조약문서가 아니고 종주국과 종속국 사이에서 맺는 조약문서 형식입니다. 종주국과 종속국의 조약문서는 새로운 관계에 들어가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종주국은 하나님 나라이고 종속국은 이스라엘입니다. 신 1:1-5절까지는 신명기의 전체 서언이고, 1:6-4:43절까지는 역사적 서언입니다. 역사적 서언이란 조약이 맺어지게 된 역사적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 역사적 서언의 내용을 보면 첫째는 아브라함으로부터 모세까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언약의 전통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신명기가 일반적 조약의 경우와 다른 점입니다. 둘째는 그 조약을 하나님께서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조약을 이루셨다는 것은 곧 하나님은 조약을 이루실 수 있는 분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이러한 조약 즉 언약 관계에서 하나님은 언약의 의무를 신실하게 지키셨지만, 이스라엘은 그 언약을 파기했습니다. 신명기의 역사적 서문에서 이 점을 상기시키는 말씀이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그저 신앙생활 잘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주 엉뚱하게 틀린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하시는 한 마디는 그렇게 두루뭉술한 덕담이 아닙니다. 오늘날은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지나치게 경박스럽게 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모든 신앙 행위가 감성적이고 형식적이고 심리적인 것으로 되어가고 있습니다. 감성도 형식도 심리도 나름대로 다 소중합니다. 문제는 그런 것 때문에 메시지의 핵심에서 빗나가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는 말씀은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삶과 죽음, 또한 생명 완성과 구원과 그 모든 것의 전반에 대한 깊은 통찰과 지혜가 담긴 말씀입니다. 성경 곳곳에 이런 명령이 주어져 있습니다. 이 명령이 바로 구원의 길이요 생명의 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말씀을 통해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랜 군 생활에 지친 군인은 전역하는 날 “고생 끝, 행복 시작”이라고 착각합니다. 군대 생활이 너무 지겨워서 거기서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막상 제대하고 보면 사회생활은 군대 생활보다 어렵습니다. 가나안 입성을 눈앞에 두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기분은 마치 제대를 하게 되는 군인과 같았을 것입니다. 그 지겨운 광야 생활은 끝나고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도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완전히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가나안이 광야보다는 백배 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실을 전제하시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러한 사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은 아닐 것입니다. 나름대로 계획도 세우고 대비도 하였을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형편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의 입을 통하여 당부하는 말씀이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기억하라는 말씀은 잊지 말라는 뜻입니다. 신명기 8장에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말씀이 세 번이나 반복하여(11, 14, 18) 나옵니다.

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이스라엘이 들어가서 살게 될 가나안 땅의 형편은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않고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될 위험이 있다는 뜻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서 살게 되면 모든 것이 광야보다 나아집니다. 그런데 한 가지 나빠지는 것이 있습니다. 잘살게 되면 하나님을 잊게 될 위험이 크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은 실제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기억하고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염려하시는 일은 반드시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걱정하시고 염려하시는 일이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반복하여 일어났습니다.

그것이 어떤 과정을 통해 일어나는지 성경은 말해줍니다.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신 8:12-14).

소유의 증식은 마음을 교만하게 만들고, 마음이 교만하게 되면 그것은 곧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이와 같은 성경적 진단은 미국이나 한국이나 어느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먹어 배부르고 은금이 증식된 부유한 사회에서 많은 사람을 불행하게 하는 폐단이 있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닌 소위 갑질입니다.

갑질이란 사회적 계약 관계에서 갑은 힘과 돈이 있는 쪽이고 을은 힘도 돈도 없는 쪽입니다. 이 둘이 계약을 맺지만, 쌍방이 계약대로 하는 게 아니라 힘과 돈이 있는 갑이 돈과 그 힘을 믿고 을에게 마구 대하는 것은 갑질이라고 합니다. 강자가 약자에게 무례하게 하는 모든 것이 갑질입니다. 갑질은 부자나 권력자뿐만이 아니라 사회 지도층 인사들 모두가 하는 것입니다. 국회의원도 검찰도 교수도 목사도 갑질하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말씀이 어떤 의미에서는 갑질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갑질의 특징은 교만이고 교만은 하나님 없는 행위의 전형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소유가 많아지면 교만하게 됩니다. 겸손한 부자도 있을 수 있고 겸손한 학자도 있을 수 있고 겸손한 지도자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자나 학자나 지도자는 대개 교만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는 부자가 되고 박사가 되고 권력을 가져도 절대로 교만해지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생각 자체가 교만한 생각입니다. 그래서 잠언 기자가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잠언 30:8-9)라고 기도하였습니다.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 아멘넷 뉴스(USAamen.net)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오피니언 목록

게시물 검색



아멘넷의 시각게시물관리광고안내후원안내ㆍ Copyright © USAamen.net All rights reserved.
상단으로

아멘넷(USAamen.net) - Since 2003 - 미주 한인이민교회를 미래를 위한
Flushing, New York, USA
카톡 아이디 : usaamen / USAamen@gmail.com / (917) 684-0562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