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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23-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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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주 후 3세기 이후의 교회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생명 활동을 가로막아왔습니다. 건물 없이도 로마 제국을 복음으로 정복해 오던 교회가 콘스탄틴 황제의 배려로 건물과 재물을 얻게 되자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로서의 교회는 화려하고 웅장한 건물과 세상이 부러워하는 명예와 권력과 지위를 안겨준 콘스탄틴의 후예가 되었고, 새롭게 생겨난 교회의 계급 구조에 따라 세워진 바실리카를 교회에 강제로 물려준 로마인들과 그리스인들에 의해 눈이 멀었고, 플라톤식 건축양식을 떠맡긴 고트족에 의해 사로잡혔고, 우리에게 신성한 뾰족 탑을 전해 준 이집트인들과 바벨론 사람들에 의해 영적으로 사로잡힌 꼴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아테네 사람들에 의해 이방 신전의 위엄 상징인 도리스식 기둥을 교회 건물에 세우므로 교회의 진정한 영적 권위를 사기당하고 말았습니다.

교인들은 교회 건물 안에 있을 때 다른 곳에 있는 것보다 더 거룩한 느낌이 들도록 배웠고,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교회 건물에 병적으로 의지하는 것을 전통적인 경건인 양 물려받고 물려주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사실 콘스탄틴의 명령으로 세워진 교회 건물은 교회가 무엇이며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교인들에게 아주 왜곡된 이해를 하도록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를테면 콘스탄틴의 교회 건물은 모든 신자가 제사장임을 부정하는 건축양식입니다. 교회 건물은 세상 문화에 역행하는 공동체인 에클레시아가 그리스도의 머리 되심 아래서 살아 숨 쉬며 기능을 수행하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실을 신자들이 이해하고 경험하지 못하도록 방해하였습니다. 교회 건물을 세우는 것이 교회를 세우는 본질처럼 지지하고 강조하는 것은 콘스탄틴 교회 건물이 현대 교회에 물려준 비성경적 유산이라는 그릇된 사실로부터 모든 그리스도인이 깨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의식하든 하지 못하든 사람이 세운 건물을 교회라고 부름으로써 신약 성경이 가르치는 교회를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모든 그리스도인이 교회의 본질을 바르게 배우고 인식하여 다시는 건물을 교회라고 부르지 않는다면, 이것만으로도 현대 교회는 혁명에 가까운 개혁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콘스탄틴 교회 건물이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유기적 교회를 왜곡하여 교회 안에 계급을 만들어 교회를 세속 집단처럼 변질시켰습니다. 존 뉴턴(John Newton)의 "뾰족탑 아래에서 예배하는 사람은 굴뚝 밑에서 예배하는 사람을 비난하지 말지어다."라는 말은 콘스탄틴 교회 건물의 모순과 부작용을 잘 지적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뽀족 탑으로 상징되는 콘스탄틴 교회 건물은 교회 본질에 비춰볼 때 그 어떤 성경적이거나 영적 권위의 정당성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콘스탄틴의 교회 건물이 단순히 이방 신전이나 고대의 공공건물들을 모델로 삼아서 세웠기 때문에 반대하거나 비난하는 것이 아닙니다. 콘스탄틴에 의해 그와 같은 교회 건물이 세워지게 되자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과는 상관없는 일들이 마치 교회를 세우는 일처럼 강조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교인들이 교회 건물을 마치 그리스도의 몸인 것처럼 성스럽고 거룩하게 생각하게 하였습니다. 물론 성경이 이러한 사실을 구체적으로 또는 명시적으로 다루지는 않지만, 콘스탄틴 교회 건물과 그 전통을 이어받은 현대 교회 건물은 교회에 대한 신약 성경의 가르침과 원리에 맞지 않는 교훈을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화려하고 웅장하고 세련된 예술적 아름다움이 강조되고 심리적 감성적 반응을 자아내도록 설계된 건물에 앉아서 예배하는 교인들은 예배하는 내내 그러한 건물과 분위기에 심취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의로우심을 기억하고 배우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 그리스도인은 교회 건물 안에서 하는 예배와 "교회"를 동일시합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교인들에게 주일 아침에 "교회에 가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할 때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하지 말고"(히 10:25)라는 말씀을 인용합니다. 신약 성경의 저자들이 교회에 대해 말한 것은 일주일에 한 번 특별한 건물 안에서 하는 예배에 수동적으로 앉아 있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요즘 교회들이 예배를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도 엄격한 의미에서 신약 성경의 가르침을 올바르게 따르는 것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교회라는 올바른 개념과 그 교회의 유기적 기능에서 생각할 때 지금의 교회 기능과 예배의 형태들은 교회가 제 기능을 발휘하고 참여하는 것에서 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 건물의 구조와 예배 형태는 여전히 교인들을 능동적 참여가 아니라 수동적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교회 건물의 건축양식과 그런 건물에서 하는 예배가 회중석과 구별된, 높이 올려진 강대상과 예배의 순서와 내용 때문에 교회의 유기적 교제가 방해를 받고 있습니다. 같은 교인들이 가정집에서 모였을 때를 가정하면 교회의 교제가 어떻게 다르게 될지를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교회를 회중석에 앉아서 대부분 수동적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지금의 교회 건물은 그런 목적에 적합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 성경에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교회의 모습은 지금의 교회 건물에 모여서는 재현하기가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개혁하려고 하지 않는 것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데는 별 관심이 없고 교회 건물과 주도권과 대중의 욕구에 부응하여 사람의 칭찬과 인기를 탐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물리적이고 형식적인 것으로 권위를 세우려 하기 때문에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다툼이 일어나게 됩니다.

교회 건물이나 어떤 형식이나 상징물을 신성시하는 것은 이교적이고 율법주의적입니다. 구약의 신성한 장소로서의 성전이나 신성한 제사장 레위인, 그리고 신성한 제사의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완성되었기 때문에 폐하여졌습니다. 중세 교회가 계시의 역사를 거슬려 이 구약적 개념을 유대인들로부터 받아들인 것보다 이교도들에게서 더 많이 받아들였다는 사실이 교회의 왜곡이 얼마나 심각한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나는 현대 교회가 예배나 사역을 위해 건물을 사용하는 것이 무조건 틀렸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도 에베소에 있을 때 두란노 서원 건물을 빌려 사용하였고, 예루살렘교회 역시 특별 모임을 위해 성전의 바깥 뜰을 사용하였습니다. 다만 우리가 교회 건물을 '교회'나 '하나님의 집'이나 '성전'이나 '성소'나 '제단'이라고 부르는 것 때문에 교회가 왜곡되고 있는 폐단을 개혁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지금의 건물을 사용하더라도 그것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데 적합하지 않을 뿐 아니라 방해가 되고 있음을 충분히 인식하고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교회공동체가 교회 건물을 세우고 후대에 물려주는 것을 마치 사명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도 개혁되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 2:19-21)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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